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Url Copy

왜구의 침략과 지리산권 전투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2 01:49:20     78

 

개설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이민족(異民族)들의 침입을 수없이 받아왔다그때마다 국운이 다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잘 막아내었다이민족의 침입은 크게 만주와 중국 민족에 의한 북방으로부터의 침입과 일본 민족에 의한 남방으로부터의 침입을 들 수 있는데지리산에서 항쟁하였던 이민족의 침입은 주로 일본즉 왜구와의 싸움이었다.

한국민족에 있어 특히 일본민족은 숙명적인 존재이다서로 인접하고 있는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일 양국은 역사적으로 선린우호관계보다는 침략대치관계의 특징이 더 컸다이른바 호저 딜레마의 관계였다.

우선 지정학적으로 일본열도는 한국을 북동-남서방향으로 포위하듯 완벽하게 에워싸고 있어 한국의 대양진출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또 정치·군사적으로는 고려 말인 약 1223년경부터 집요하게 침략하기 시작한 끝에거의 700여 년 만인 1910결국 한국의 명운을 끊고 말았다.

통사적(通史的)으로한국은 일본보다 국력이 현저하게 열세인 데다가 비전투적인 국민들의 기질로 인하여 시종일관일본의 피침(被侵), 수탈(收奪대상이 되었다일본인들은 고려 말조선 초까지는 주로 해적집단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노략질해 갔으나, 1592년에는 아예 대규모의 정규군을 보내 국가차원에서 침략(·정 왜란)하여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를 통째로 빼앗아 가고자 하였다이 임정왜란은 실패하였으나, 280여 년 후인 1875년 다시 침입(운양호 사건)하여 1910결국 조선은 일본한테 점령되고 말았다.

기록상 왜구가 우리나라에 처음 출몰하여 해안가 위주로 피해를 입힌 것은 고려 말쯤인 서기 1223년경으로 알려져 있으나, 1350년경부터는 약탈과 살상 등 그 피해가 극심해지기 시작하였다지리산권 내에서 발생하였던 왜구와의 싸움은 크게 시대별로 고려 말임진왜란조선중기조선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주요 싸움은 구체적으로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조선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 12차싸움정유재란 때의 남원성전투와 석주관싸움, 1910년 한일합방(경술국치때 연곡사에서의 고광순 의병장의 항전을 들 수 있다위 순서에 따라 항쟁 사실을 수록하되이 중 임진왜란은 전란기간이 가장 길었던 데다가 이민족에 의한 침략 중 최대의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었으므로 그 개요를 살펴보기로 한다.

16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중국에서는 후일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의 여진족이 흥기하고 있었고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1백여 년간의 전국시대(1490~1590)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하였다이로써일본은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중앙집권세력이 등장하게 되었고군사적으로는 오랜 전쟁을 통하여 실전 경험이 많은 데다총포 등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대규모의 강군을 보유하게 되었다또 경제적으로는 화폐경제가 발달함으로써상공업 촉진과 산업 발전을 가져와 막대한 국가 자본이 축적되었다이로써 일본은 일약 부국강병한 나라가 되었으나통일 전후 과정에서 발생한 무사들의 세력과 불만을 발산시킬 필요가 있게 되었다이에 도요토미는 충만한 국가 에너지를 바탕으로무사들의 세력과 불만을 해외로 방출소모시킴으로써 국내정치를 안정시키고해외 무역로 확보를 위한 방편으로 조선 침략을 구상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이루어졌으나점차 문약으로 빠져 15세기말부터 중앙에서는 정치적 실권을 가진 훈척과 중앙정계로 진출하던 사림(士林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가 발생하였다지방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되어 국가재정은 크게 약화되었고이에 따라 국방은 거의 무방비상태가 되었다이에 대해 이이(李珥)는 국가의 위기를 예상하고남쪽 왜와 북쪽 호(南倭北胡)의 침입을 대비할 수 있도록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선조의 미온적인 반응과 사림 내부의 뒷받침이 없어 실현되지 못하였다조정에서는 왜의 국내정세와 침입 가능성을 파악하고자 통신사 2명을 보냈으나귀국 후 서로 상반되게 보고함에 따라 조정의 견해도 양분되었고일본 침략에 대한 방비책도 논의가 유야무야되었다그러나 그 해 4월 왜의 사신 겐소(玄蘇등이 들어와 1년 후에 명에 쳐들어갈 길을 빌려 달라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청하자조정에서는 이를 거절하고 이 사실을 명에 통보한 다음 하삼도 각 진영에게 무기를 정비하도록 하였다그러나 이순신 장군만 왜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을 뿐 나머지 각 지역에서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을 왜란에 대비하여 민폐를 야기한다는 원성만 일어나는 등 별 성과가 없었다.

