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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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권 풍수지식인, 도선
지식인은 사회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지식과 사상을 통해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보다 나은 이상사회의 담론을 이끈다. 지리산권역의 사회문화사를 개관해볼 때 손꼽힐 만한 여러 지식인과 이상사회의 사상이 있었다. 유학자로는 남명 조식이 대표적이고 앞선 시대의 최치원도 지리산의 유교 지식인으로 일컬을 수 있다.
불교 지식인으로는 신라 말 선종사찰을 창건한 신행과 홍척, 혜소, 혜철 등이 있었고, 앞서 경덕왕 대(742~765)에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도 있었다. 그들은 각각의 이상사회(유교적 대동사회 혹은 불교적 불국정토)의 구현을 위해 실천하면서 사회적 삶을 살았다.
그런데 지리산의 문화적 지층에서 빼놓지 못할 지식인과 사상이 있으니 바로 도선과 그의 풍수적 이상사회의 담론이다. 도선은 지리산에서 풍수법을 전수받아 그의 풍수사상을 체계화하고 정립하였으며, 지리산권역인 광양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서 평생을 주석하다가 열반하였으니, 지리산의 지식인이요 지리산권 풍수문화의 생산자였다.
도선의 풍수사상은 지리산을 중심축으로 주변 권역으로 파급되었으며, 태조 왕건이 고려시대의 공간적 이데올로기로 채택하면서 국토적인 범위에서 이상사회의 사상과 담론으로서 시대를 풍미하였다. 사회문화사적인 영향력으로 볼 때 도선의 역사적 인지도에 비추어 지리산과의 공간적 연관성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낮으며, 고려의 도선과 조선의 남명은 지리산문화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되 남명과 비교하면 도선의 지리산에 대한 학계의 조명도 부족한 실정이다.
도선의 풍수사상과 그의 이상사회 담론에 대한 고찰은 지리산권 문화의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와 위상을 차지한다. 한국의 역사 속에 계층여하를 막론하고 도선만큼 큰 발자취를 남기고 수많은 인구(人口)에 회자되었으며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몇 명 찾기 어려울 것이다.
역사에서 표현된 도선은 나말여초 전환시대의 지식인이자 정치사회적 공간 담론의 이데올로그였다. 고려사에서 그는, 신라 왕조가 몰락하고 고려가 건국하는 태동기에 불교와 풍수라는 두 사상 요소를 결합 응용하여 새로운 이상사회를 추동하는 비보설(裨補設)이라는 담론을 실천한 전환기의 지식인 상으로 묘사되었다.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도선의 풍수담론은 사회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 지리산권의 사찰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 전후의 전통사찰치고 창건이나 중창과정에 도선의 이름이나 비보사찰의 명칭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별로 없으며, 그의 비보설은 고려시대에 국토공간의 주요 운영 원리이자 이데올로기로 풍미한 정치 사회담론이었다. 문학류에서도 도선 이름을 가탁(假託)한 수많은 도참비결서가 생겨나서 영향력을 미쳤고, 지방 곳곳의 마을마다 도선에 관련된 설화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서민들에 전승되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사회에서 풍수사상의 영향력은 적지 않으며 학계에서는 풍수를 전통적인 생태환경 담론으로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사회 담론의 속성이 그러하듯이, 도선의 풍수담론도 의미체계를 공유하는 사회적 공동체를 형성하며, 도선과 그의 사상에 대한 각 사회계층이나 집단의 풍수담론에는 각각의 이데올로기가 내포되어 재구성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개관하여 볼 때, 도선의 풍수담론은 고려시대의 정치사회 지배집단에 의한 권력 재편과 구축 과정에서 재구성되어 정치, 사회적 세력화를 위한 전략적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지방의 정치사회적 지배집단은 도선의 풍수담론을 통치 질서의 유지나 취락공동체의 번영과 인재의 번성이라는 유교적 담론으로 재구성하였다. 현대에 와서 풍수사상은 생태환경적 사회 담론과 부합하는 문화전통으로 다시 평가 해석하는 과정에 있다.
도선의 역사적 실체에 근접한 초기 문헌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에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과 「옥룡사왕사도선가봉선각국사교서급관고(玉龍寺王師道詵加封先覺國師敎書及官誥)」가 있다. 이 두 글은 고려 중기에 왕명(王名)에 따라 찬술되어, 왕조의 이데올로기적 의도로 도선의 지식인상을 재구성한 것이다. 여기서 도선은 지리산권역에서 불교와 풍수를 배우고 음양오행설, 도참설, 등 당시의 여러 사상을 수용 통합하여 사회사상을 정립하고, 신라 말의 시대상에 적용해 실천한 지식인으로 묘사되었다.
