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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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문화권의 역사지리적 성격
지리산 문화권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지리산(智異山)은 두류산(頭流山) 또는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린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롭게 된다고 해서 지리산이라 하였으며, 백두대간의 주맥이 한반도를 타고 이곳까지 이어졌다고 하여 두류산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도교의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인 방장산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지리산은 험준한 산세를 이루는 가운데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에 걸쳐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산의 서쪽에는 섬진강과 보성강이 휘돌아 남원에서 남해로 나가고, 동쪽으로는 남강과 경호강이 휘어져 함양에서 진주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지리산을 둘러싼 이들 강은 동서 교통 및 문화교류의 활로가 되었다. 우리가 지리산을 이야기할 때 섬진강과 남강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 강이 사람과 물산의 통로였다면, 지리산의 웅혼한 품은 사상과 기맥을 키워간 터전이다. 지리산은 고유신앙인 성모신앙과 산신신앙을 잉태한 산이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의 산이었으며, 고유의 신선사상을 낳은 산이었다. 고대 불교가 수용되면서 이들 고유신앙과 융화하며 지리산은 불교사상을 꽃피워 나갔다. 8세기 경 화엄도량인 화엄사가 자리잡은 뒤에 9세기에는 교종불교의 바탕 위에서 선종불교의 실상산문과 동리산문이 일어났으며, 12세기 전후에는 고려 불교의 정수인 천태종과 조계종이 모두 지리산에서 생겨났다. 지리산은 교종불교와 선종불교가 융합한 산실이었으며, 고려시대 불교사상이 혁신하는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고유신앙과 불교사상을 포용해 간 지리산은 16세기 유학자 남명 조식에 이르러 사상의 폭을 더욱 넓혀 나갔다. 남명은 지리산에 면면히 전승되어 온 불교사상까지 아우르면서 ‘경의(敬義)’를 강조하는 실천적 유학사상을 성립하였다. 지리산을 누구보다 경외했던 남명은 그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완성시켜 갔던 것이다. 남명이 강조한 실천성은 그의 문인들에 의해 계승되면서 남명학파의 사상적 특징으로 발전해 갔다. 지리산 동부지역의 덕산과 진주 둥지에 기반을 둔 남명학파는 섬진강을 따라 호남의 순천, 남원까지 진출하였으니, 이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문화환경의 동질성을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은 외침과 변혁의 시기를 맞이해서는 민족수호의 버팀목이 되었다. 고려 말 왜구가 침입했을 때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지리산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인 지리산에서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관군은 진주대첩을 일구어냈다. 그런가 하면 근대 변혁기에 지리산은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면서 변혁의 근거지로 부상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호남은 지리산을 공유하면서 운명공동체로 발전해 갔다.
전통사회에서 문화권이라 하면, 대체로 생활권, 학맥, 법맥, 통혼권 등으로 형성된 지역적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문화권은 지리적 조건과 함께 역사의 흐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리산 자락을 바탕으로 종교와 사상이 발전해 갔던 점이나, 오침과 변혁의 시기에 영호남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굳게 연대했던 점을 감안할 때, 지리산을 둘러싼 영호남의 주변 지역은 지리산의 구심력에 의해 동질의 문화권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문화권은 자연지리적 조건과도 밀접한 관계를 이룬다. 한반도의 지형으로 볼 때, 하천이 발달한 서부는 한강, 금강, 영산강 등 강을 중심으로 문화권을 이루었으며, 산지와 분지가 발달한 동부는 안동, 경주 등 분지를 중심으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한 지리산문화권은 지리산과 이를 감싸고 있는 섬진강, 남강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지리산문화권은 지역적으로 크게 서쪽의 섬진강, 남원문화권, 동쪽의 남강, 진주문화권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서쪽의 섬진강, 남원문화권은 남원, 곡성, 구례, 광양, 순천 등지를, 동쪽의 남강, 진주문화권은 진주, 하동, 산청, 함양 등지를 아우른다. 다만 시대 변천에 따라 문화권의 지역 범위도 유동적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동쪽에 거창과 서천, 남해, 서쪽에 장수, 여수 등을 포괄하기도 한다.