반면 토요토미 정권은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규슈시코쿠 주고쿠의 다이묘들의 군대를 재편성하였다도요토미는 그 해 8월 나고야에 지휘본부를 건설하여 수군과 육군 편성을 완료했다총 15만 87백 명의 육군을 1~9번대로 편성하였다그 중 선봉대로서 최전선 투입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주장으로 하는 제1번대 1만 87백 명가토 기요마사의 제2번대 2만 28백 명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번대 1만 1천 명 등 5만 25백 명의 병력을 편성하였다.

출동준비를 완료한 왜군은 드디어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 87백 명이 7백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 섬의 오우라 항을 출항하여 1592년 4월 13(선조 25부산포로 상륙해 오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부산첨사 정발은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동래부사 송상현도 군민과 더불어 항전하였으나 전사하면서 동래성도 함락되었다이어 제4번대 모리5번대 후쿠시마6번대 고바와가사 등이 이끄는 왜군은 후속으로 계속 부산에 상륙하여 약탈과 살육을 하였다그 후에도 계속 후속 부대가 상륙하여 수군 병력 약 9천 명을 합해 조선에 침략한 왜군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명에 이르렀다부산·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하였는데중로는 동래-양산-청도-대구-선산-상주를좌로는 동래 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충주를우로는 김해-성주-지례-김천-추풍령의 길을 택해 경기도로 북상하였다.

부산 함락 4일 후에나 소식을 듣고 당황한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성응길을 좌방어사에 임명해서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조경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우로를 방어하게 했다그리고 김성일을 경상우도 초유사김륵을 좌도 안집사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으며신립을 도순변사로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삼아 방어하도록 하였다그러나 4월 24일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하여 충주로 도피하였고신립은 충주의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역시 패하였다충주가 함락됨에 따라 왜군은 다시 여주-양근-용진나루와 죽산-용인-한강의 진로로 나뉘어 북상하였고관군은 단 한 번도 큰 전투를 치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다조정은 일본군의 서울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김명원을 도원수로 삼았으나충주함락 소식을 듣고는 몽진하기로 결정하였다. 4얼 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은 평양으로 피난하고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왜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20여 일 만인 5얼 2일 한양을 무혈 이성하였다왜군은 부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가토는 함경도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하였다. 5월 12일 조정은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이덕형을 청원사로 파견하는 한편우의정 윤두수와 유성룡의 평양사수’ 결의를 받아들여 윤두수 김명원 이원익에게 평양을 방어하도록 하였다그러나 고니시군이 대동강 연안까지 북상하자 조정은 평양사수를 포기하고 다시 북행하기로 결정하였다이에 6월 11일 선조는 평양을 떠나 숙주-안주-안변을 거쳐 박천에 이르러 군권을 광해군에게 넘겨주고 의주로 향했다그러나 6월 14일 평양까지 함락되었다가토군은 이어 함경도까지 진격 유린하고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이로서 조선은 호남과 평안도 일부 지방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왜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한편개전초인 4월부터 호남영남강원호서 등 각 지방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였다유명한 의병대장으로는 호남의 김천일과 고경명영남의 곽재우와 정인홍충청도의 조헌 등이었는데 모두 각 지방의 명사들이었다이들이 궐기하자 많은 백성들이 호응하여 왜군을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또한 7월부터는 묘향산에서 사산대사 휴정(休靜)이 전국의 각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으로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이에 호응하여 관동에서는 유정(惟政송운대사), 해서에서는 의엄호남에서는 처영충청도에서는 영규 등이 제자들을 이끌고 의병대열에 동참하였다.

