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하문명과 숲
중국의 경우, 문명의 시원지는 황하 유역이었다. 중국의 북부지역에서 시작된 귀리의 재배로 황하 문명은 시작되었다. 황하 지역은 원래 숲 자체가 울창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처럼 숲이 송두리 채 없었던 지역은 아니었고 오히려 소개된 상태의 숲이 있었다. 지금부터 200여 년 전에 이미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원생림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졌다(Richardson, 1990). 그 이후 지속적으로 계속된 북서 고원지대의 숲 벌채와 경작지 확대는 황하의 범람을 매년 초래시켰다. 황하라는 이름이 붙게 된 연유도 숲 벌채에서 시작되었다.
중국도 다른 초기 문화권과 유사하게 농업 혁명이 정착되면서 인구 증가가 수반되었고, 인구 증가에 따라서 다른 문명 발상지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경작면적을 확장시켜야만 했다. 경작 면적의 확장이 필요함에 따라 다른 지역의 울창한 숲도 점차적으로 경작지로 변했다. 즉 황하 유역과는 달리, 중국의 중앙부나 남부 지역은 울창한 숲 지역이었지만 경작지로 변하고 말았다.
한편 고비 사막은 옛날에는 푸른 초지와 울창한 숲 지역이었다. 전한(前漢) 이후에 이 지역을 근거지로 침략을 계속한 흉노족을 몰아내기 위해서 한나라 이후 200년간 이 지역의 숲을 지속적으로 불태웠기 때문에 사막으로 변하고 말았다(Westoby, 1989).
황하 유역에서 시작된 중국 문명의 발달에 따라서 숲이 울창한 이들 지역은 점차 농경지로 변하게 되었다. 한나라(기원년경)의 기록에는 양자강 유역은 농업이 여전히 후진적인 상태로 서술되어 있으며, 당나라(615~906년) 시대에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여전히 북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양자강 유역에는 그 당시 오직 이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개국(1636) 했을 때는 약 1억명의 인구로 불어났다. 그 이후 200여년 사이에 약 4억 5천명의 인구로 늘어났으며,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13억의 인구로 늘어나게 되었다(Ponting, 1991). 이와 같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른 경작지의 확대와 연료 소비의 증대는 숲을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20세기 초에는 겨우 대륙의 5% 미만의 숲 밖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즉 오늘날 거대한 13억 인구의 부양 이면에는 중국 대륙을 뒤덮고 있던 숲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숲과 문화] 전영우 / 북스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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