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남명문하 - 국토지킴이 기상
남명문하의 발생지인 지리산은 낙동강 우측에 자리한다. 조선왕조 시절 이곳에서 가장 큰 고을은 진주(晉州)였다. 진주는 지리산 산천재와 직접 연결된 고을이었기에 당시 남명문인들의 향토도 되었다. 진주를 남도의 진주(眞珠)라 했던 것은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진주 인물은 고려시대부터 조정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를 두고 진주 사람들은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친 봉황산의 지령발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진주고을 진산의 명칭은 원래 대봉산(大鳳山)이었다. 그런데 고려 때, 진주강씨 문중인 강감찬 장군과 강민첨 장군 등 진주인물들이 경상대부 반열을 이루며, 고려조정을 채우자 왕실에서도 이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어명으로 대봉산을 비봉산(飛鳳山)으로 바꾸어버렸다. 날아(飛)가 버리는 봉(鳳)황으로서 진주 진산(鎭山)의 기운을 날려 보내려는 의도에서의 비봉산인 것이다. 봉황지령이 날아가 버리면, 진주는 끝장날 것을 우려한 이곳 사람들은 풍수대책을 세웠다.
봉황은 5색을 두루 갖춘 길조로서 오동나무 숲에 집을 짓고, 대나무 열매인 죽실(竹實)을 먹는다고 알려졌다. 오늘날 진주시를 여행하면, 타 도시에서 보지 못한 특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도시경관을 미화하려고 심어놓은 가로수들은 흔히 은행나무나 플라타너스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이곳 진주시 남경 변 가로수는 대나무 숲으로 조성되어 있다. 봉황이 진주를 떠나지 못하게 심어 놓은 풍수 먹거리인 것이다.
그 뿐만 아니다. 대진고속국도가 생기기 이전에는 진주시에서 지리산 산청으로 통하는 길은 3번 국도였다. 3번 국도에는 상봉동(上鳳洞)도 있지만, 그곳 로터리 명칭은 아예 오죽(梧竹)광장이다. 봉황의 집인 오동나무와 먹거리인 대나무 죽(竹)으로 봉황을 잡아두려 했던 것이다. 이쯤 도면 한 살림 차려놓은 것인데, 그에 걸맞게 봉황머리에 해당되는 비봉산에는 봉산사(鳳山祠)라는 문패까지 걸려 있다.
이런 것이 한국인의 정서며, 아직까지 살아 숨 쉬는 한국의 도시풍수다.
진주에서 봉황의 기세를 넣어주는 산줄기는 백두대간에 놓인 덕유산에서 뻗어온다. 이는 진주 풍수 중 산세(山勢)에 해당된다. 더불어 진주시 수세(水勢)는 산천재 앞을 흐르는 덕천강 물줄기가 남강을 타고서 흘러온다. 이 같은 남강의 수세가 모이도록 붙잡아 두는 산이 진주에는 있다. 진주시를 빠져나가는 마지막 남강 지점에 있는 월아산이다. 진주 사람들은 월아산을 진주의 수구막이(水口)산이라고 향토지에 기록해 놓고 있다.
이런 것이 진주풍수가 되는데, 진주에서 보는 풍경의 압권은 단연 지리산이다. 맑은 날 남해고속국도를 타고서 진주시를 통과할 때, 북쪽으로 시선을 주면 진주시가지와 지리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지리산 천왕봉이 굽어보는 진주는 남명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했다. 남명이 산천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을 당시 서원선비들과 조선팔도 유생들에게는 최대의 관심사가 있었다. 도산서당의 퇴계 이황과 전라도 선비 고봉 기대승과의 7년에 걸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유행했다. 성리학의 이(理)를 명확히 밝혀두어야 했던 그 당시 상황에서는 꼭 필요한 과정적 논쟁이었다. 그런데 조선팔도 유학자들이 열광하다보니, 오히려 비경제적인 병통을 야기하게 되었다. 꼭 필요한 학교교육일지라도 너무 과열되다보니, 사교육비 과대지출이라는 비경제적 상황에 처한 오늘날 망국병처럼 말이다.
