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지리산의 이해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산청·함양·하동군에 걸쳐 있는 산.
지리산은 약 1억 3천 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자락을 8백 여리에 펼쳐 놓고 있으며, 그 자락마다 2천년 역사의 숨결과 자취를 간직하고 있다. 그 곳에는 아름다운 문화재가 곳곳에 널려 있으며 죽음과 생성의 역사, 지배와 저항의 역사, 생활공동체의 역사가 뒤섞여 살아 숨쉬고 있다.
지리산은 천왕봉을 중심으로 주능선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이어지며 웅장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능선 사이로는 피아골, 뱀사골,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연곡골, 대성골 등 수많은 계곡이 자리하면서 지리산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강이 사람과 물산의 통로였다면, 지리산의 웅혼한 품은 사상과 기맥을 키워간 터전이다.
지리산은 험준한 산령으로 이루어졌지만, 주변에는 일찍부터 동서의 영호남을 연결하는 통로가 발달하였다. 지리산의 북쪽과 남쪽에는 영호남을 연결하는 관문과 장시가 발달했으며, 준령 사이에 나 있는 벽소령, 쑥밭재, 걸등지 등의 산길을 통해서도 사람과 사상이 교류하였다.
산자락 명승지마다 터 잡은 하동의 쌍계사와 칠불사, 중산리의 법계사, 마천의 벽송사, 남원의 실상사, 유평리의 대원사 그리고 구례의 화엄사와 천은사 등 고찰은 지리산 자체가 하나의 대가람이 되게 했다.
지리산의 깊이는 애초부터 어머니의 품과 다름 없었다. 가야의 임금이 음악하는 명인(옥보고?)을 찾아 정치를 물으려 하자 그가 숨은 곳이 지리산이었으며, 신라 최치원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방랑한 곳도 지리산 기슭이었었다. 중국에서 선종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도 지리산은 그 본거지였으며, 동학을 일으킨 최제우가 경주에서 박해를 받자 남원의 지리산 자락으로 옮겨와 혁명 주체를 키웠다. 구한말 김일부와 강증산의 사상적 뿌리는 지리산에 깊이 박혀 있었다.
지리산은 우리 고유신앙인 성모신앙과 산신신앙을 잉태한 산이다. 지리산의 성모는 땅을 상징하는 지모신(地母神)이었다. ‘어머니의 산’은 농경문화가 본격화되면서 만들어진 신앙으로, 만물을 생성하는 땅은 하늘과 더불어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지리산에는 고유신앙인 성모신앙(聖母信仰)이 크게 융성하였다. 1천년 전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에는 성모사(聖母詞)라는 사당이 세워져 있었다.
불교 전래 이후 고유신앙은 크게 변절되었다. 성모와 산신신앙이 크게 약화되는 가운데 부처나 보살이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다. 고유신앙과 불교, 그리고 유교까지 아우른 지리산의 사상적 기반은 신라 말 풍수지리사상을 낳기에 이르렀다. 고대 불교가 수용되면서 고유신앙과 융화하며 지리산은 불교사상을 꽃피워 나갔다. 8세기 경 화엄도량인 화엄사가 자리잡은 뒤에 9세기에는 교종불교의 바탕 위에서 선종불교의 실상산문과 동리산문이 일어났으며, 12세기 전후에는 고려 불교의 정수인 천태종과 조계종이 모두 지리산에서 생겨났다. 지리산은 교종불교와 선종불교가 융합한 산실이었으며, 고려시대 불교사상이 혁신하는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지리산은 단지 사상의 보고에 머물지 않았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 때나 조선 말기 농민항쟁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전쟁, 그리고 민중적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형평운동 등이 일어날 때 지리산은 저항과 혁신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실천성을 강조했던 남명의 사상이 의병으로 분출되었으며, 조선후기 봉건사회체제를 비판하며 성숙했던 서민문화의 전통은 근대 변혁기에 이르러 민중성이 짙은 민족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고려와 조선시대 왜구가 침입했을 때, 지리산은 영남에서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었다. 고려 말 전략적 요충지인 지리산에서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관군은 진주대첩을 일구어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지리산 일대는 영호남이 연대한 농민군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한말 의병전쟁의 과정에서는 영·호남의병의 장기 항전기지가 되었다. 중부 이북지역의 의병들이 해외의 간도나 연해주로 망명해 갈 때, 이들은 지리산에 의지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해 갔다. 이들에게 지리산은 의병항쟁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것이다.
고광순 의병, 김동신 의병, 석상룡의 지리산 의병부대, 노응규 의병 등이 지리산의 산길을 따라 영·호남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의 후예인 석상룡이 이끈 지리산 의병부대는 함양과 남원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결사항전 한 기록을 남겼다.
해방 전후 혼란의 정국에서 빨치산의 주요 무대가 되면서, 지리산은 또 한 번 격동을 겪어야 했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시대의 영욕을 대대로 묻어온 역사의 산으로, 이룰 수 없는 그 무엇의 마지막 귀의처였던 회한(悔恨)의 산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 있다.
지리산의 넓은 품과 그 속에 새겨진 수많은 인류사의 흔적은, 지리산을 매개로 한 다양한 문학작품을 남겨놓았다. 조선 중기 김종직, 김일손, 이륙은 지리산 기행문을 남겼고, 우리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으로 꼽히는 『춘향전』과 『흥부전』 그리고 『변강쇠타령』 등도 지리산천을 무대로 한 것들이다. 근대 지리산 문학으로는 황순원의 『잃어버린 사람들』, 박경리의 『토지』, 김동리의 『역마』, 신동엽 시인의 『진달래 산천』, 오찬식의 『마뜰』, 문순태의 『피아골』, 김주영의 『천둥소리』 등이 있다. 1970년대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은 본격적으로 지리산과 빨치산 투쟁을 형상화한다. 1980년대에 등장한 이태의 『남부군』은 작가가 체험한 생생한 빨치산 기록이다. 그리고 1980년대 분단문학의 대표작으로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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