두 문화권은 지리산문화권 내 각기 소문화권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소문화권은 동질성과 차별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들 지역은 지리산이 구심력에 의해 문화적 동질성을 짙게 지니고 있으나, 지리산 문화권의 권역이 광대한 만큼 지역에 따른 향토색의 차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사회경제적 기반
지리산은 천왕봉을 중심으로 주능선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지며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능선 사이로는 피아골, 뱀사골,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연곡골, 대성골 등 수많은 계곡이 자리하면서 지리산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또한 지리산에서 발원한 수많은 작은 하천들은 남강이나 섬진강을 이루어 낙동강과 남해로 흘러들어간다.
지리산은 험준한 산령으로 이루어졌지만, 주변에는 일찍부터 동서의 영호남을 연결하는 통로가 발달하였다. 지리산의 북쪽과 남쪽에는 영호남을 연결하는 관문과 장시가 발달했으며, 준령 사이에 나 있는 벽소령, 쑥밭재, 걸등지 등의 산길을 통해서도 사람과 사상이 교류하였다.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량치, 구례의 석주관 등은 영호남을 잇는 4대 관문이었다. 이들 관문은 동서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남쪽의 석주관과 북쪽의 팔량치는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황석산성은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후 백제와 맞서면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팔량치 넘어 남원의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고려말 왜구가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침공할 때에도 운봉을 넘으려다가, 황산에서 이성계에 크게 패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군이 호남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 지역을 넘어야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가 진주대첩과 남원성 전투, 구례 석주관전투이다. 한말에도 영남으로 진격하려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북쪽에서는 운봉을 사이에 두고 민보군과 치열한 전투를 별였고, 남쪽에서는 광양, 순천의 농민군이 하동과 진주로 나아가 영호남연합농민군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지리산에는 주변의 관문뿐 아니라 계곡과 준령 사이로도 산길이 열려 있었다. 고유신앙과 불교사상이 융합하고, 교종불교와 선종불교가 공존하면서 불교사상이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산길을 통한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말 의병이 지리산을 무대로 남원과 함양, 광양과 하동을 넘나들었던 것도 그 길을 따라서였다. 현대사에서 빨치산들도 역시 그 길을 누볐다. 영남과 호남은 그렇게 지리산의 산길을 통해서도 연결되고 있었다.
지리산문화권 내의 각 지역은 육로뿐 아니라 물길을 통해서도 교류하였다. 섬진강과 남강의 수운은 지리산 주변의 사람과 물산의 교류와 유통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진안의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남원의 요천, 곡성의 보성강, 하동의 악양천 등을 아우르면서 광양만으로 흘러가고, 연안 곳곳에 나루가 발달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남강의 함양의 임천강, 산청의 경호강, 단성의 덕천강 등과 진주부근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이 수운은 지리산 동부지역의 교통과 물산교류를 담당하는 젓줄이었다.
때문에 이들 지역에는 일찍부터 장시가 발달하였다. 주로 섬진강, 남강 유역의 포구를 중심으로 장시가 열리며 사회경제적으로 교류가 활발하였다. 실학자 서유구가 19세기에 지은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지리산문화권 일대에서 성행한 장시만도 50여 개에 달했다.
섬진강 일대에는 운봉의 읍내성장, 읍내하장, 인월상장, 인월하장, 남원의 부내장, 번암장, 우수장, 황탄장, 아산장, 동화장, 산동장, 곡성의 읍내장, 석곡장, 삼기장, 구례의 성내장, 연곡장, 하동의 하두치장, 탑원장(화개장), 개치장, 주교장, 진교장, 횡포장, 광양의 읍내장, 옥곡장, 섬거장, 월포장 등 수많은 장시가 성행하였다.
남강 일대에는 함양의 읍내장, 사근장, 마천장, 옥녀장, 개평장, 산청의 읍내장, 생림장, 어외장, 단성의 적성장, 단계장, 진주의 주내장, 반성장, 암정장, 말문장, 마동장, 대야장, 문암장, 북창장 등의 장시가 성행하였다.
이 가운데 지리산 북부의 인월장과 남부의 하동장은 영호남 교류의 중심지였다. 팔량치 아래의 인월장은 산간 벽지에 위치하지만, 한때 삼천포와 여수 앞바다에서 잡힌 어물들이 남강과 섬진강을 통해 함양, 남원을 거쳐 유통될만큼 상권이 발달하였다. 인월장을 중심으로 한 상권은 남원의 운봉과 함양의 마천 등지에 걸쳐 폭넓게 형성되면서 지리산 북부지역 물산교류의 핵심이 되었다.
