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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여순사건과 지리산 빨치산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2 01:51:42     88

 

여순사건의 발발

한국현대사에서 지리산은 빨치산의 근거지로 주목받는 곳이다깊고 넓은 계곡과 웅장한 지리산의 산세는 외침과 저항의 시기에 천연 요새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근대 변혁시기의 동학과 의병이 그랬던 것처럼현대사에서는 빨치산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해방 후 남한 지역의 빨치산 활동은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군내에서 숙군의 여파와 제주도 출병계획이 알려진 가운데 1948년 10월 19일 여수읍 신월리에 주둔하던 14연대 병사들이 제주파병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남로당 세포였던 지창수 상사를 비롯한 하사관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14연대 병사들이 10월 20일 새벽 여수를 장악했고이들 중 주력 6백 여명은 10월 20일 김지회의 지휘아래 순천지역을 점령했다그리고 순천에 파견되어 있던 14연대 2개 중대가 홍순석 중위의 지휘하에 반군에 결합하면서 1천여 명의 병력이 순천 북방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정부군의 저지를 받아 구례곡성보성 등지로 흩어졌다.

정부는 10월 21일부터 반란 진압에 모두 5개 연대 10개 대대와 비행대수색대 등을 동원했다정부군은 10월 23일 순천, 24일 보성과 벌교,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였다이어 정부군은 전북 남원전남 구례백운산지리산 일대로 흩어진 반군을 추격하였으며, 11월 1일 전라도 일대에 계엄령을 발포했다.

여순사건의 주도세력은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 곧바로 지리산으로 입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이 과정에서 반란이 순천으로 확산되었으며반군은 좌익세력과 결합하여 무장세력을 형성하여 장기적 빨치산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여순사건은 510 선거 이전에 발생한 제주 43봉기와는 달리전남 동부지역이 순식간에 인민공화국 지지를 외치는 좌익에 넘어갔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여순사건은 북한에 있던 남로당 지도부나 김삼룡을 위시한 서울지도부남로당 전남도당의 직접적 지시를 받아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남로당은 이같은 돌발적 상황을 투쟁의 발달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또한 이승만 정부는 체제 강화를 위해 여순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정식 공포・시행한 국가보안법 제정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지리산 빨치산의 자취

지리산 빨치산은 1949년 3월에서 5월 사이 핵심지도부인 김지회홍순석이 전사할 때까지 처음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이후 전남 경북 강원 지역의 산악지대로 빨치산 활동이 확대되면서지리산 호남 동부지역 일부 태백산 영남지역에는 유격지구가 형성되었다지리산 유격지구는 전남경남전북 산악지대에 걸쳐 있었으며경남 산청 함양 거창 하동과 전북 무주 남원 순창 전남 구례 곡성 영광 함평 등지에서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

1949년 하반기 이후 남한 지역 빨치산 활동은 북한 당국과 남로당 지도부의 지원을 받으며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북한 당국과 남로당 지도부는 월북한 남로당원과 지지자들을 북한지역의 유격대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에서 훈련시켜 1,500여명 이상을 남한에 침투시켰으며이들은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에 병단을 구성하였다인민유격대 제1병단은 이호제를 중심으로 오대산 태백산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했으며3병단은 김달삼과 남도부가 중심이 되어 경북 동해안 일대에서 활동했다지리산 지구에서 활동한 제2병단은 이현상을 사령관으로 하여 제678연대 등 4개 연대가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덕유산 등지에 근거를 두고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

격렬해진 빨치산 활동을 토벌하기 위해 정부는 1949년 9월 28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이때 정부군은 주요 산악의 부락들을 소개(疏開)하여전라남도에서 18만 명 이상의 농민들이 집을 떠났다. 1949년 정부군이 단행한 동계토벌작전을 통해 빨치산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1950년에 들어서 남한지역의 인민유격대 3개 병단은 사실상 무력한 상태가 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빨치산 활동은 7월 중순경부터 다시 활발해졌다경남 산청일대의 지리산 빨치산들은 7월 13일 산청에서 국군경찰들과 교전을 벌였으며전남 화순에서 활동하던 지리산 빨치산들은 한천면 일대를 점령하기도 했다이현상이 지휘하는 지리산 빨치산 부대는 8월 10일 대구 주변 달성군 가창면 일대에서 미군 통신부대를 습격하였고, 8월 25일 경남 창령에서 5백 명 규모의 미군사령부를 기습하였다이현상 지리산유격대는 여순사건 관련자들을 핵심으로 한 부대로서 낙동강 계선에서 활발한 전투를 전개하였다이 부대는 9월 8일 경북 청도지구로 진출하여 북한 인민군과 합동작전을 벌였으며전투과정에서 유격대원이 더욱 증강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남부지역에 주둔하던 인민군의 퇴로가 차단되면서 빨치산의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이 시기에 남한지역 빨치산 활동은 대략 두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었다즉 각 지역의 남로당 도당(道黨)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활동과 이현상이 지휘하던 지리산 빨치산의 남부군 활동이 그것이었다.

당시 전남지역 빨치산 병력은 5만여 명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실제로 무장한 인원은 전체의 20%에 불과했다지방당조직이 입산하여 유격대로 편제를 바꾸는 상황에서 이현상이 지리산 빨치산 부대도 북으로 후퇴하여 11월에 강원도 평강군에 도착했다가이곳에서 대열을 정비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를 조직하고 1950년 11월 중순 남하했다이 부대에는 기존의 지리산 빨치산 부대 대원들 이외에도 현지에서 상당수의 대원들이 추가되어 8백여 명의 규모를 이루었고승리사단 혁명지대 인민여단 사령부 직속 부대 등을 구성하였다.

독립4지대는 1950년 12월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으로 명칭을 개칭하고 활동하였다남부군은 1951년 2월 경 덕유산에서 남한지역 빨치산 부대를 통일적으로 지도할 것을 결정하고전남과 경북도당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당들을 남부군에 새로이 편제하고지리산을 거점으로 설정하였다남부군단의 주력은 전북 경남 지리산 일대에서 마을과 경찰소 등을 공격하였다.

정부군의 토벌도 한층 강화되면서, 195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에 걸친 백야전 토벌로 인하여 남한 산악지역 빨치산들의 활동은 급격히 약화되었다백야전 사령부가 철수한 뒤에도 토벌은 지역별로 계속되었다이로써 1953년 8월 26일 빨치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는 지리산 빗점골에서 실질적으로 5지구당 해체회의를 열었으며유격대의 조직적 활동도 마감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임진왜란사》, 1987

국립진주박물관《새롭게 다시보는 임진왜란》, 1999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출판사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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