한편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연승하여 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결국 피폐해진 양국군은 휴전강화조약을 맺고 철군하였다그러나 임진왜란 강화조약이 결렬되자 도요토미는 정유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재침하였다그러나 전쟁 도중인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자 왜군들은 침략을 중단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왜군 함대 2백여 척을 침몰시켰고이후 나머지 왜군들이 부산을 떠나면서 임·정 왜란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7년간에 걸친 왜란은 동아시아 삼국즉 조선 명(중국(일본)의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우선 명나라와 왜는 정권이 교체되었다명나라는 전쟁 이후에 경제가 쇠퇴하고 중앙 정부에 대한 반란이 계속 일어나 결국 1644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운 청에 의해 멸망하였다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 시절 지방 영주이자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의 권부를 전복한 다음 에도로 수도를 옮겨 에도 막부시대를 열었다.

(전장(戰場)이었던 조선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가 크게 황폐화되었다전국의 귀중한 많은 보물들은 왜군에 의해 약탈되거나 파괴되었으며신분질서는 붕괴되고국가재정은 파탄 났다그러나 조정은 비변사 기능을 강화하는 등 점차 국방 및 행정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특히 왜군의 조총에 대항할 만한 무기가 없었던 조선은 1593년부터 조총을 대량 개발하여 개인 화기인 승자총통을 개발하는 등전란의 피해를 복구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으나전쟁 이후에도 조선왕조는 3백여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1. 황산대첩지

지리산 북부 전북 인월면에서 남원 방향의 운봉읍 중간 지점쯤에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시킨 황산대첩지(荒山大捷址)가 있다.

1380(고려 우왕 6) 8왜구들이 충남 금강 어구인 진포로 침입해 들어오자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심덕부최무선 등을 보내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최무선이 진포 앞 바다에서 화포 공격으로 왜선을 모두 불태워버리자돌아갈 방도가 없게 된 왜구들은 옥천영동황간 등지를 휩쓸고 다니다 우회하여 경상도 함양을 거쳐 남원 운봉지역에 이르며 가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다.

왜장은 나이가 불과 15~6세에 불과한 아지발도(阿只抜都)라는 장수였다그가 이끄는 왜구는 지리산 북쪽으로 접근하여 함양 사근내역(沙近乃驛)에서 박수경배언 등 두 원수와 우군 5백여 명을 죽이고 주변지역을 황폐화시켰다이에 고려 조정은 찬성사 이성계를 도순찰사로찬성사 변안렬을 도체찰사로 임명하고 왕복명우인열박임종홍인계임성미이원계 등 여덟 원수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케 했다.

이성계와 변안렬이 이끄는 토벌군은 남원 인월에 도착하자마자 지형을 숙지한 다음적을 공격하였다명궁인 이성계는 그의 특기인 활을 쏘아 앞장서 나오는 적들을 차례로 쏘아 떨어뜨렸다적장 아지발도는 나이는 어리지만 참으로 무예가 출중하였다워낙 용맹스럽고 날래어 아군들이 무수히 살상되었다이성계는 그 젊은 적장의 무예 솜씨가 아까워 사로잡으려 하였으나여진족 출신 장군 이두란이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 부하들의 희생이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이에 둘은 하는 수 없이 활로 사살키로 하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고 이어 이두란이 화살을 날렸다먼저 날아간 이성계의 화살이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아 맞혀 떨어뜨렸다적장 아지발도가 크게 당황하는 순간바로 뒤따라 날아 온 이두란의 화살이 그의 얼굴을 명중시키자아지발도는 말에서 떨어졌다순식간에 장수가 사살되자왜군들은 기세가 꺾여 아군의 10여 배가 되었던 2천여 명의 왜구들은 모두 살상되고, 70여 명만 남아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이 승전이 바로 황산대첩이다.

그러나 이 패잔병들은 지리산의 문화 유적지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천왕봉의 성모석상을 칼로 자르고 법계사와 세석고원 옆 영신봉 아래 위치한 영신사를 불태웠으며많은 석탑과 돌부처들을 부쉈다.