지리산 남부의 하동장은 섬진강과 광양만을 통하여 광양의 섬거, 옥곡, 그리고 사천, 남해 등지와 연결되는 폭넓은 상권을 형성하였다. 근래 각광받는 화개장은 하동상권에 포함되었다. 지리산 길목에 위치한 화개장은 벽소령을 따라 인월장과도 연결되었으며, 영호남의 물산이 집중하면서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때문에 이곳은 일제의 침탈이 심했으며, 그로 인하여 동학농민군과 의병의 주요 공격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지리산은 높고 험하지만 화전민도 천석(千石)을 한다고 할 정도로 그 골이 넓고 깊었다. 때문에 지리산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그 골이 넓고 깊었다. 때문에 지리산 사람들의 살림살이는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풍족하였다. 19세기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중이나 세속 사람들이 대를 꺽고 감과 밤을 주워서, 수고하지 않아도 생계 꾸리기가 족하며, 농부와 장인들이 또한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충족하다. 그래서 이 산에 사는 백성은 풍년, 흉년을 모르므로 부유한 산이라 부른다.”고 하듯이, 지리산의 물산은 넉넉하였다. 택리지에는 또한 “경상좌도는 땅이 모두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지만 우도는 기름지다. 전라좌도의 지리산 곁은 모두 기름지다.”라고 기록하듯이, 지리산 주변의 토지는 동똑의 영남지역이나 서쪽의 호남지역이나 모두 비옥하다.
이렇듯 지리산문화권 내 지역은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물산이 비교적 풍부한 편이었다. 그리고 남북의 관문과 산길을 비롯하여 섬진강, 남강 등을 따라 발달한 수운과 장시 등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한 이들 관문과 산길, 수운 등은 영호남 교류의 통로로 작용하면서 문화권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고유신앙과 불교사상을 융합한 한국사상의 산실
2~3세기 경 지리산 일대는 마한세[력의 지배권에 있었다. 그러다가 고대국가가 완성되는 4~5세기 경 섬진강, 남원 일대는 백제의 세력이, 남강, 진주 일대는 가야세력이 진출하였다. 6세기 초 신라가 가야를 병합한 후 지리산은 신라와 백제가 쟁패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통일신라 때 남원에는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 진주에는 9주의 하나인 강주가 설치되어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발달하였다.
지리산은 고유신앙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숭배된 성산(聖山)이었다. 지리산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성ㅁ의 산이었다. 지리산의 송모는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즉 지리산은 신라와 고려의 시조를 낳은 ‘어머니의 산’으로 숭배되었다. 지리산의 성모는 땅을 상징하는 지모신(地母神)이었다. ‘어머니의 산’은 농경문화가 본격화되면서 만들어진 신앙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땅은 하늘과 더불어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지리산에는 고유신앙인 성모신앙(聖母信仰)이 크게 융성하였다.
불교 전래 이후 고유신앙은 크게 변절되었다. 성모와 산신신앙이 크게 약화되는 가운데 부처나 보살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성모신앙으로 상징되는 지리산의 고유신앙 역시 불교 전래와 함께 불교사상에 융합되어 갔다. 지리산의 불교 승려인 법우(法雨)화상이 ‘무당의 시조’로 이야기되는 설화는 지리산 교유신앙이 불교에 융합되어간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토착적 고유신앙을 상징하는 석장승이 지리산 사찰의 입구에 유독 많이 서있는 것 또한 그같은 사실을 대변하고 있다.
고유신앙을 품에 안은 지리산 불교문화는 이후 교종과 선종이 교류하는 바탕을 이루었다. 또한 그러한 기반 위에서 선종불교의 북종선과 남종선 계통의 사상이 함께 수용될 수 있었다.
구례의 화엄사는 부석사,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의 화엄을 대표하는 화엄도량이다. 8세기경 화엄사는 그 영향력이 멀리 남원과 고부, 경주 등지까지 미쳤다.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익힌 신행은 교종사찰인 산청의 단속사를 선종사찰로 전환시켜 갔으며, 단속사는 교종불교를 지지한 신라 왕실과도 밀접한 관계를 이루어 나갔다.
