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공진화 - 곤충 3
모든 곤충들이 꽃들의 설득이나 가르침을 착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곤충들은 도둑질을 한다. 유리지치는 꿀을 대롱 모양의 꽃 속 깊은 곳에 저장하고 있다. 일부 호박벌들은 2.5센티미터가 넘는 기다란 주둥이가 있어 유리지치의 꿀을 빨아먹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다른 꽃꿀을 주식으로 삼는 한 종류는 혀가 짧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 숨겨진 보물을 알게 된 이 종류의 벌은 유리지치의 꽃을 발견하면 밑둥 부근의 꽃잎에 앉아서 꽃잎을 물어뜯어 구멍을 낸 후 꿀을 훔쳐 먹는다.
육지에서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던 최초의 척추동물인 파충류는 최초의 곤충보다 한참 후에 나타났다. 초기 파충류 중 어느 정도가 식물의 꽃꿀을 먹이로 삼았는지를 알 수는 없으나 일부가 꽃꿀을 먹은 것만은 분명하다. 파충류는 오늘날에도 꽃꿀을 먹이로 하고 있다. 인간에 의해서 대륙의 포유동물이 전래된 뉴질랜드에서는 도마뱀류가 밤에 토착 아마의 꽃을 찾아간다. 도마뱀은 대롱 모양의 긴꽃잎들을 완력으로 벌리고 벌어진 꽃잎 틈으로 혀를 집어넣어 꿀을 빨아먹는다. 한 그루의 아마에 달린 여러 송이의 꽃에서 이런 방법으로 꿀을 먹는 동안 꽃가루가 턱과 입 주변에 묻기 마련이다. 어떤 지역에서는 새로 핀 아마의 꽃밭에서 5~6마리의 도마뱀들이 동시에 꽃꿀을 찾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 작은 도마뱀들이 하룻밤 동안 여러 곳의 아마꽃을 찾아 상당한 거리를 이동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꽃가루받이를 하고 있는 확실한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육식 포유동물이 뉴질랜드에 전래되기 이전에는 도마뱀이 풍부하게 살고 있었으나 오늘날은 개체수가 그리 많지 않아 아마를 포함한 다른 식물이 꽃가루받이를 도마뱀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파충류를 꽃가루받이로 이용했던 또 다른 식물은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극락조꽃은 야생에서 매우 적은 수의 씨앗만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이 꽃의 수분 매개자는 원래 새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꽃의 기괴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구조는 새가 꽃의 중심부에 있는 하늘색 수술에 앉으면 꽃밥이 터져서 새의 가슴에 꽃가루가 확실히 묻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다. 이 꽃의 꿀을 상습적으로 빨아먹는 새는 태양새이다. 그러나 이 새는 가슴에 꽃가루를 묻혀가면서 꿀을 빠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 꽃의 옆에 붙거나 수직으로 뻗어 있는 오렌지색 꽃이 달린 가지에 매달려서 꿀을 빨려고 몸을 기울인다. 따라서 꽃가루를 건드리지 않는다. 이 새는 꽃밥이 터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다. 새들이 꽃가루를 피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극락조꽃은 수분이 많고 점성이 강해서 새의 깃털을 심하게 더럽힐 수가 있다. 더구나 태양새는 몸을 깨끗이 유지하는데 유난히 관심이 많다.
반면에 날지 못하는 동물이 꿀을 찾기 위해서 꽃 위를 기어다니면서 꽃잎을 짓누를 때 꽃가루가 터져서 동물의 몸에 묻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극락조꽃은 도마뱀들을 끌어들이도록 진화한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민첩하게 꿀을 빨아먹는 태양새가 등장하였고 따라서 오늘날 극락조꽃이 자연적으로 수분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식물의 사생활] 데이비드 애튼보로 /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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