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학문(유학)의 고장
지리산권에서 학문에 정진하였던 유학자들은 무수히 많았다. 여기서는 조선조 함양군수를 지냈던 김종직, 함양출신의 정여창, 그리고 61세때부터 지리산 기슭 덕산으로 들어와 살았던 조식, 구레 출신의 황현 선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위 에 학자가 정진하였던 유학(儒學)은 중국·한국·일본 등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깊은 영향을 준 사상이었다. 우리나라에 유학이 전래된 이래 수많은 명유(名儒)들이 명멸(明滅)하였으나, 조선유학에서 위 학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였다. 특히 지식의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지행합일(知行合一) 정신은 후일 선생의 제자들로 하여금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하는 데 가장 먼저 앞장서서 살신성인하는 전범(典範)을 보여주었다. 우선 지리산권에서 이와 같은 학자들이 몸 담았던 유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발흥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약 560년경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공자에 의해 창시된 중국의 유학사상과 문화가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전해졌는지, 그 시기와 사정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삼국시대 때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고 국학을 세운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유학이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을 세워 오경(五經)과 사학(史學), 문학 등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였고, 율령을 반포하여 사회의 통치체제를 재정비하게 되었다. 이때의 학제와 법제는 모두 진한시대 이래로 내려오는 중국의 제도를 도입하여 시행하였다. 신라도 유학을 수용하고 국학을 건립하였으며, 청년들은 경학연구와 유학정신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717년(신라 성덕왕 16년)에는 왕자 수충(手忠)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공자 십철(十哲) 72제자의 화상을 갖고 오자, 왕은 국학에 모시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신라에도 본격적으로 유학이 진흥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백제 때에는 경학에 관한 박사제도를 두고 유학 교육기관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 중국문화와 함께 유학사상을 도입하여 교육과 사회제도의 개혁정비에 활용하였으며, 유학의 핵심 이념 중의 하나인 충효사상을 국민윤리로 확립하고자 하였다.
고려 초 문종 때에 이르러서는 최충이 구경(九經)을 설치하고 국자감이라고 하는 국립대학을 설립하여 경사(經史)와 윤리도덕을 교육시키는 등 유학이 크게 떨쳐졌다. 그러나 그 후 무인의 발호와 전란의 계속으로 유학이 쇠퇴하다가, 고려 말 안향에 의하여 중국으로부터 처음으로 성리학이 도입됨으로써, 새로운 학풍과 신사조가 형성되었다. 이어 이색, 정몽주 등 명유석학(名儒碩學)들이 잇달아 나오면서 고려 말의 유학은 한층 더 깊어졌다.
그리고 지방의 토성이족(土姓吏族) 또는 향리자제들도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신흥 사대부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곧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후일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가담하여 고려의 권문세족을 타파하고 조선왕조를 건국하기에 이르렀으나, 일부 사대부 계층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재야사림이 되었다.
조선왕조는 고려의 쇠망원인을 불교의 폐단에 돌리고, 유학을 국가의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유·불·선(儒·佛·仙) 삼교가 정립되었던 삼국시대 이래 조선왕조에서는 숭유억불정책을 펴 나감에 따라 유학은 지배계층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한테는 종교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 유학은 크게 융성하였다. 그러나 1498년부터 1545년 사이에 일어난 네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많은 인재들이 희생되었고, 1575년경부터 시작된 당쟁의 심화는 국론을 분열시키는 등 조선조의 국정운영에 커다란 폐해를 가져왔다. 이에 사림 학자였던 김종직으로부터 김굉필 등으로 이어지는 도학정신을 계승한 조광조(1482~1519)는 신진학자 겸 정치가로서 도의적인 유학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부패한 구악을 일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부 구정치인들의 반목과 질시를 받게 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어 조선조는 동서로 분당되고, 이후 다시 남북으로 파당이 갈리면서 혼란이 극심해지자, 이이(율곡, 1536~1584)는 ‘국세의 미진함이 지극하니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라가 무너지는 환란을 당하리라’라고 하며 국가의 위기가 도래할 것을 경고하였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조는 임진왜란(1592년)을 비롯하여 정유재란(1597년) 인조반정(1623년) 이괄의 난(1624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광해군 폭정 등 내우외환이 계속되어 국기(國基)가 붕괴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조 후기에 와서 조선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이 지나치게 공리공담(公理空談)적 사변(思辨)으로 치우쳤던 데에 대한 각성과 함께 지도이념으로서의 역할에도 많은 자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소백산의 이황(李滉)과 지리산의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가 성립되었는데, 이 두 학자들로 인하여 조선 유학은 더욱 정치(精緻)해졌으나, 두 사람이 지향하는 학문적 목표는 달랐다. 즉 이황은 이론위주의 성리학적 철리(哲理)를 지향하였는데 비해, 조식은 실천위주의 지행합일적 사상에 더 학문적 가치를 두었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문제에 학문적 역점을 둔 조식의 학문정신은 임진왜란 때 절의와 충렬정신으로 발현되어 정인홍 곽재우 등과 같은 제자들이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지리산 이천년]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 보고사
2010년 11월 19일 초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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