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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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 전투
1957년 8월 16일, 모리 데루모도 우키타 히데이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왜의 우군 5만여 명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을 공격하였다. 왜군이 재침하여 북진할 것에 대한 것이 이미 소문이 나 있던 탓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은 경상도 안음 함양 등지의 주민들을 보다 안전한 황석산성으로 피신시키고, 안음 등 세 고을의 관군으로 하여금 황석산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특히 김해부사로 활약하고 있던 백사림(白士霖)으로 하여금 관군을 이끌고 가서 안음현감을 도우도록 하였다. 그는 임진년 전라도 선봉장으로 활약하다가 전사한 백광언(白光彦)의 아우였는데, 특채되어 5년여 만에 김해부사로 있었다.
왜의 우군은 사천에서 출발, 진주와 산음(산청) 등지를 거쳐 북진하면서 황석산성에 여러 고을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정보에 따라 남원성을 치기 전에 가벼운 전투 정도로 생각하고, 그곳을 에워쌌다.
그런데, 황석산성 안의 상황은 왜군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현감 곽준(郭逡)을 비롯하여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 등이 중심이 되어 관군과 민중들이 일치단결하여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조종도는 집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자, 오히려 성으로 들어가서 말하기를, “나는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같이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 하고는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서 곽준과 같이 왜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죽었다.
사흘 동안 계속된 전투 끝에 세 고을의 군사와 안음 함양 거창 등 여러 고을 사람 1~2만 명 정도 도륙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전투에 참여했던 5만여 왜군도 그 피해가 엄청나서 절반 정도가 살상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조선의 정사에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정유재란 때부터 ‘적군의 코를 베어오라.’는 도요토미 지시에 의해서 코를 베어 갔는데, 정유재란 이후 첫 전투가 이곳이었기에 이곳 사람들에 대한 코 베기가 그 시초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몇 달 뒤에 김해부사 백사림에 대한 탄핵이 있었다.
[한국의병사] 상 이태룡 / 푸른솔나무
초판 1쇄 발행 201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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