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명나라 후예 석상룡의 지리산의병부대
한말에 지리산을 무대로 활약한 의병부대가 적지 않지만 석상룡 의병부대는 지리산 사람들이 조직한 의병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의병장 석상룡(石祥龍)이 명나라 후예라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석상룡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13세 종손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을 때 석성이 원병파견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여송의 군대가 오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석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정적들로부터 조선 원조에 실패한 책임추궁을 받아 처형되고 말았다. 그때 둘째아들 천이 조선으로 피난했으나 맏아들 담(潭)은 유배되었다. 그후 희종 때 신원은 되었지만 가세를 만회할 길 없자 담도 조선으로 건너왔다. 조선에서는 은인의 아들이라 하여 그를 수양군에 봉하고 해주 석씨로 성을 내려주고 황해도에 살게 했다.
명나라가 망한 뒤 청나라에서 이들을 잡아오라고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는 그들을 경상도 산음(산청)으로 숨기고 전답을 내리니 산청군 생초면이 그들이 살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 사람들은 명에 대한 원병 은공을 잊어갔고, 관리와 토호들의 수탈에 석씨들은 나라에서 준 전답마저 빼앗기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으로 살게 되었다. 지리산 최상봉 천왕봉의 북쪽 칠선계곡의 가파른 경사지대인 추성리에 터전을 일군 이들은 와신상담하며 재산을 모아 새부자의 소리를 들으며 한을 풀 기회를 찾고 있었다.
원래 화전민촌은 집단부락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의병이 조직되지 않았다. 그러나 1907년 9월 총포화약취체법이 발동하여 산포수들의 총조차 빼앗길 형편에 이르자 그들도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더욱이 추성리 입구의 실상사나 벽송사에도 일본군이 주둔하여 뱀사골, 백무동계곡, 칠선계곡 등의 화전민을 못살게 했다. 이때 추성리에서 글을 익힌 선비로 석상룡이 근방의 화전민과 남원, 함양, 산청 지방의 의병을 모아 지리산의병부대를 결성하였다.
석상룡의병부대는 때마침 지리산으로 들어온 문태수, 유종환, 오대근, 전백현 의병진과 연락하며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을 넘나들면서 일본군과 싸웠다. 석상룡의병부대는 실상사전투를 비롯하여 성삼재전투, 벽소령전투, 쑥밭재전투 등을 통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라 1907년 말부터 1912년 석상룡의병장이 일본군에 잡힐 때까지 5년이 넘게 지리산을 무대로 활동하였다.
실상사에는 1907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50여 명의 석상룡 의병은 1908년 3월 그믐(양력 4월 29일) 야음을 틈타 일본군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격전 끝에 의병들은 서쪽 노루목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들은 5월 11일(음력 4월 12일) 부근의 도마리(都馬里) 서당에 인근 주민을 집합시킨 후 집단 학살하겠다고 협박하면서 김학길 청년을 참살하였다. 이때 마천면장 노지현(盧址鉉)이 달려와 일본군을 설득하여 참변을 모면할 수 있었다.
석상룡 의병장은 1912년에 잡혀 5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50세에 순국하였다. 동생 채룡은 일경의 눈을 피해 산중에서 돌을 깍아 석상룡 의병장의 공덕비를 무덤 앞에 세웠다. 공덕비에는 “공의 자는 용현(龍見)이고 세칭 비호장군이라 하였다. 용력이 뛰어나 국가 멸망의 위기에 의병을 일으켜 지리산중에서 왜병을 참(斬)한 것이 많았다. 마침내 투옥되어 5년 뒤에 나왔으나 옥중의 고질로 경신(庚申) 10월에 울분을 머금은 채 떠났다”고 새겨져 있다. 석상룡 의병장의 무덤은 인적이 닿지 않은 쑥밭재 밑에 있다. 현재 추성리에는 15세 종손 석덕완 선생이 살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조동걸, 《독립군의 길따라 대륙을 가다》, 지식산업사, 1999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 출판사 역사공간
로그인하시면 댓글 작성 가능합니다. 로그인
Guest (행간격 조절: Enter, Shift + 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