9세기에 들어와서 남종선 계통의 사찰인 남원의 실상사, 곡성의 태안사, 하동의 쌍계사, 광양의 옥룡사 등이 세워졌다. 신라 말 선종의 9산문 가운데 홍척선사가 세운 실상산문(실상사)과 혜철선사가 세운 동리산문(태안사), 또 다른 선종산문으로서 혜소선사가 세운 쌍계사 등이 지리산에서 개창된 것이다. 이같은 선종의 수용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존의 교종과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교종의 사상과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선종불교가 성장해 간 점이다.
9세기 말 유학자 최치원에 이르러, 지리산은 불교와 유교가 융합하는 전기를 맞이하였다. 쌍계사에 머물던 최치원은 교종과 선종을 아우른 불교사상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화엄종 승려인 의상과 법장의 전기를 쓰고, 쌍계사를 창건한 선종 승려 혜소의 비문을 지었던 것은 그와같은 사상적 융합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고유신앙과 불교, 그리고 유교까지 아우른 지리산의 사상적 기반은 신라 말 풍수지리사상을 낳기에 이르렀다. 풍수지리사상은 도선이 곡성의 태안사와 광양의 옥룡사에 머물 때 만들어졌다. 태안사와 옥룡사는 동리산문의 선종사찰이었다. 때문에 풍수지리사상은 선종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멀리는 고유신앙과 유식불교까지도 아우르고 있었다. 도선의 풍수지리사상은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성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풍수지리사상에서 볼 대 지리산이 명당이었음은 물론이고, 이를 배경으로 지리산 일대의 강주(진주)와 승주(순천)에는 호족세력이 등장하였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성장한 호족세력
후삼국시기 지리산 일대는 후백제와 태봉,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장이 되었다. 견훤과 궁예, 왕건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 지역의 호족세력과 결합하였다. 지리산 일대의 대표적 호족은 섬진강 유역의 승주호족 박영규와 남강 유역의 강주호족 왕봉규였다.
당시 승주는 곡성, 구례, 순천, 여수, 광양, 보성, 고흥 등 지리산 서쪽지역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의 실력자 박영규는 후백제가 건국되자 견훤과 결합하여 최측근으로 활약하였다. 박영규는 견훤의 사위가 되었다. 승주는 순천만을 통한 바닷길이 열려 남해안과 서해안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왕건이 나주지역을 점령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자, 승주지역의 서남해안 견훤세력이 해상권을 회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전략적 요충으로 부상하였다. 섬진강을 지배하던 박영규는 곡성, 화순 등지의 내륙지방과 해남, 고흥, 남해 등 남해안 일대의 교역을 담당하면서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끝까지 견훤을 곁에서 지키던 박영규는 933년 견훤이 왕건에 귀부할 때 함께 고려로 갔다.
강주는 남강을 통해 지리산 동북부와 연결되고, 황강을 통해 낙동강에 나갈 수 있으며, 육로로 하동을 거쳐 호남과 연결되는 교차로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백제와 신라는 일찍부터 강주를 놓고 영역다툼을 치열하게 벌였다. 강주지역의 실력자 왕봉규는 남강을 지배하면서 독자적으로 중국의 후당과 통교할 정도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왕봉규 이외에도 강주장군으로 불리던 윤웅도 활동하였는데, 이들 강주호족은 대체로 친고려적 성향을 띠었다. 왕건이 낙동강에 진출하여 내륙으로 북상할 무렵 이들 강주호족은 왕건과 교류를 통하였다.
이처럼 후삼국시기 승주와 강주는 지리산 일대 남해안 제해권과 관련하여 왕건과 견훤의 쟁패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승주의 박영규가 견훤과 함께 고려에 귀부하면서, 이 지역은 고려의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불교의 혁신과 팔만대장경, 불교문화의 보고
고려 불교계는 선종과 함께 화엄종, 법상종, 천태종 등 교종불교가 번성하였다. 대각국사 의천은 화엄종의 입장에서 고려 불교계를 통합하려고 했으며, 교종불교와 선종불교를 융합하기 위해 교선일치를 주장하면서 천태종을 세웠다. 순천의 선암사는 11세기 말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한 곳이다.
교종불교는 왕실의 외척이나 정치 주도세력인 문벌귀족의 뒷받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러나 1170년(의종 24) 정중부 등이 주도한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교종불교는 탄압을 받았다. 이로써 불교계의 중심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동하였으며, 선수행(禪修行)을 강조하는 거사불교가 대두하였다. 이 무렵 선종불교에서는 ‘깨끗한 부처의 나라로 가기를 염원하는’ 정토신앙이 대두하였으며, 이를 위한 신앙모임으로 결사(結社)가 크게 유행하였다. 지리산은 그러한 신앙결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앙결사의 성행과 함께 12세기 후반 불교계가 혁신적으로 변모하니,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융합하려는 조계종의 탄생이 그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은 신앙결사인 수선사를 중심으로 송광사에서 조계종을 개창하였다.