이성계는 다음 해인 1381년 다시 격전의 현장을 찾아갔다황산대첩 후 1년 만에 이곳을 찾은 이성계는 언덕 한편의 큰 바위벽에 다가가 정으로 글자를 새겼다황산대첩의 뜻 깊은 승전을 기리고자 이성계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황산전투에 참가했던 8명의 원수와 4명의 종사관들의 이름을 새겼다그리고 이 황산대첩으로 이성계는 정치군사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어 후일 조선왕조를 개국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을 갖게 되었다.

황산대첩비는 1577(선조 10)왕명에 따라 건립되었다호조참판 김귀영이 비문을 짓고 송인이 글을 썼다그러나 운봉들판 가운데 왜구와 격전장이었던 황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황산대첩비는 그 후 일정시대즉 일본의 조선반도 강점이 끝나기 직전이었던 1945년 1월 17일 새벽일본인들이 폭파하고 비신의 글씨는 물론이성계가 새겼던 암벽의 각자까지 정으로 쪼아 알아보지 못하도록 파손시켜버렸다그렇게 파괴된 대첩비는 파괴된 상태 그대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었다.

해방 후, 6,25전쟁이 지나도록 황산대첩비는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1957년에 겨우 복구되었다귀부와 이수는 원래의 것 그대로이나 비신은 심하게 파괴되어 오석으로 새로 만들었다또 다음 해인 1958년에는 대첩비 왼쪽에 황산대첩 사적비를 세웠다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원래의 비신은 현재 파비각(破碑閣안에 보존되어 있다.

 

2. 진주성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는 두 차례 있었다. 1592(선조 25) 10(음력일어난 제1차 진주성전투와 이듬해인 1593년 6월 일어난 제2차 진주성전투였다1차 진주성전투에서는 대승하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혔다반면2차 진주성전투는 크게 패배하여 성이 함락되고성내 7만여 민관군으로 이루어진 수성군 전원이 모두 순절하였다.

 

1차 진주성전투

1592년 4월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주력부대가 5월에 서울을 점령하면서 계속 북상할 때일부 부대는 남부지역을 따라 호남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특히 진주성은 경남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 본거지이자호남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침략의 요충지였으나 개전 초기에는 북진하기에 겨를이 없어 공격하지 못하였다이윽고 전력을 가다듬어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왜군은 김해·부산·동래 등지에서 합세한 병력 3만여 명이 같은 해 9월 중순 김해를 떠나 진주로 출발하였다.

적군의 주요 장수는 하세가아 히데카즈·나가오카 다다오키·기무라 식게치·가토 미쓰야스 등이었다이들은 9월 25일 부대를 둘로 나누어 노현과 안민현을 넘어 들어와 경상우병사 류숭인의 조선군을 물리치고, 9월 26일에는 함안을, 9월 27일에는 창원을 점령한 후, 10월 초 진주성 동쪽 15리쯤에 접근하였다.

진주성 수성군은 목사 김시민의 군사가 37백여 명곤양군수 이광악의 군사가 1백여 명으로 총 38백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과 목사 김시민의 보강노력으로 수성군의 방어능력은 종전보다 강화되었으나적이 워낙 대군이어 중과부적인 상황이었다. 10월 4왜군은 3만여 명의 군사로 진주성을 포위하였다성안에는 김시민이 지휘하는 병력과 백성들이 합세하여 결전태세를 갖추었고성 밖에서는 임계영·최경회가 이끄는 전라도 의병 2천여 명과 경상도 의병들이 지원하였다마침내 10월 5일 새벽부터 10월 10일 아침까지 6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왜군은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불 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 쏘며 공격하였고진주성 내 수성군들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백성들을 돌과 뜨거운 물로 대항하였다싸움이 마무리되기 직전 10일 아침성안 적군의 시신을 돌아보던 김시민 목사는 부상당한 왜군이 쏜 유탄을 이마에 맞았다목사가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지휘관이 되어 분전하였다왜군은 드디어 상오 11시쯤 퇴각하기 시작하였다민관군 총 6천여 명의 진주성 내외 수성군이 10여 일간 분전하여 3만여 왜군을 물리친 것이다.

