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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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전투
왜의 좌군 선봉장 고니시와 그의 사위이자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 등이 이끄는 5만여 명은 순천을 출발하였다.
8월 7일, 텅 빈 구례읍을 점령하고, 사천에서 출발한 우군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천천히 남원으로 향하였다.
13일,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 안이 훤히 보이는 방암봉(訪岩峯)에 본진을 세우고, 진을 넷으로 나누어 방천(防川)에서 서문 밖으로 잇는 반달 형태를 이루면서 우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했던 일자가 되었지만 우군이 도착하지 않은 이유가 황석산성에서 격전을 치르고 절반 정도가 살상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고니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명나라 부총병 양원(楊元)에게 접근하여 협상을 벌였다. ‘성을 비워주면, 잠시 성을 점령하였다가 곧 물러가겠다.’ 하는 식의 협상과 아울러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위해 개죽음할 필요가 없으니, 성을 나와라.’는 것이었다.
남원성은 조명 연합군도 삼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여겨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이 거느린 군사 약 1천 명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군사 3천여 명이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명나라 군사는 남원성 방어 책임자로 온 양원이 약 2개월 전에 남원에 왔다. 그는 조선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룡산성(蛟龍山城)을 버리고, 남원성에서 왜군을 상대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원성은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평지에 쌓은 성이어서 적의 포위공격에 대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양원은 병사들을 동원하여 교룡산성을 헐고, 성 안의 모든 시설과 민가를 불태웠으니, 왜군이 도착하기 불과 사흘 전이었다.
당시 순천에 머물다가 왜군의 북상 소식을 접한 이복남은 급히 말을 몰아 남원성으로 복귀하여 관군을 지휘하였지만 왜군에게 쉽게 성을 내주고 말았다.
16일, 조명 연합군보다 10배가 넘는 왜군들이 남원성을 총공격해 왔다. 성벽의 높이도 낮은데다가 왜군이 준비한 성벽 공격용 각종 장비들을 동원하여 여기저기 왜군들이 들이닥쳤다.
『연려실기술』에는 그날의 분위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패배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성중에서는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부녀자와 아이들은 우는 소리가 우레 같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서애집』에서는 패전 장면에 대하여 말하기를, “명나라 군사는 창졸간에 모두 말을 타고 북문으로 나가려고 하나, 문이 닫혀 쉽게 열리지 않아 거리가 꽉 막혀 말발굽을 묶어놓은 것 같아 돌아설 수도 없었다. 성 안 곳곳에서 불이 일어났다. 얼마 있다가 문이 열려 군사와 말이 문을 다투어 성 밖으로 나가니, 왜병이 각각 길거리를 지켜 몇 겹으로 포위하고 긴 칼을 빼들고 어지럽게 후려치니, 명군은 칼날을 맞고 목이 떨어졌다.”라고 그려 놓았다.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선조는 명나라 총독경략군문 및 경리조선군무도찰원에 보고를 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전주 이북이 한꺼번에 와해되어 어찌 해볼 수가 없게 되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이미 파천하기로 준비해 둔 강화도를 다시 한 번 점검하게 하였다.
[한국의병사] 상 이태룡 / 푸른솔나무
초판 1쇄 발행 201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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