의천과 지눌이 불교혁신을 주도했던 지리산 일대는 몽골의 침입으로 국난을 당했을 때, 호국불교의 상징으로서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곳이기도 하다. 대몽항전을 전개하던 무인정권은 대장경의 판각을 통해 항전 의지를 높이고자 하였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최우는 대장경을 판각하기 위해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1237년(고종 24) 실제 업무를 담당할 분사(分司)로서 남해분사대장도감을 두었다. 최우는 또한 관할지역의 수령인 진주목사로 하여금 고려대장경 판각의 업무를 지원케 하였다. 대장경 판각에 이용할 목재는 섬진강과 남강을 통해 지리산 일대에서 조달하였다.
진주지역은 무신정권 최씨 집안의 오래된 식읍지였다. 최씨 무인정권은 지리산 일대의 사찰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최우의 큰아들 만종이 출가한 산청의 단속사를 비롯하여 승주의 송광사, 강진의 백련사 등이 대표적 사찰이다. 조계종이 지리산에서 성립될 수 있었던 것도 최씨 무인정권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실천을 강조한 남명학파의 본산
조선시대에 들어와 지리산문화권은 남명 조식이라는 큰 선비를 배출하면서 한국 유학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지리산문화권 일대는 남명에 앞서 함양의 정여창 이래 사림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 남명의 학문과 사상은 바로 그와 같은 역사적 기초 위에서 성숙할 수 있었다.
남명 조식의 사상과 삶은 실천을 강조한 ‘경의(敬義)’와 처사적 삶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말년에 지리산 자락의 덕산에 정착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남명의 문인들은 16세기 후반 진주를 중심으로 남명학파를 크게 일으켰다.
남명학맥은 지리산일대뿐 아니라 크게는 경상우도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호남의 순천, 남원 등지로 뻗어 나갔다.
실천을 강조한 남명학파 인사들은 임진왜란 때 ‘대의’를 좇아 의병의 자취를 뚜렷이 남겼다. 조식은 평소 무예와 병법, 국방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그는 일찍부터 일본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강조한 바 있었다. 때문에 남명의 문인은 어디에 있든지 결연히 창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 청도의 박경신 등은 그 대표적 의병장이었다. 이들의 의병활동은 스승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하여 실천한 것이었다.
남명 문인들은 자신의 기반이 되었던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봉기하였지만, 호남의 유림들과도 폭넓게 연대하면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러한 영호남의 연대는 사림들의 인적 교류를 바탕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순천의 의병장 박성무는 남명 조식의 문인일 뿐 아니라 호남의병장 김천일의 문하에도 출입한 인사였다.
남명의 문인인 최영경이 기축옥사로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때 남명의 문인들은 최영경의 신원운동을 일제히 전개하면서 남명학맥을 지켜 나갔다. 그런데 광해군 즉위 후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비판한 ‘회퇴변척(晦退辨斥)’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남명학맥의 인사들 중에는 퇴계학통으로 전향하는 등 많은 이탈자가 생겨났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처형당하면서 낙동강 서쪽인 강우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는 크게 위축되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년의 무신란은 위축된 남명학파를 더욱 쇠락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조 즉위 초 경종을 지지하며 남인과 일부 소론세력이 일으킨 무신란에는 안음의 정희량, 합천의 조성좌가 참여했으며, 이들은 정인홍의 문인인 정온과 조웅인의 후손들이었다. 이로 인해 남명학파의 본산인 강우지역은 반역향(反逆鄕)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중앙의 노론세력과 퇴계학맥의 문인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남명학맥의 문인들은 노론화되거나 퇴계학맥으로 연결되어 갔다.