한산대첩·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였던 이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비록 김시민 목사가 전사하였으나왜군은 장수만 3백여 명병사는 1만여 명이 사망하였다이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왜군에게는 현지에서 군량미 등 전쟁물자를 약탈하면서 호남지역으로 진격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그러나 조선군에겐 군사력과 사기가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이후 전국적인 관군정비와 의병봉기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왜군이 평양과 함경도까지 점령하고도 전세를 주도적으로 이끌 수 없었던 이유는진주성 1차싸움에서의 패배가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었을 만큼 임진왜란에서 진주성 대첩이 가졌던 군사적 의미는 매우 중대하였다.

 

2차 진주성전투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하자왜적은 서울까지 밀려 내려오게 되었고, 4월 18일쯤에는 다시 서울을 내주고 부산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월 27일부터 수차례에 걸쳐 진주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17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낸 도요토미의 서신에는 진주성을 공위(攻圍)하여 모조리 토멸한 다음 전라도 경상도를 정복하여 축성하고한성에 집결한 병력을 인수하여 진주성을 점령한 다음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도살하라라는 광기어린 명령을 하였다이에 왜군은 후퇴하면서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여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고자 하였다즉 왜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당시 진행 중이던 강화교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대군을 이끌고 같은 해 6월 진주성으로 진격하였다.

6월 15약 9만 3천여 명에 달하는 왜군이 김해 창원으로부터 수·육로를 통해 대거 접근해 오면서 제2차 진주성전투가 시작되었다적군의 주요 장수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우키타 히데이에·모리 히데모토·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왜군의 주력 부대장들이었다.

그들은 우선 군사를 단성·삼가 및 남강변으로 진주시켜 원군이 이르지 못하도록 진주 일원을 완전히 봉쇄하였다.

한편사현·행주산성 전투에서 분전하고 있던 전남 나주 출신 의병총사령관 김천일은 진주성이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3백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1593년 6월 14관군보다 먼저 진주성에 도착하였다진주성 입성 후도절제가 되어 진주성 내 관군과 의병을 총 지휘하게 된 김천일은 수성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진주성 안에는 최경회(경상우병사황진(충청절도사김준민(거제현령고종후 등이 거느린 35백여 명의 병사와 6~7만여 명의 백성이 있었으나 철저히 무장한 왜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현저히 열세였다.

황진·고득뢰·소제·윤달·정여진 장군 등이 인솔한 전북 남원 출신의 의병들과 윤눌·해안 등이 이끈 구례 화엄사 승병들이 멀리서부터 참전해 왔다그러나 이중으로 포위한 적군의 기세에 눌려, 1차 진주성싸움 때와는 달리 그외 지원군은 거의 없었다또한 명군은 대구에 유정·오유충 남원에 낙상지·송대빈 상주에 왕필적 등이 각각 머물러 있었으나조선 조정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원병을 보내지 않고 방관하였다이에 따라 진주성 수성군은 포위된 이후 성 밖 백리 내에 지원군이 전무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여 외부와의 연락조차 두절되어버렸다.

6월 21적의 선봉이 진주성 동북쪽으로 접근하여 6월 22일부터 드디어 진주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왜군은 망루를 가설하고 성을 내려다보며 조총사격을 하는 한편귀갑차(龜甲車)라는 새로운 병기로 성을 공격하였다이에 성안의 관군과 백성들은 장남과 화살을 쏘고 돌과 쇠붙이끓는 물을 부으며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왜군들을 무찔렀다그러나 28일 큰비가 내려 성의 일부가 허물어지고남원에서 지원 온 충청절도사 황진 장군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는 등 점차 수성군에 위기가 다가왔다마침내 진주성 내 조선군들은 중과부적의 열세 속에서 조총을 집중사격하며 귀갑차 등으로 성을 뚫고 들어오는 왜군들을 막지 못하였다개전 7일 만인 29결국 진주성이 함락되자 지휘관 김천일은 장남 삼건과 함께 나머지 최경회·장윤·고종후 등 지휘관들도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이하 민관군 7만여 명도 전원 순국하면서 임진왜란 최대의 희생자를 내었다그러나 진주성이 함락된 후 전북 장성(*논개의 출생지는 장수임)출신 의기 논개는 왜군들의 승전 주연에 자진 참석적장 게다니를 촉석루 절벽 아래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함께 투신죽음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항전의지를 보였다왜군은 비록 이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이겼으나 병력손실이 많아 호남지역으로는 끝내 진출하지 못하고 말았다.

