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지리산권 비보사찰과 도선
도선의 풍수담론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회문화사적 과정에서 지리산권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사와 문화경관의 형성과 변화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지리산권역에 산재하는 사찰에만 하더라도 도선의 풍수담론은 입지와 분포, 조영과 관리의 실제적인 측면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찰의 창건 연기나 사회적 기능과 관련된 다양한 설화 문학을 낳음으로써 공간적 담론을 형성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일찍부터 지리산은 정치세력에 주목받은 바 있었다. 그 계기는 일차적으로 지리산이 지니는 지정학, 신앙적인 가치 때문이었다. 지리산은 신라 때부터 오악의 하나로서 중사(中祀)의 격을 지니고 있었고, 화엄사는 신라의 화엄십찰 중의 하나로 지정된 바 있었다. 성모천왕으로 대표되는 지리산의 산악숭배 신앙은 지리산의 상징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으며, 고려 왕실의 정치세력이 지리산의 성모천왕을 고려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였던 것 등의 사실로 보아도 지리산이라는 공간이 정치권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지리산권역에서 도선과 관련된 사찰을 살펴보면, 옥룡사 도선 비문에 전해지는 도선 창건 사찰인 구례의 도선사(장소 미상), 미점사(장소 미상), 옥룡사(광양), 운암사(장소 미상)와 기타 도선계 법손의 사찰로 추정하는 송림사(장소 미상), 현갑사(장소 미상) 외에도 도선과 관련된 사찰로서 지리산 인접권역에서 후대의 문헌이나 사전(寺傳) 또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유적지만 하더라도 모두 40여 개에 이른다. 이들 사찰은 옥룡사 도선 비문에 근거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후대에 도선을 끌어대거나 비보사찰로 추인한 결과로 추정된다.
옥룡사 도선 비문에 기재된 도선이 주석하거나 창건하였다는 몇 개의 사찰 외에, 지리산권역의 수많은 사찰이 도선과 관계되거나 비보사찰로 해석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방 세력의 근거지가 되어온 기존 지방 사원들을 태조나 고려왕조의 지배 권력이 국가의 통제권으로 흡수하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사원의 통제가 고려왕실의 유지를 위한 중요한 문제였기에 사찰들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의 방편이 필요하였음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현실적 이유는 조선조의 불교탄압에 대응하려는 각 사찰의 생존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려시대에 도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사찰일지라도 도선과 관련지어 국가 혹은 고을의 비보사찰로 인정하는 경우는 외부적 정치 요인에 의한 폐찰의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권역 비보사찰들의 구성 형식과 속성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국가 비보소이고 또 하나는 지방 비보소이다. 전자는 국가(중앙권력)을 비보하는 역할을 하는 사찰로서 중앙의 왕권에 편제된 사찰이고, 후자는 고을을 비보하는 역할을 하는 사찰로서 지방의 관료 통치세력이나 정치사회 집단과 맞물려 기능적 가치가 부여된 사찰이다.
국가 비보소는 고려 건국 후에 태조 왕건의 국토 경영 이데올로기로 채택된 도선의 비보사탑설에 준거하여 사찰의 위상과 사회적 의미가 재구성되는 과정을 겪었다. 지리산권역에서는 위에서 언급하였던 비보 삼암사(선암사, 운암사, 용암사) 외에도 화엄사, 선암사 등이 국가 비보소로 언급되었다.
고을 비보소는 순천의 도선암과 향림사, 남원의 선원사와 용담사 등이 있는데, 이들은 지방관료의 통치 질서와 관련되어 사찰의 기능과 가치가 사회적으로 재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사찰의 비보적 사실과 관련한 내용의 문헌적 근거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윤색되어 작성된 사적기류와 읍지류에 인용된 사료로서 신빙성에 한계가 있지만, 시대적으로 지리산권역 사찰들에 영향을 끼친 도선의 풍수담론과 그 영향력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서 가치를 매길 수 있다.
요컨대, 도선의 풍수담론과 관련된 비보사찰은 국가 비보소라는 전국적인 중앙 편제의 구성 형식과 고을 비보소라는 지방 편제의 구성형식이 나타나며 그 두 가지의 풍수담론은 해당 권력집단의 정치사회적 의미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특히 고을 비보소들은 읍기(邑基) 경관의 풍수와 관련되어 고을의 안위와 번영이라는 풍수적 기능을 수행하며, 해당 고을의 정치사회적 지배집단(官權)은 도선의 풍수담론을 통해서 통치 전략과 정치적 의도를 상징적으로 실현하고자 하였다.
『지리산의 종교와 문화』 김기주 외 7인 보고사
최원석 편
2013년 5월 31일 초판 1쇄 펴냄
로그인하시면 댓글 작성 가능합니다. 로그인
Guest (행간격 조절: Enter, Shift + 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