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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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의병
선조 25년(1592년), 우리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일본의 대규모 침략이 있었으니, 이를 임진왜란이라 하고, 그 후 7년간이나 처참한 전쟁이 전개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는 무신 세력들을 제압하여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그 세력들을 방치하면 내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외국 침략을 도모했다. 그는 이 기회에 당시 국방력이 약해 보이는 조선을 정복해보겠다는 야욕과 아울러 가능하면 명(明)까지 정벌하겠다는 의지로 20만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전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본국에서 백여 년에 걸친 전란을 수습하느라고 충분한 전투 경험을 쌓았고, 서양인으로부터 습득한 조총(鳥銃)으로 무장한 터였다. 조총은 과거 창칼이나 활 따위는 비교가 안 되는 신무기였던 것이다.
도요토미는 고니시 가토 구로다 등으로 하여금 20만 명을 이끌고 가서 조선을 치게 하여 그들이 부산에 상륙한 것은 1592년 4월 13일(음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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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침범으로 국왕이 북으로 피난길에 올랐다는 소식에 각지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왜군을 물리쳤다. 손쉽게 조선 관군을 격파했던 왜군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의병들로 인하여 조선국왕을 붙잡지 못했고, 나아가 조선 정복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국왕은 의병장의 전공에 따라 벼슬을 주어 이들을 격려했는데, 당시 주요 의병장의 활약상은 『조선왕조실록』에 비교적 자세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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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郭再祐)는 의주와 제주목사를 지낸 곽월(郭越)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무용(武勇)이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었으며, 집안도 꽤 부유하였다. 왜군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가산을 팔아서 재질이 있는 무인을 모았는데, 먼저 수십 명을 얻자 점점 모인 의병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왜군이 경상우도로 침입한 후 호남으로 향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는데, 곽재우가 정암진(鼎岩津)을 왕래하면서 동서로 무찌르자 적병이 죽은 자가 많았다.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다녔기에 의병들 사이에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고, 적진을 드나들면서 나는 듯이 치고 달리어 적이 탄환과 화살을 일제히 쏘아댔지만 맞출 수가 없었다. 충의를 지니고 곧으며 과감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인심을 얻어 사람들이 자진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기응변에 능하여 다치거나 꺾이는 군사가 없었다. 이미 의령을 비롯하여 주변 고을을 수복하고 군사를 정암진 오른쪽에 주둔시키니, 민중들이 편안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의로운 소문이 크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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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한 갈래는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라도를 향하고자 하였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 의진의 저지를 뚫지 못하자 방향을 틀어 경북 성주를 거쳐 원래 목표했던 호남지역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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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2월 1일, 마침내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왔다. 병부시랑 송응창을 경락군문으로, 도독동지 이여송을 제독군무로 삼아 5만 1천여 명이었다. 이때 평양에 주둔한 왜군은 약 2만 명 정도였는데, 우리 민중들까지 군사로 삼아 군세를 떨치고 있었다.
1593년 1월 6일, 명나라 도독 이여송이 막강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곧장 평양성 밖에 도달하여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본성을 포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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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불태우니, 많은 왜군이 숨어들었다가 타 죽은 자가 약 1만여 명이나 되어 그 냄새가 10여리에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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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왜군은 평양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 총퇴각하여 서울에 집결해서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정비하고 반격을 기도했다. 2월 12일 새벽 일본군은 3만여 명의 대군을 7개 부대로 나누어 고시니 이시다 구로다 요시가와 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여 성(행주산성. 옮긴이)을 포위 공격했다. 성 안의 관군과 의승군은 화차 수차석포 진천뢰 총통 등을 쏘아대며 용감히 맞섰고, 권율은 직접 물을 떠서 나누어주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이 전투에서 관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부녀자들도 긴 치마에 돌을 나르는 등 투석전을 벌이는 군사들을 도왔다.
이 싸움은 이치대첩1) 진주대첩과 함께 의병들이 참여한 3대첩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한국의병사] 상 이태룡 / 푸른솔나무
초판 1쇄 발행 2014년 6월 1일
1) 금산군과 완주군 사이 대둔산의 배티재[梨峙:해발고도 340m]는 배나무가 많아 이치(梨峙)라 불렀다. 권율 장군은 적은 병사로 왜적과 싸워 임진왜란 첫 승리를 거두며 전주성(全州城)과 호남평야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이치대첩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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