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전쟁과 벌목작업
러일전쟁(1904~1905)은 열강들이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다투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단순한 무력 전쟁이 아니라 울창하던 원시림의 벌채권을 둘러싼 싸움이라 하여 세계사에 유래 없는 산림전쟁이라고 한다. 당시 우리 산림은 멀리 태평양 밖에 있는 미국도 이권을 얻으려 할 정도로 울창하였다. 이런 와중에 조정은 1896년에 러시아에게 벌채권을 허가하였다. 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일대의 양목권을 얻은 러시아인 블라디보스톡에 살았던 거상(巨商) 브리네르라는 사람이었는데 영화배우 율브리너의 할아버지라고 전해진다.
러시아가 벌채권을 갖게 된 것은 1896년이었으나 실제로 벌채를 시작한 것은 1903년 4월부터이다.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일본의 방해 때문이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울릉도는 섬의 이름만큼이나 아름드리 키 큰 나무들로 울창했다. 러시아는 울릉도에 군함을 파견하여 지형과 산림조사를 하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었고 벌채권을 받지 않았는데도 임목을 도적질하고 있었다. 일본공사를 불러서 항의 하였지만 오히려 일본인들은 아예 상주하면서 산림을 수탈하여 갔다. 이처럼 울릉도에서도 러·일 두 나라는 산림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한편, 두만강과 압록강 일대의 산림 벌채는 거의 러시아의 독점이었다. 벌채인부가 늘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육군 12,000명을 용암포에 주둔시키게 된다. 일본은 이것이 러시아가 극동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판단하고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한 계략을 수립하게 된다. 마침내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였으며, 2월 9일 새벽에 선전포고 없이 인천 앞바다에 있던 러시아 함대에 포격하여 러일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산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벌채권을 일본에게 이양하고 산림 수탈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일제 36년 동안 일본은 약 1000만 헥타르 이상의 산림을 작벌(斫伐)하여 4억 입방미터 이상의 산림을 수탈하여 갔다.
산사랑 2010년 11/12월호
김기원 /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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