사단칠정론은 이기(理氣)논쟁에 속한다.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서 4단의 내용과 7정이라는 항목들의 연결관계를 논증하여야하는 탁상공론 논쟁이 사단칠정론의 정체다. 그런데 기(氣)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이 기다. 이에 반해 이(理)는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는 관념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비현실적인 고담준론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다. 생각은 자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결국 정답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사단칠정론이었다. 이런 것을 결판내려고 7년간을 소모했다는 그 자체가 쓸모없는 학문을 양산하는 풍조로까지 번져 갔던 것이다. 퇴계와 고봉도 7년 후, 제풀에 지쳐 확실한 결론도 없이 그만 두어버렸다.
사단칠정론 논쟁이 시작되자, 남명은 제자들에게 탁상공론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지말라고 이를 금지시켰다. 그런 시시비비꺼리에서 밥이 나오느냐 떡이 나오느냐는 그런 의도에서였다. 그렇게 허비하는 시간에 차라리 방청소나 하라는 것이 남명학문의 실리실학이기도 했다. 이 같은 흐름은 후일 정조 때, 정약용의 실학사상으로도 연결된다.
사단칠정 논쟁이 유행하던 시절 남명은 산천재 벽에다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인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걸어 놓고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신명사도를 살펴보면,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조선왕조는 종묘와 사직으로써 국가를 경영하였기에 이를 종사보존이라 했다. 종묘는 왕실의 통치권을 상징하며, 사직은 백성 경제의 기틀인 국토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남명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국군사사직이란 “군왕은 국토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는 가르침이다. 종묘를 우선시 했던 조선왕조에서 보면 이는 대역모에 해당되는 사직중심의 좌익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과 퇴계는 똑같이 1501년에 태어나서 같은 시대에 똑같은 세대의 제자들을 가르쳤다. 또한 둘 다 70대 초반에 운명한 영남학파 양대 산맥의 스승들이었다. 두 스승이 별세한지 20여년 후,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러자 남명문하는 국군사사직의 가르침에 따라 그 즉시 의병장이 되어 향토에서 왜적과 맞서 싸웠다. 남명정신은 진주향토의 거름이기도 했다.
종묘를 중요시했던 신하들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왕을 호종한다며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같은 와중에서도 국토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던 2개의 집단이 있었다. 하나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이었고, 또 하나는 이곳 진주 백성들이었다. 이들의 기세는 천하의 그 누구라도 꺾을 수가 없었다. 꺾을 수 없었기에 승승장구하던 왜적들도 이들 앞에서는 대패를 당했다.
1592년 7월 이순신 장군은 한산대첩이라는 대승의 쾌거를 이룩하였다.
1592년 10월 남명문하 의병장 곽재우의 2천 병력과 합세한 진주 수성군 3천8백 명은 진주성에서 2만의 왜적들과 일전을 치른다. 6일주야에 걸쳐 벌어진 공방전은 대패한 왜적의 퇴각으로 막을 내렸다. 이것이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이다. 지리산 정기와 남명기상과 선비정신이 이룩한 역사이기도 했다. 남명의 경의(敬義) 교육 속에는 오늘날 “깨어있는 시민 함께 가는 사회”라는 표어도 들어있다. 함께 더불어 사는 우리 국토가 외세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는 임금부터 목숨을 걸고서 국토를 지키라는 것이 국군사사직이다. 남명문하선비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되어 이를 지켰다. 오늘날 학문 때문에 국적까지 포기하면서 병역을 기피하려는 풍조는 잘못된 교육풍조에서 기인된 것이다. 참된 학문 속에는 국토지킴이라는 대명제가 들어있다. 그런 것이 선비정신이며 우리 국토의 기상이다.
오늘날 우리가 서원에서 찾아야할 한국인의 정신은 여기에 있다. 이는 서원이라는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할 한국인의 화두도 된다. 우리가 지조있는 참된 선비를 그리며,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전통 서원을 답사하려는 가치성은 이점에 있다.
[조선시대의 명문사학 서원을 가다] 장영훈 도서출판 담디
초판발행 2005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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