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의 공진화 - 곤충 2
일부식물들은 매개자의 선택에 그리 까다롭지 않아서 여러 가지 다양한 곤충들이 꽃가루를 가져가는 것을 허용한다. 전호와 안젤리카의 넓은 흰색 꽃에는 온갖 종류의 나비와 파리, 딱정벌레들이 찾아와 꽃가루를 가져간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꽃잎이 넓게 벌어지는 꽃이 피는 양귀비나 아네모네, 미나리아재비 등도 마찬가지로 곤충들을 차별하지 않고 관대하게 꽃가루를 제공한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식물에 자기 꽃가루를 배달시키는 것은 낭비이다. 따라서 아프리카 용담과 목수벌처럼 많은 식물들은 자기 꽃가루를 같은 종의 식물 개체에만 전달하도록 주선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 식물들은 오직 한 가지 곤충만이 도달할 수 있도록 꽃꿀을 보관하는 꽃을 발달시킴으로써 그와 같은 목적을 달성했다. 한 종류의 꽃으로부터 풍부한 꿀을 독점적으로 공급받은 곤충은 그 꽃에서 계속 꿀을 딸 수 있는 동안은 다른 꽃을 찾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갈수록 교묘하게 전문화된 협력관계가 발전된 결과 상호의존도가 너무 높아져서 어느 한쪽이 사라질 경우 다른 한쪽도 굶주리거나 꽃가루받이를 못하게 된다.
대롱모양의 통꽃잎 뒤에 며느리발톱처럼 두 개의 돌기가 특징인 남아프리카의 쌍거雙距 여우장갑은 돌기의 안쪽에서 나오는 기름을 보수로 준다. 이 식물과 밀접한 상호의존 관계를 발전시킨 몇 종의 벌들은 혼자 사는 종인데 이들은 기름을 걷기에 편리하도록 앞발의 끝을 솔처럼 변화시켰다. 쌍거여우장갑은 돌기의 길이가 다른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돌기의 길이에 알맞은 앞발을 가진 벌의 가짓수도 같다.
식물의 구조와 수분 매개자 사이의 이와 같은 조화 가운데서 가장 극단적이고도 유명한 예는 마다카스카르의 난초와 나방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이 난초의 학명은 앙그레큠 세스퀴페달인데 두 번째 단어의 뜻은 “1피트 반”이다. 이는 꽃잎 뒤에 달린 돌기 모양 꿀주머니의 길이를 나타낸 것이다. 실제로 꿀주머니가 그처럼 긴 꽃은 대단히 희귀하며 일부는 길이가 거의 1피트 반에 가깝다. 이렇게 긴 꿀주머니의 먹이를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주둥이가 긴 곤충은 딱 한 가지인데 바로 박각시나방이다. 이 나방은 이 식물의 유일한 수분 매개자이다.
난초류는 어느 식물보다도 정교한 꽃가루받이를 한다. 실제로 일부 난초 종류는 다른 식물들이 비교적 단순한 방법으로 성취하는 수분을 이루기 위해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방법을 쓰고 있다. 그런 난초류는 수분 매개자들이 지나가는 길에 장애물을 만들어 오히려 고생을 시키는 것이다.
물통난초는 중앙아메리카의 삼림지대에 사는 거대한 나무들의 최상층부 가지 위에 붙어서 자란다. 이 난초의 꽃은 노란색인데 일부는 오렌지색 또는 갈색 반점들이 박혀 있는 경우도 있다. 아래로 늘어진 하나의 줄기에 대략 5~6송이의 꽃이 핀다. 꽃의 앞부분은 두 개의 작은 날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날개들이 길잡이 구실을 한다. 이 날개 뒤에 식물이름이 비롯된 작은 물통이 매달려 있다. 꽃이 피면 줄기에 달린 두 개의 작은 분비선이 이 물통을 앞쪽의 날개들과 연결시킨다. 이 분비선에서 나오는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져 물통을 채우는데 깊이가 6밀리미터 정도이다.
이때 꽃에서는 강렬한 향기가 퍼진다. 20가지가 넘는 물통난초들은 종류마다 독특한 향기를 낸다. 사람은 향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으나 숲에 사는 무지개빛 작은 벌들은 분명히 구분한다. 난초의 종류에 따라 끌어들이는 벌의 종류도 다르다.
난초의 향기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로지 수벌들뿐이다. 이 향기가 수벌들을 대단히 자극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꽃이 피면 꽃송이 주변에 서너 마리의 벌들이 흥분하여 윙윙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얼마 안 가서 그중 한 마리가 물통의 옆부분이나 가장자리에 내려앉아서, 물통과 꽃의 앞부분을 연결시켜주는 짧은 줄기의 밑둥에서부터 물통의 가장자리로 솟아 있는 둥근 부엽(浮葉)으로 이동한다. 벌은 이 부엽의 표면에서 기름기가 도는 액체를 긁어모아 뒷다리에 붙은 주머니에 담는다. 이것은 먹이가 아니라 수펄이 정교한 구애의식을 벌일 때 암컷을 끌어들이는 데 사용하는 향유이다. 벌의 종류에 따라 향기의 종류가 달라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충분한 기름을 모은 벌은 날아오르려고 한다. 그러나 꽃송이 자체와 주변에는 여러 마리의 흥분한 벌들이 혼잡하게 날아다니고 둥근 부엽의 표면은 미끄러워서 조만간에 벌 한 마리가 발이 미끄러져 물통 속에 고인 액체 속에 빠진다. 물통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물통의 앞벽 속에 위로 뚫린 통로가 그것이다. 물통 벽에 있는 출구 바로 아래에는 작은 돌출부가 만들어져 있다 사방이 미끄러운 물통의 벽에서 유일하게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이 돌출부를 오래지 않아 벌이 발견하게 된다. 벌은 이것을 발판으로 삼아 위로 기어올라가서 통로에 들어간다. 통로는 매우 비좁지만 벌은 가까스로 밀고 올라간다.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를 빠져나가 자유를 얻기 직전에 벌의 등이 터널의 맨꼭대기에 튀어나온 돌출부를 긁게 된다. 이 돌출부는 난초의 뭉쳐진 꽃가루덩이이다. 벌이 계속 앞으로 비집고 나가면 터널 천정에 붙어 있던 꽃가루덩이가 결국 떨어져 나와 벌의 등에 작은 배낭처럼 단단히 붙게 된다. 벌이 이렇게 난초꽃에 머무는 시간은 10분 정도이다.
한편 다른 벌들은 아직도 부엽 위에서 기름을 모으고 있다. 그중에는 다른 꽃에서 벌써 물통에 빠지는 곤경을 치러 꽃가루덩이를 등에 붙인 벌도 있다. 이런 벌이 이 꽃의 물통에 빠질 경우 난초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그것이 터널을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동안 터널 천정에 있는 갈고리가 벌의 등에 붙은 다른 난초의 꽃가루덩이를 깨끗이 떼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벌들이 이처럼 수고를 해준 덕분에 난초는 꽃가루받이에 성공한 것이다.
[식물의 사생활] 데이비드 애튼보로 /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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