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 섬 문명의 붕괴와 숲
지구상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건설했던 이스터 섬 사회가 숲의 파괴로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예는 문명 발달과 숲의 관계를 보다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 120㎢의 면적을 가진 이 섬은 남아메리카 서부해안에서 3,700km 떨어져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섬과는 2,000km나 떨어져 있어서 지구상에서 사람이 사는 곳 가운데 가장 외진 장소다. 이 섬에는 5세기 경에 폴리네시아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다(Master, 1994).
이 섬의 토양 내 퇴적된 꽃가루를 분석해 본 결과에 의하면 사람이 살기 훨씬 이전인 3만 년 전에 이스터 섬은 숲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다른 농업 문명 발상지와 마찬가지로 이 섬에 정착한 주민들은 경작지를 확장하기 위해서 숲을 파괴하였고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기 위해서 나무를 베었다. 인구가 많지 않고 숲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었던 정착 초기에는 떵이 기름지고 해산물은 풍부하여 생활은 풍요로웠다. 그래서 인구는 1만 5,000명으로 늘어났고, 문명은 다른 여타의 문명권에 비해서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었다. 풍요로운 생활에 따라 발달된 제례 활동은 씨족간의 정교한 의식과 기념비 제작을 경쟁적으로 부추겼고, 그에 따라 숲을 위시한 자원의 낭비는 엄청났다. 높이 약 10m와 무게 85톤에 달하는 6백기의 석상 '모아이'의 제작이 그 단적인 예다. 씨족간의 조각상 세우기 경쟁이 벌어짐에 따라 수백 기의 석상이 제작되었고, 제작된 석상을 옮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통나무 받침이 필요했기에 많지 않던 숲마저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한 번 파괴된 숲은 다시 복구되지 않았다. 꽃가루 분석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최초로 정착한 수백 년 후부터 본격적인 숲 파괴가 시작되어 약 800년 전에는 이 섬에 있던 숲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계속된 숲 파괴는 토양 유실을 촉진시켰고, 그 결과 작물 생산은 점차 감소되었다. 농업 생산성의 감소는 기아와 사회적 불안으로 이어졌으며 씨족 간의 전쟁으로 귀착되었고, 종국에는 상대편의 포로를 잡아먹는 식인 풍습까지 생겨났다. 이와 같은 현상은 1722년 네덜란드인 선장 로헤번 제독이 이 섬을 처음 방문했을 때 목격되었다. 그는 누추한 갈대 오두막이나 동굴에 살면서 전쟁을 벌이고, 부족한 식량 때문에 식인 풍습을 가진 약 4,000명 가량의 원시부족을 목격하였다(Ponting, 1991).
한때 씨족 중심으로 정교한 의식과 기념비 제작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건설했던 이스터 섬 사회가 원시사회로 퇴보한 배경에는 지상에서 유일하게 재생가능한 자원인 숲의 중요성을 옳게 인식하지 못하고 함부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무분별한 숲 벌채는 환경파괴를 가져왔고, 종국에는 문명 자체를 지탱시킬 수 없는 불모지 같은 환경 조건으로 이스터 섬을 변모시키고 만 셈이다.
결과 오늘날 이스터 섬에는 소수의 원주민들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숲과 문화] 전영우 / 북스힐
로그인하시면 댓글 작성 가능합니다. 로그인
Guest (행간격 조절: Enter, Shift + 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