그와 같은 배경에서 19세기 우후 강우지역은 다양한 학맥이 얽혀 있었다. 남인 계열로는 기호 남인의 영수인 허전, 영남 남인의 영수인 유치명과 그의 문인 이진상 등이 있었으며, 노론 계열로는 기정진 등의 학맥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진상의 학맥은 곽종석으로 이어지고, 다시 하겸진, 김창숙, 조긍섭, 김황 등으로 연결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 곽종석을 필두로 그의 문인 김창숙, 김황 등이 파리장서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던 것은 실천을 강조한 이 지역 유학의 특성을 계승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변혁과 개혁, 민족운동의 보루
외침과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여, 지리산은 저항과 혁신의 역사적 현장이 되었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전개된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의병전쟁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1861년 단성에서 봉기한 농민항쟁은 진주농민항쟁의 서막을 이루었다. 봉건사회 해체기의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진주농민항쟁은 19세기 초반 이래 전국 각처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던 소규모의 농민항쟁을 총결산하는 동시에 이를 전국 규모로 확대하는 신호탄이었다. 1869년 광양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이나, 1870년 덕산에서 이필제가 계획한 농민항쟁 역시 근대 변혁운동에서 주목되어야 할 사건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지리산 일대는 영호남이 연대한 농민군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남원지역에서는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영남으로 진격하기 위해 운봉전투를 치렀으며, 광양, 순천 등지에서는 김인배의 영호대도호소가 하동과 진주를 잇는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한말 의병전쟁의 과정에서 주목할 것은 지리산이 영호남의병의 장기 항전기지로 부상했던 점이다. 중부 이북지역의 의병들이 해외의 간도나 연해주로 망명해 갈 때, 이들은 지리산에 의지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해 갔다. 이들에게 지리산은 의병항쟁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것이다.
고광순 의병, 김동신 의병, 석상룡의 지리산 의병부대, 진주의 노응규 의병 등이 지리산의 산길을 따라 영호남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후예인 석상룡이 이끈 지리산 의병부대에는 함양과 남원의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지리산을 배경으로 장기적으로 결사항전 한 기록을 남겼다.
민중운동의 발상지인 진주에서 1923년 백정의 인권회복을 외치는 형평운동이 일어난 것도 민중성이 짙은 지리산문화권의 역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민족운동의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비롯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사람이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슬로건 아래 전개된 백정해방운동이 진주를 중심으로 일어난 자체가 혁신적인 것이었다.
해방 후 혼란의 정국에서 빨치산의 주요 무대가 되면서, 지리산은 또 한 번 격동을 겪어야 했다. 웅장한 자태에 심원한 계곡을 간직한 지리산의 산세는 외침과 저항의 시기에 천연 요새로서 역할하기에 넉넉한 곳이었다. 근대 변혁시기의 동학과 의병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사에서는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던 것이다.
영, 호남의 구심, 지리산 문화권의 특징
문화권이라 하면 그 지역의 역사문화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문화권의 범주는 행정구역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문화권은 대체로 강이나 분지, 산 등 자연조건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안동문화권과 경주문화권처럼 분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문화권의 경우 대체로 행정구역과 일치하고 있지만,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권은 행정구역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강문화권이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 등지에 폭넓게 걸쳐 있으며, 금강을 따라 형성된 금강문화권도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지역이 어우러지고 있음은 그 같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문화권은 지리산을 정점으로 섬진강과 남강을 품에 안으며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등지에 산과 강이 어우러진 문화권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지리산 문화권은 지리적으로 영호남을 아우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라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역사 흐름은 그와 같은 문화권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에 담겨진 역사는 그 폭이 넓고 다양하였다. 고유신앙에서 불교, 유교, 도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과 이념이 지리산의 품에서 배태되고 성장하였으며, 격변기에는 혁신적 사상이 발화하면서 지리산은 한국사상의 산실이자 보고로 자리매김하였다.
지리산은 단지 사상의 보고에 머물지 않았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 때나 조선 말기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전쟁, 그리고 민중적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형평운동 등이 일어날 대 지리산은 저항과 혁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실천성을 강조했던 남명의 사상이 의병으로 분출되었으며, 조선후기 봉건사회체제를 비판하며 성숙했던 서민문화의 전통은 근대 변혁기에 이르러 민중성이 짙은 민족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렇듯 사상과 학맥 그리고 저항과 혁신의 역사적 흐름에서 지리산문화권의 구성원들은 영호남이라는 지방 의식보다는 지리산을 구심으로 굳게 결합하였다. 역사문화적으로 볼 때 지리산은 영호남을 가르는 경계선이 아니었으며, 영호남의 사람과 사상이 화합하고 공존하는 역사의 광장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 출판사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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