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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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
1592년 7월 10일, 고경명 의병장이 순국하자 그 휘하의 장령들이 의진을 수습하니 의병이 8백 명이었다. 화순 사람인 전 부사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고 ‘골(骨)’자로 표신(標信)을 삼았다. 최경회는 고경명, 유팽로 등의 절의를 높이고 본보기로 삼고자 권면하니 도내의 사민들이 많이 추종하였다.
진주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사천 현감 정득열 등과 군사를 합하여 사천 고성 진해의 왜군을 무찌르니 왜군이 점점 철수하여 도망하였으므로 김시민이 연로(沿路)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게 되자 경상우도와 전라도가 의분에 차 있었다.
이에 왜군들은 부산 등지에 주둔했던 군사를 합쳐 대대적으로 진주를 포위하였다.
김성일이 의병장 곽재우 이달 등을 보내어 진주를 구원하게 하고, 샛길로 무기를 수송하게 하였는데, 김시민이 적병을 크게 격파하여 진주가 포위에서 풀렸다. 당초 왜장이 군사 수만 명을 모두 동원하여 진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성 안의 군사는 3천여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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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포위당한 10여 일 동안 4~5차례 큰 전투를 벌이면서 안팎에서 힘껏 싸웠으므로 적이 먼저 도망하였으니, 의병이 참여하여 이룩한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그 후 바야흐로 포위하고 주둔할 때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구원병은 모두 요새에 웅거하여 진을 편성하고서 밤이면 가까운 산에 올라 성 안과 함께 불을 들어 북을 치며 서로 호응하였으나 감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적이 나누어 이웃 고을을 노략질 하자, 구원병이 요로에서 막고 습격하여 상당수를 살해하거나 상처를 입혔는데, 김준민(金俊民)은 여러 번 싸움에서 완전하였으므로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미 퇴각하여 본 소굴로 돌아갔으므로 여러 고을이 모두 수복되었다. 김시민의 병이 심해지자 김성일이 서예원(徐禮元)을 진주목사 직을 대신하게 하고, 김시민을 경상우병사로 삼았는데, 얼마 뒤에 순국하였다.
그 후 합천군수 김면(金沔)을 경상우병사로 승진시켜 임명하고, 의병장 최경회를 포상하여 통정대부에 가자하였다. 김면은 문사(文士)로서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싸워 공이 있었으므로, 발탁하여 병사로 삼아 여러 군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는 선산(善山)으로 진격하니 주둔한 왜군이 날마다 조금씩 퇴각하여 위축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감염병(콜레라)으로 죽었다. 김면은 군사를 일으켰을 때부터 진을 떠나지 않았는데, 처자가 가까운 지역에서 떠돌며 굶주려도 한 번도 서로 만나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충성을 칭송하였다. 이어 최경회가 경상우병사를 맡았다.
이듬해 5월(음력) 초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치계하였는데, 지난 해 왜군이 진주성전투에서 패퇴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30만 명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치러 갈 것이니, 성을 비워주면 진주성에 갔다가 곧 돌아가겠다는 왜군의 기만 술책을 말하였다.
당시 진주에서 급변을 보고하니, 이여송은 한성에서 진을 치고 있던 장수 유정(劉綎) 오유충(吳惟忠) 낙상지(駱尙志) 등에게 전령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구원하게 하였으나, 제장들은 왜군이 30만 명이나 된다는 거짓말에 속아서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왜군은 여러 곳에 있던 군사들을 총동원하여 30만이라 호칭하며 곧장 진주로 향했는데, 의령 등 여러 고을을 분탕하고 노략질하니 화염이 충천하였다. 권율은 이빈(李蘋)과 함께 함양으로 물러가 주둔했다가 이어 남원으로 들어가고, 곽재우는 정암진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6월 21일 왜군이 비로소 진성(晉城)에 주둔하면서 곁에 있는 고을에 군사를 나눠 배치하여 밖의 원조를 막는 한편 진주성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주둔하니, 사면 백여 리가 왜군들로 가득하였다. 홍계남(洪季男) 등이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깃발이 하늘을 가리고 함성이 땅을 진동하였으며, 포위 속에 있는 진주성이 마치 큰 바다에 뜬 외로운 배와 같았으므로 두려워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그달 22일에 왜군이 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적 1명이 성 아래에 잠복해 있다가 위를 향해 철환(鐵丸)을 쏘았는데, 널빤지로 만든 방패를 뚫고 황진의 이마에 맞아 즉사하였다. 황진은 용략이 여러 장수 가운데 으뜸이었으므로 성 안에서 그를 의지하였었는데, 그가 죽자 성 안이 흉흉해지며 두려워하였다.
이에 서예원이 그를 대신하여 무리를 이끌었는데,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혼이 빠져 갓을 벗은 채 말을 타고 울면서 돌아다녔다. 최경회가 군사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다고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는 장윤에게 대신 맡겼다. 장윤은 명망이 황진 다음 가는 인물이었는데, 그도 탄환에 맞아 죽었으므로 이종인 혼자서 동서로 뛰어다니며 적을 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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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바로 촉석루에 올라오자, 김천일이 그 아들 김상건 및 최경회 고종후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종인은 이곳저곳에서 싸우다가 남강에 이르렀는데, 양팔로 두 명의 적을 끼고는 크게 소리치기를, “김해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는다.” 하며, 강에 몸을 던졌다. 진사 문홍헌(文弘獻) 정자 오차(吳玼) 참봉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따라 죽었다.
성이 함락되자 적이 대대적으로 도륙을 자행하였다. 서예원 및 판관 성여해(成汝楷)도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여러 장령들도 다 죽었다. 김준민은 단독으로 말을 달리며 거리에서 싸웠는데, 좌우로 돌격할 때마다 적의 무리가 물 갈라지듯 흩어졌다. 왜군이 종일 그를 추격하였으나 탄환과 칼이 모두 명중되지 않았는데, 끝내 그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성안의 사녀들도 앞을 다투어 강에 이르러 투신하여 흐르는 시체가 강을 메웠다.
대략 죽은 자가 민관군 6~7만이나 되었는데, 장사(壯士)로서 벗어난 자는 수삼 인에 불과했다. 적이 성곽을 헐고 가옥을 불태웠으므로 성이 온통 폐허가 되었다. 성이 포위를 당한 9일 동안은 주야로 벌인 크고 작은 전투가 1백여 차례나 되었으며, 적의 죽은 자도 상당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인데다가 외부에서 원조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힘이 다하여 죽었다. 왜란이 있은 이래 참혹하게 무너지고, 의열(義烈)이 장엄하게 드러난 것으로 진주성 같은 예가 없었다고 각종 기록에 나타나 있다.
[한국의병사] 상 이태룡 / 푸른솔나무
초판 1쇄 발행 201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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