 

3. 남원성전투

임진왜란과 달리 정유재란은 전라도에 대한 침략이라고 할 만큼 호남지역 점령이 주 목표였다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와 대등한 지위향상을 노렸던 임란 강화조건이 결렬되자그를 명분 삼아 조선을 재침하였다그러나 내심으로는 4년 여간의 오랜 전쟁즉 임진왜란을 치루면서 많은 물적 재정적 손실을 가져온 다이묘(영주)들의 불만해소출병을 통한 반란가능 세력들 사전 제거두 번째 어린 아들에게 대권을 물려줄 수 있는 시간을 버는 데 목적이 있었다도요토미는 임란 때 침탈되지 않아 비교적 큰 전화를 입지 않은 전라도에서 군량무기 등 많은 전쟁물자가 조선군 및 의병들에게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전라도민들의 적극적인 의병활동 때문에 승리하지 못한다고 판단하였다그리하여 정유재란 때에는 식량 등이 풍부한 전라도 지역을 우선 점령하여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그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 진압하기 위하여처음부터 주력부대를 호남지역으로 진격시켰다호남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첫 관문인 남원을 먼저 함락시켜야 하였으며전라도 남부해안으로 상륙한 왜군들이 전라도-충청도를 거쳐 북상하기 위해서는 구례 석주관과 남원 통과가 필수적이었다.

도요토미는 1597년 1월 14고니시와 가토를 선봉장으로 한 14만여 명을 보내 다시 조선을 재침공하였다(정유재란). 그는 재침을 명령하면서 우선 전라도로 진격하여 전라도 사람들을 모조리 도살하도록 지시하였다왜군은 우선 이간책으로 이순신 장군을 축출시켰다왜군 수군은 7월 거제도 앞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 대신 수군통제사가 된 원군을 전사시키며그가 이끄는 조선수군을 궤멸시켰다한편 왜군 육군은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여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충청도 지역으로 북진하였다.

임진왜란 때 호남을 점령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고 판단한 왜군은 우선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하여 우군 5만 4천여 명은 전주성을우키다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한 좌군 5만 68백여 명은 남원성을 공격하였다남원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3백여 명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3천여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으나명나라 구원병을 보낸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8월 7일 마침내 왜군의 선봉부대가 남원 지역에 도착하였고, 12일경에는 왜군의 주력부대가 도착하여 남원성을 포위하였다이에 남원성 내 조선군은 동문에는 명군 양원남문에는 천총·장표서문에는 모승선북문에는 조선군 이복남 장군이 수성군을 지휘하며 방어하였다. 13일부터 왜구의 공격이 개시되어 16일까지 나흘 동안 공방전이 개시되었다. 10배가 넘는 왜군과 맞서 민관군은 합심하여 분전하였으나중과부적으로 16일 남문이 뚫리면서 남원성은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성이 함락되기 직전 명나라 장수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을 통해 달아났다이 싸움에서 접반사 정기원병사 이복남방어사 오응정조방장 김경로별장 신호부사 임현통판 이덕회구레현감 이원춘 등과 주민 6천여 명을 포함한 1만여 장병들이 모두 순절하였다.

치열한 전투 결과피해가 극심하여 성 안에는 겨우 민가 17여 가구만이 남아 있었다 한다나중에 피난에서 돌아온 주민들이 1만여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만인의총이라 하였다. 1612(광해군 4)에는 충열사라 사액하였다. 1675(숙종 원년)남원역 뒤로 이전한 후, 1871(고종 8제단을 설치하고 춘추로 제사를 지내왔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허술한 만인의총(萬人義塚)’ 묘역을 현 위치로 이전 단장한 다음사적 제272호로 지정하였다. 1977년부터 호국선현 유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하여 1979년 사업을 마치고매년 9월 26(음 8월 16만인의사에게 제향을 지내며 충절을 기리고 있다.

