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천왕봉 성모상과 마고전설
지리산 기운을 관할하고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염원하는 성모(聖母, 천왕할머니, 마야부인, 마고부인이라고도 불림) 석상이 현재 지리산 국립공원 중산리매표소 부근의 천왕사에 있다.
성모상이 언제부터 지리산에 모셔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고 하고,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고려태조 왕건이 도선선사로 하여금 그의 어머니 위숙황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봉안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일부 스님들은 성모석상이 석가모니의 생모인 마야부인이라 하며, 한편에서는 천신의 딸 마고(麻姑)가 지리산에 하강하여 여덟 명의 딸을 낳아 무당으로 길러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무조설(巫祖說)로 성모상을 조명하기도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건국신화에 불교신앙과 민속신앙이 뒤엉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게 된 성모상이지만, 그것이 지리산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성역화된 공간인가 하는 점을 잘 보여 준다.
성모상은 해방 후 한때 행방불명이 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성모상을 그 누구도 개인적으로 모실 수는 없다. 천년 동안 모셨던 천왕봉 아래 자리로 옮겨 모셔야 한다”는 주장과 ‘해꼬지’가 뻔한 자리에 모실수는 없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지리산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돌베개-
손바닥만한 논밭에 주먹만한 바위덩어리가 들어앉아 있던 볼품없는 전답들이 하루아침에 금싸라기 땅으로 변하고 외지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밀어닥쳐 마구 뿌려대는 돈들은 여지없이 사람들을 혼돈의 늪으로 몰아넣은지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중산리 사람들은 이제 예전의 산촌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아직도, 아니 영원히 지리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불변하다. 이들은 중산리 사람이기 보다는 지리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의 지리산(천왕봉) 사람은 5-6년전에 있었던 천왕사 성모석상 소유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산마을 뒤편에 위치한 천왕사 혜범스님이 현몽했다고 자처하며 찾아낸 천왕 성모석상을 천왕사에 안치한 사실을 두고 이곳 중산리 사람들은 “안된다”며 성모석상을ㄹ 천왕봉으로 다시 모셔야 한다는 논리로 법정공방을 벌인 것이다. 물론 소송에서는 천왕사의 기득권이 인정돼 중산리 사람들이 졌으나 이들이 지리산, 특히 촌왕봉을 신성시 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경상대학교 인터넷 관광안내 “지리산”- 중 ‘중산리편’ 일부
산청에는 원삼국시대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는 지리산은 산신신앙의 대상으로 부각이 된다. 신라 때에는 삼산오악신(三山五嶽神)을 제사하였다. 삼산은 봉래.방장.영주로 이 중 방장이 지리산에 비견된다. 오악은 동은 토함산, 남은 지리산, 서는 계룡산, 북은 태백산, 중은 부악(父嶽)으로, 나라에서 제사하며 국가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고려시대에도 계속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고 하는데 이때 많은 사찰과 산신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리산은 삼각산(三角山). 송악산(松嶽山). 비백산(鼻白山)과 함께 사악신(四嶽神)으로 정하여져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유두류록 遊頭流錄>에는 대표적인 산신신앙의 예가 수록되어 있다. 그가 마흔살 되던 해 가을 종도(宗道)와 선공(鮮空)이라는 두 승려의 안내를 받아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에 올라 제일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가 당시 목격한 이 성모묘의 모습은 당집의 너비가 3칸이고 양쪽 벽에 중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으며, 성모상은 석상(石像)으로 분대(粉黛)로 얼굴과 머리, 눈, 눈썹이 칠하여져 있었다. 머리 부분에 칼로 벤듯한 금이 가 있어 그 연고를 물으니 태조가 등극 전에 이 근처 인월(引月)에서 왜구를 칠 때 크게 패한 왜병이 이 성모의 신조(神助)로 태조가 승첩을 거두었다 하여 보복의 뜻으로 두쪽을 내었던 것을 뒤에 모아 맞춘 것이라 하였다. 성모묘의 동쪽, 바위가 오목하게 꺼진 부분에 돌을 쌓고 그것에 조그만 불상을 하나 세워놓았는데 국사(國師)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 성산(聖山)으로서의 지리산의 위치는 연면히 이어져 내려 오늘날까지도 변함이 없다.
지리천왕(智異天王)과 여신(女神)숭배의 설화들이 있는데,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보면 그는 천왕봉에 발을 딛고 맨 먼저 그 천왕봉에 있는 성모묘에 제를 올리는데, 당집에 들어가 주과(酒果)를 차려놓고 성모상 앞에서 비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 성모상의 기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로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는 설이 그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교에서 마야부인상을 숭배하는 전통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 설은 후세의 윤색이 아닌가 싶다. 둘째로 고려왕계를 성스러운 혈통으로 인식시키기 위하여 고려왕실에서 도선선사(道詵禪師)로 하여금 이 성모상을 만들게 하였다는 설이다.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帝王韻紀》에 성모에 대하여, 지금 지리천왕은 곧 고려 태조의 비 위숙왕후(威肅王后)라 하고 고려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의 이야기 (三國遺事 感通 第七, ‘仙桃聖母隨喜佛事’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음.)를 듣고 이를 그들 임금의 핏줄로 삼고자 이를 만들어 받든다고 하였다. 셋째로 도선이 지리산에 선암(仙巖).운암(雲巖) 등 삼암사(三巖寺)를 세우면서 이 절을 세우면 삼한을 통일할 수 있다는 성모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뒤 고려를 세워 후삼국을 통일한 후 계시를 내린 성모상을 세워 받들었다는 설이다. 넷째로 중국의 여신인 마고(麻姑)가 동쪽으로 와 정착한 것으로 믿고, 그 여신 숭배가 이 성모상을 있게 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에 지리산의 산정에 사는 여신의 이름이 마고 또는 마야고(麻耶姑)로 불린다는 점에서 일리가 있다. 그래서 마고성모라는 복합어를 쓰기도 한다.
<마고전설>은 지리산의 능선을 형상화하고 있는 면도 있다. 마고는 반야(般若)를 사랑하였다. 어느날 반야는 돌아오겠다고 기약하고 떠났으나 오지를 않는다. 마고는 기다림의 초조로 나무를 할퀸다. 이것이 지리산 주능선 부근의 고사목(枯死木)이다. 그 올로 베를 짜던 자리가 세석평전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천왕봉의 돌무덤 위에 앉아서 서쪽 하늘을 보면 낭군봉인 반야봉이 마치 달려올듯한 산세로 눈에 담긴다.
2004-08-20 오후 9: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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