고려 왕조, 특히 인종 대(1123~1146)에서는 도선을, 전통 불교인 화엄학이나 밀교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형성되었던 새로운 사상적 조류인 선종의 이치를 깨쳤고, 국토의 편력 과정과 풍수법의 전수로 지리적 안목과 지역 정보를 넓혔으며, 음양오행의 술법, 도참비결 등 응용적인 사회 담론의 원리와 방법을 습득 종합한 지식인으로, 그리하여 불도, 예언, 술수 등에서 최고의 수준에 이른 국사로서 사회적 권위를 부여하였다.
고려 왕조의 도선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재구성의 의도는, 당시에 사상적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도선과 그의 풍수담론을 끌어대어 권력 정통성의 토대 강화와 정치사회적 통치 합리화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이하 옥룡사 도선 비문으로 약칭함)에서 드러나는 바, 고려 왕조에서 도선의 지식인상을 구성한 핵심적 두 지식요소는 선종과 풍수였다. 선종은 철학적인 존재의 담론인 데 비하여, 풍수는 공간적인 사회 담론으로 기능하였다. 나말여초의 사회 담론으로 본격화하는 두 신진 사상은, 신라의 사회체제를 지탱하던 낡은 사상체계를 혁신할 수 있고, 국토의 정치적인 구조와 질서를 공간적으로 재편할 수 있으며, 개혁적 정치사회세력의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전략으로서 고려 건국의 사상적 기초를 형성하였다.
구산선문으로 통칭하는 신라 하대의 선종 집단들은 마음 정보의 계발과 각성에 고도로 집중하는 참선 수행을 통하여 곧장 이상적 인간 존재(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는 새로운 인문적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사회에 확산시키고 있었다. 특히 지리산권역에는 일찍이 북종선을 도입하여 단속사에서 주석한 신행(神行, 704~779)과 흥덕왕 대(826~836)에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실상사를 세운 홍척(洪陟),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 옥천사(현 쌍계사)를 세운 혜소(慧昭, 774~850)), 신무왕 1년(839)에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태안사를 창건한 혜철(慧徹, 785~861) 등이 선사들이 포진하여 선종의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다. 도선은 혜철의 동리산문에서 수학하여 선종의 묘한 뜻을 통달한 지식인으로 옥룡사 도선 비문과 선각국사 관고는 설명하였다.
도선의 지식인상이 구성된 두 번째 지식요소는 풍수였다. 동리산 선문에서 불성을 깨우친 도선은 운수 행각을 하다가 지리산에 머무르던 중에 사도촌에서 선도(仙道)의 계통으로 추정되는 이인(異人)에게 풍수법을 전수받고 나서, 음양오행설과 도참 비결을 습득하였다고 묘사되었다. 도선이 지리산에서 이인을 만나 풍수법을 전수받은 시기는 옥룡사에 주석(38세, 864)하기 전의 어느 때였다. 그는 15세에 월유산 화엄사에 출가하여 화엄학을 공부하고, 20대 초반에 동리산 선문을 연 혜철의 문하에서 선 수행을 하여 선지를 깨치며, 이후 운봉산, 태백산 등지로 운수 행각을 하는데, 바로 이 무렵에 지리산의 한 이인으로부터 풍수법을 전수받는 것이다. 옥룡사 도선 비문에서 도선이 풍수법을 전수받았다는 장소인 사도촌은 현재의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로 추정된다. 1872년에 제작된 「구례현지도」에는 상사도리(上沙圖里)와 하사도리(下沙圖里) 사이의 위치를 표시하면서, “옛 승려인 도선이 이인을 만나 모래를 모아 산천을 그렸다고 한다(古僧道詵 遇異人 聚沙圖山川云).”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선에게 풍수법을 전해 준 지리산 이인은 선도의 맥을 이은 사람으로 추정되며, 이로써 도선의 사상에 불교와 선도, 풍수가 결합할 수 있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지리산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산악, 산신 신앙이 발아된 곳이었고,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는 청학동 유토피아의 현장으로도 일컬어질 만큼 선경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지리산에는 삼국시대 이후로 선맥이 전개되었던 본향이었다.
지리산의 산악신앙은 전래적 문화전통으로서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상의 계통이 도선에게 수용되었다는 사회적 함의는 도선의 풍수사상으로 하여금 지리산 문화전통의 계승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의 확보를 의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글에서 나타나듯이, 이인이 전수해준 풍수를 “비밀스러운 술법”이라고 표현하고, “지리산의 깊은 곳에 산지가 수백 년”이라는 이인의 신비스런 존재와 도선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보이는 이인의 기이한 행태, 그리고 신인이라는 정체성 표현 등을 통해 그에게서 풍수법을 전수받은 도선의 권위를 높이는 이미지 효과를 배가시켰다.
이윽고 도선은 당시의 제 사상과 지식을 익히고 나서 ‘부처의 경지에 이르렀고, 땅의 지리적 이치를 묘하게 볼 수 있는’ 신화적인 존재로 우상화되었다. 도선이 선맥을 전수하였다는 논리는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도 이어져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천선(天仙)이 하강하여 천문 지리음양의 술법을 전수해 주었다’고 하였으며, 조여적이 편찬한 『청학집』(16~17세기)에서도 도선은 물계자(勿稽子)라는 선인(仙人)의 여운(餘韻)을 띤 것으로 기록되었다.
