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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신은 왜 여성일까?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1 01:45:56     66

 

우리가 알고 있는 산신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러나 여성인 곳이 있으니 바로 지리산이다. 우리는 산신각이나 칠성각이 있는 절에 들렀을 때 정답게 애교 띤 모습의 호랑이와 그 옆에 있는 산신을 만나곤 한다. 산신령은 대부분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산신령은 남성이다. 호랑이와 산신령 할아버지, 그런 산신의 형상화는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호경이 하루는 마을 사람 9명과 함께 평나산에 매를 잡으러 갔다. 마침 날이 저물어 바위 굴 속에서 잤다. 그때 호랑이 한 마리가 굴 앞을 막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에 놀란 사람들은 ‘호랑이가 우리를 잡아먹고자 하니 시험삼아 각자의 관을 던져 호랑이가 그 관을 무는 자가 나가서 일을 당하기로 하자’고 말하고 모두 자기 관을 던졌다. 호랑이가 호경의 관을 물자 호경이 나가서 호랑이와 싸우려고 하는데, 호랑이는 갑자기 없어지고 굴이 무너져 아홉 사람은 나오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호경은 마을로 돌아와서 평나군에 알리고 다시 산으로 와 9명의 장사를 지내 주었다.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랬더니 호랑이 신이 나타나서 ‘나는 과부로서 이 산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장군을 만나 부부가 되어 함께 이 산을 다스리고자 하니 청컨대 이 산의 대왕이 되어 주시오’하였다. 말이 끝나자 호경과 함께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고을 사람들은 호경을 대왕으로 봉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문헌:고려사

이 설화는 고려 왕실의 역사성과 신성함을 드러낼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다. 이 글에 나오는 호경은 고려왕조를 세운 왕건의 6대조 할아버지였는데, 이 설화에 따르면, 호경은 과부로 살고 있던 평나산 산신인 호랑이와 부부가 되어 그 산의 최고신인 대왕이 되었다. 그것은 곧 산신이 여성에서 남성 할아버지로 바뀐 것일 뿐 아니라 원래의 산신이던 호랑이는 그의 부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산신령 할아버지와 호랑이는 짝을 이루어 나타난다.
원래 고대의 산신은 여성이었다. 전통적으로 산은 만물을 만들어내는 어머니로 인식되어 왔다. 그 때문에 산을 주재하는 신 역시 여성으로 인격화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원시시대 모권사회의 영향이기도 하다.
참고:손진태, 조선 고대 산신의 성에 대하여, 진단학보 1, 1934    

그러다 세월이 흘러 점차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여성이던 산신도 남성으로 바뀌어 갔고 원래의 산신이던 여성은 남성인 산신 할아버지 부인의 지위로 떨어지기에 이르렀다. 호경 설화는 그같은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산신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뀌는 것은 통일신라를 전후한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라의 화랑도 원래는 여성이었는데, 삼국전쟁을 치르면서 남자의 전투적 기능이 강화되자 진흥왕대에 이르러 남성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고려초까지는 여전히 여성이 산신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남성과 공존하는 과도기였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확립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이러한 남성 중심의 산신 변화는 지리산 성모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적인 예가 앞에서 언급한 팔도무당 시조설이다. 아주 먼 옛날 함양 백무동에 있던 지리산 엄천사에 법우화상이 은거하면서 도를 닦고 있었다. 어느 날 홀연히 산간을 보니 비가 오지 않아도 물이 많고 매우 깊었다. 법우화상은 그 근원을 찾기 위하여 천왕봉 정상에 올라갔다. 그곳에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성모천왕聖母天王이라 하였다. 법우화상은 그녀와 결혼을 하여 여덟 명의 딸을 낳고 그들에게 무당 일을 가르쳤다. 그 뒤 딸들은 팔도로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함양 백무동 주변은 무속신앙이 성행하고 있다.
이같은 팔도무당 시조설에 따르면, 성모천왕은 지리산 산신이 되고 법우화상은 팔도무당의 시조가 된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을 부부관계로 설정하고 성모보다 법우화상을 우위에 놓고 있다. 이것은 모두 남성 중심으로 산신이 변화된 모습을 반영한 것일 뿐, 지리산 성모의 실체를 올바르게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밖에 지리산 성모를 박혁거세나 왕건, 석가모니의 어머니라 한 것도 남성 중심의 사회 모습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리산 산신의 존칭으로 쓰인 성모만은 끝까지 자신의 고유한 성을 지켜냈다. 신라도 고려도 불교도 법우화상도 성모의 성을 빼앗지는 못하였다. 그만큼 지리산 성모는 위대했고, 그 어느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신성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1790년에 함양 백무당과 제석봉 제석당 당집에 모셔져 있던 것도 모두 돌로 만든 여성상이었으며, 오늘날 쌍계사 삼성각에 모셔져 있는 산신도 다른 사찰과는 달리 호랑이를 옆에 거느리고 있는 여성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여성인 지리산 성모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시공을 초월한 지리산 성모의 의연함은 곧 고대 이래의 산신신앙이 갖고 있던 본래의 자연적인 모습을 지켜온 것일 뿐 아니라 원초적인 신성함과 모성을 잃지 않고 굳건히 이어온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 성모는 신라에서 고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강화되고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지배이념이 교체되는 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의연히 지켜오면서 민중들과 함께 숨쉴 수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지리산에 가련다』125~8쪽에서 옮김  
 (김양식 지음/한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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