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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의 다양한 싹틔우기 3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1 05:29:59     78

 

최근 지질학 역사를 보면 산불이 정기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광범하게 불태웠다. 이 지역의 식물들은 산불에 맞추어 진화했기 때문에 이제는 산불이 안 일어날 경우 생존에 지장을 받게 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산불을 자신들에게 이롭게 이용하고 있다.

이 지역의 유칼립투스 나무는 흔히 맬리라고 불리는데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정상적인 교목의 형태로 자라는 유칼립투스나무가 호주에서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나무의 종류가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인다. 맬리는 굵은 하나의 기둥줄기가 자라는 대신 키가 비슷한 여러 개의 작은 줄기들이 거대한 뿌리에서 돋는다.

초기의 영국 이주민들은 이 나무를 잡목으로 생각했다. 산불이 맬리를 휩쓸고 지나가면 가지들은 완전히 불에 타서 죽는다. 그러나 지면에 가까이 있거나 지면 아래 묻혀 있는 뿌리 위에 둥글게 자리 잡고 있는 새순에서 단 시일 내에 작은 가지들이 다시 돋는다. 산불이 지나간 후 주변에 있던 다른 식물들의 재로 인해서 토양이 더욱 비옥해지고 또 부분적으로는 맬리처럼 잘 갖추어진 뿌리로 토양의 자양분을 놓고 경쟁을 벌일 수 있는 생존자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새로 돋는 맬리의 줄기들은 전보다 더욱 왕성하게 자란다.

유칼립투스 속의 한 종류인 칼리스테몬은 줄기 끝에 주황색 꽃들이 무리를 이루어 피는 모습이 볼만하다. 그러나 씨가 맺혀도 산불이 일어나지 않으면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칼리스테몬을 살펴보면 마지막 산불이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있다. 가지에 붙어 있는 씨 깍지들의 수를 세어보면 그 나무가 불을 만나지 않고 산 기간을 알 수 있다.

남아프리카의 프로테아와 친척관계인 상록 관목 뱅크셔는 태평양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오로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만 서식하는 식물이다. 그리고 75가지가 넘는 종류 중 60가지가 남서부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나무에는 특이한 형태의 꽃이 피는데 하나의 화수에 수천 개의 작은 통꽃들이 밀집하여 핀다. 꽃들이 수직으로 줄을 지어 달린 화수가 약간 나선형으로 뒤틀린 것도 있다. 꽃들은 노랑색, 회색, 검붉은 색이며 혹은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된 것도 있다. 꽃망울은 수개월에 걸쳐 발달하며 핀 꽃들은 몇 주일 동안 유지된다. 진홍앵무와 같은 조류와 꿀 쿠스쿠스와 같은 유대류가 꿀을 마시면서 수분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단히 적은 수만이 씨를 맺는다. 일부 씨를 맺지 못한 꽃들이 꽃받침에 그대로 남아서 뻣뻣한 회색의 털처럼 보인다.

이 나무의 씨가 성숙하는 데는 1년가량 걸린다. 칼리스테몬과 마찬가지로 일부 뱅크셔 종류는 산불이 일어나지 않으면 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밸브가 두 개 달린 목질의 캡슐형 깍지 속에 들어 있는 씨를 빼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불길이 가지를 그을리면 뜨거운 열 때문에 캡슐이 터진다. 털이 있는 깍지가 양쪽으로 터진 것이 기묘하게도 마귀의 열굴을 연상시켜 오스트레일리아 동화의 주인공인 뱅크셔맨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반드시 산불이 지나가야 씨가 떨어지는 뱅크셔는 지면의 다른 식물들이 깨끗이 청소되고 재로 토양이 비옥해진 다음에 파종되기 때문에 생장여건이 극도로 나쁜 오스트레일리아의 황무지에서 최상의 생존여건을 보장받는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또한 그래스트리(grass tree)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이 특이한 식물은 이 대륙의 몇 군데에서 고립된 군락을 이루고 있으나 역시 대륙의 남서부가 본산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스트리는 영어명이 암시하듯이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이 식물은 백합과의 먼 친척이다. 풀을 닮은 길고 좁은 잎이 줄기의 끝부분에서 다발을 이루어 자란다. 줄기는 나무처럼 보이는데 높이가 대략 3미터가 넘는다. 줄기의 속부분은 목질이 아니라 섬유질이다. 그리고 껍질처럼 보이는 부분은 사실상 견고하게 밀집된 잎 줄기가 붙었던 자리인데 줄기의 끝이 자람에 따라 해마다 잎들이 떨어지고 나서 생긴 자리이다. 잎이 있던 자리는 다량으로 분비되는 수액으로 단단히 연결되며 열을 차단하는 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이 식물은 고리 모양으로 배열된 잎들을 일년에 한 번씩 떨어뜨리기 때문에 방화복 같은 껍질 잎자리의 테가 몇 개인지 세어보면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있다. 그래스트리는 키가 10년에 불과 30cm 정도 밖에 안자란다. 늙어갈수록 나이테가 적게 만들어지고 가늘어진다. 일부 그래스트리들은 수령이 대략 500년을 넘고 산불도 수십 차례 겪은 경우가 많다.

불길이 다가오면 이 나무들의 커다란 잎사귀 다발에 순식간에 불이 붙는데, 잎은 대단히 불에 잘 타서 순식간에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다. 그러나 내화성이 높은 껍질로 둘러싸인 줄기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산불이 지나간 다음 오래지 않아 다시 잎이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산불은 처음에는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부수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주변의 다른 식물들이 불에 탈 때 다량의 에틸렌가스가 나온다. 이 가스가 그래스트리의 줄기 속으로 스며들어 중요한 변화를 일으킨다. 산불이 지나간 지 몇 달 후 잎들이 다시 자라났을 때 잎들의 한 가운데 녹색의 줄기가 수직으로 자라오른다. 이 줄기는 그래스트리의 본줄기만큼 길게 자란다. 이어 줄기의 끝부분에 미세한 꽃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핀다. 에틸렌가스는 호주대륙의 관목 삼림지대에 광범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성숙한 그래스트리들의 거의 전부가 꽃이 피게 된다.

산불은 또한 불에 타지 않은 작은 식물들에게도 극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서부지역은 우기가 시작될 때 지면을 뒤덮은 작은 꽃들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해마다 피는 이 꽃들은 아프리카 남부의 건조지대와 비교할 만하다. 이러한 꽃들 가운데는 다년생도 있으며 건기 동안 지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우기가 되면 괴경(塊莖)이나 구근(球根)에서 새싹이 돋는다. 많은 소규모 관목숲들도 봄의 풍경을 장식하는 데에 한몫 거든다. 그러나 비가 식물의 싹을 틔우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식물의 꽃이 피는 데는 산불의 영향도 작용한다. 불이 탈 때 연기의 화학성분들이 지층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여러 달 후 비가 내려 이 성분들이 물에 녹으면서 땅 속 깊이 흘러들어가고 잠자고 있던 씨앗에 도달한다.

씨가 싹을 틔우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는 바로 이러한 화학성분들이다. 물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현상이 오스트레일리아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 황무지의 식물씨앗들도 동일한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발아한다. 이 발견으로 전세계의 원예가들은 과거에는 발아시키는 방법을 몰랐던 식물들의 씨를 오늘날에는 발아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식물들의 씨를 천막 안에 넣고 연기를 쏘이는 것이다.

 

[식물의 사생활] 데이비드 애튼보로 /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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