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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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의 침략
배달겨레는 주위의 한 거란 홍건적 여진 몽골 일본 등 이민족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 한의 침략으로 고조선이 멸망하기도 했고, 고려 때 거란과 홍건적의 침략으로 개경이 함락되어 각각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안동으로 파천하기도 했으며, 몽골의 침략으로 수십 년 동안 강화도로 천도하여 나라가 온통 쑥대밭이 된 경우도 있었으며, 왜군의 침략으로 수도를 버리고 피난하여 명나라의 원군과 의병이 왜군을 물리치는 역사도 있었지만, 외침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단결하여 이를 막아내면서 겨레의 공동체 의식과 함께 주체의식을 드높이고 민족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일본[왜倭)과는 고대 왜구(倭寇)의 침략 이래 국권회복기 일제 침략에 이르기까지 배달겨레는 2천여 년을 두고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왜구가 신라를 침략한 것이 27회로 나타나 있으나 실제로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같이 왜구의 침략이 잦고 그 피해가 매우 컸으므로 문무왕은 평시에 말하기를, “짐은 죽어서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문무왕이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 아들 신문왕은 그 유언에 따라 선왕을 매장하지 않고 경주 앞바다에 수장(水葬)하였다. 또한 선왕의 뜻을 좇아 682년에 절을 완공하고, 부처와 선왕의 은혜를 기린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이름 지었으며, 그 절의 법당 지하에는 바다로부터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기도 하였다. 문무왕을 수장했던 곳을 ‘대왕암’이라 일컫고, 몽골의 침략과 왜군의 침략으로 병화를 입은 감은사는 웅장한 탑이 훼손된 채 그 터만 남았다.
이처럼 왜구의 침략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고려시대 전반기에는 잠잠했다가 고려 고종 10년(1223년)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에 왜구는 몇 척의 배를 타고 나타난 도적떼에 불과했다. 그 후 충숙 충정왕 때 각 10여 차례 침략했고, 공민왕 시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 115회의 침략이 있었으며, 우왕 재위 시에는 378회, 충정 2년(1350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까지 43년 동안 왜구의 침략 기록이 무려 5백 38회나 되었다.
왜구의 침략이 계속되어 공민왕 4년(1355년)에는 전라도의 조선(漕船-세곡을 운반하던 배. 옮긴이) 200여 척이 약탈당하기도 했는데, 이같이 관군이 왜군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자 공민왕 7년, 조정에서는 대장군 최영을 양광 전라도 체복사로 삼고, 왜군을 막아 내지 못한 관장들을 모두 군법으로 다스리도록 명하기도 했다.
무신정권 시기 몽골군의 침략에 이어 충정 2년부터 왜군의 침략이 본격화되어 해가 거듭될수록 그 기세가 왕성하여 우왕 때는 해안지방은 물론이고, 내륙까지도 그 만행이 극심하여 배달겨레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겨우 연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병사] 상 이태룡 / 푸른솔나무
초판 1쇄 발행 201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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