옥룡사 도선 비문에 나타난 도선의 풍수법 전수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9세기 중엽 당시의 지리산권역에 이미 풍수가 유입되어 수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산권역에 풍수가 도입된 사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도입 경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찍이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었던 선진적 지리인식과 정보체계로서의 풍수는 사회권력의 정치 역학과 맞물려 있는 공간적 이데올로기였다. 풍수의 지식 정보와 운용은 사회의 권력 지배층에게 배타적으로 독점된 전유물이었다. 당연하게도 신라시대에 풍수는 왕도인 경주를 위주로 한 정치행정의 중심지를 주 무대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신라 하대에 중국에서 풍수를 습득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최치원(崔致遠, 857~?)과 도당(渡唐) 구법승(求法僧)들로서 신행, 홍척, 혜소, 혜철과 그 문도들이 지리산권역에 주석하여 선문 개설이 이루어지자, 풍수는 지방 중심지 형성과 확산, 거점의 마련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지리산권역에 풍수사상이 발아, 확산하기 시작한 시점도 이 무렵으로 추정된다. 구전 설화에, 지리산 실상사를 연 홍척이 도선에게 절터를 자문하였다는 이야기는 지리산지 선문의 풍수 반영 사실과 연관성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지리산과 지리적으로 근접하여 있는 영암은 대당 교역항으로 인물과 물산, 선진 문화정보가 드나들었기 때문에 여기를 통해 지리산권역으로 풍수문화가 확산하기에 더욱 쉬울 수 있었다.
도선의 풍수담론이 고려 중기의 정치사회 권력에 의해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되었으며, 당시에 도선 풍수담론의 정체성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몇 가지 단서가 옥룡사 도선 비문에 있다.
첫째, 고려 중기 당시에 도선의 풍수사상에 대한 사회적 가치 평가로서,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제도하는 법입니다.”라고 말한 대목이다. 당시에 풍수는 구세(救世) 도인(道人)의 법술이라는 사회 담론으로 이해되고 소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도선 풍수법의 이론과 방법을 일러주는 말로서, 도선은 이인에게 “산천의 순종하고 거약하는 세(勢)”에 관한 풍수법을 배웠다는 대목이다. 이 사실은 도선의 풍수가 당시 중국의 선진적인 풍수이론인 형세법의 영향을 받았음을 드러낸다. 도선의 산천순역설은 고려 태조 왕건이 이데올로기적 지역 통제 전략의 논리로 수용 재구성하였다. 왕건은 훈요십조를 통해서 “뭇 사찰들은 모두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따져 보아서 개창하였으니 더는 사찰을 창건하지 마라.”거나 “(호남은) 지세가 배역(背逆)으로 달리니 인심도 그렇다.”라고 산천순역설의 풍수담론을 공간정치적으로 이용하였으니, 그것은 당시에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도선의 풍수담론을 상징적 이데올로기로 바꾸어 정치적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고착시키고자 의도한 것이었다.
셋째, 도선 풍수사상의 사회적 속성을 드러내는 말로서, 옥룡사 도선 비문의 「음기(陰記)」에 도선이 “신인이 모래를 모아 삼국도(三國圖)를 그린 곳에 삼국사(三國寺)를 세웠다.”는 대목이다. 왜 신인은 도선에게 삼국도를 그려 보였고, 도선은 왜 그 장소에 삼국사를 세웠다고 하였을까? 이 대목은 신인에서 도선으로 이어지는 풍수법이 후삼국의 통일을 위한 정치적 지형도로 응용되었다는 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신인과 삼국사’라는 의미 기호는 고려 후기에 ‘성모천왕과 삼암사(三岩寺)’로 대응 변환되어 재구성된다.
지리산 권역에 전승된 문헌 설화에서 도선의 지식인상은, 지리산을 공간적 중심으로 이상사회의 담론을 이끄는 주역으로 서술되었다. 도선은 지리산의 이인에게 풍수를 전수받고 나서, 음양에 정통하고 땅을 묘하게 볼 수 있는 인물로 신비화되었고, 오산 오산사(현 구례 사성암)에 머물면서 천하의 지리에 통달하여 천하의 지리를 그린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지리산과 도선의 상징적 관계는 후대에 와서 지리산 성모천왕과의 연계를 통해서 더욱더 강화되었다. 고려 후기에 도선은 지리산 성모천왕으로부터 부촉 받은 고려 개국의 이데올로그로 이해된 것이다. 박전지(1250~1352)가 쓴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의 내용은 그러한 사실을 설화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지리산의 종교와 문화』 김기주 외 7인 보고사
최원석 편
2013년 5월 31일 초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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