 

4. 석주관전투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171번지 및 산65번지 일원 왕시루봉 기슭에 사적 제385호인 고전장(古戰場석주관성(石柱關城)과 사적 제106호인 석주관 칠의사묘가 있다석주관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가 섬진강을 통해 전라도를 비롯한 내륙에 침입하여 약탈해 가기 시작하자 이를 막기 위해 쌓았다칠의사 묘는 정유재란 때인 조선 1597(선조 30왜군들이 충청도로 북상하기 위하여 우선 이곳에 침입하자이 지역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석주관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전원 전사한 칠의사를 모신 묘이다석주관 칠의사 묘에는 큰 비석 두 개가 세워져 있고그 뒤에 7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七義壇)이 있다.

정유재란 때인 1597(선조 20) 8월 6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수만 명의 대병이 이곳에 들이닥치자석주관에서 성을 지키던 구례현감 이원춘은 중과부적이어 하는 수 없이 남원성으로 후퇴명나라 총병 양원과 합세하여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다그러나 8월 16일 남원성전투에서 적군 5만 6천 명의 대공세에 1만여 명의 남원성 방어군과 함께 이원춘도 전사하고 말았다남원성 전투에서 현감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구례현 주민들은 적극 의병을 조직하여 궐기하였다당시 구례지역 선비였던 왕득인은 자기 집 하인 및 마을 사람들과 함께 4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석주관으로 출전진주로부터 올라온 왜군의 후속부대와 싸웠다그러나 대규모의 정규 왜군들과 싸우다 결국 왕득인은 전사하고 말았다그의 아들 왕의성은 부친이 전사하자 몸을 보전하여 대를 이으라는 부친의 생전 유언에도 불구하고 이정익·한호성·양응록·고정철·오종 등과 함께 제2차 의병을 일으켰다이들은 인근 화엄사에 격문을 보내 승병과 군량미를 요청하자당시 화엄사 주지 설홍(雪泓)대사는 군량미 103석과 함께 자신이 직접 승병 153명을 인솔하고 왔다.

석주관은 좁고 가파른 산자락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였으나의병들은 제대로 된 무기가 없어 몽둥이 등으로 적의 총과 맞섰다나무를 베어 길을 막고 절벽에서 바위를 굴려 적의 전진을 막았다이정익·고정철·오종 등은 본관을 고수하고한호성·양응록 등은 매복하기로 하였으며왕의성은 산정에 올라 포진하였다의병들은 가파른 곳에서 돌을 굴리거나 활을 쏘면서 왜군들에 대항하였으나중과부적으로 5의사를 비롯한 수백여 명의 의병과 화엄사 주지를 포함한 화엄사 승병 153명이 모두 순국하였다석주관이 함락되자 왜군들은 화엄사로 침입하여 승병에 대한 보복으로 화엄사를 전소시켰다이때 화엄석경을 파손시키고 나머지 귀한 문화재들은 모두 약탈해 갔으며큰 종은 일본으로 운반해 가기 위하여 섬진강을 건너려다 용두소(龍頭沼)라는 곳에서 빠뜨렸다.

석주관전투 사실은의병들은 전멸하고 인근 주민들은 모두 대피하여 석주관 지역이 텅 빈 상태가 되었다그래서 세상에 전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다 기록조차 없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하고 한동안 잊혀 있었다다행히 1798(정조 22화엄사 대웅전 중수 시 석주관전투를 앞두고 6의사가 화엄사에 보낸 격문과 화엄사 승려가 쓴 정유난일기가 발견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04(순조 4나라에서는 칠의사에게 관직을 추증하는 한편국전(國典)으로 표창하고이원춘 공과 함께 남전사(藍田祠)에 배향하였다그러나 고종 5년 서원철폐령이 내려 위패를 석주관 옛 자리로 옮겼다그 후 일정 때 칠의각과 영모정이 크게 피폐해진 것을 해방 후인 1949년 구례군민들이 정성을 모아 다시 중수하고 사적비를 세웠다비석이 서 있는 칠의단에서 약 40m 아래쪽 능선에는 일본을 향해 누워있는 칠의사 가묘가 있고이 가묘 아래쪽 냇가에는 칠의사를 추모하기 위한 칠의사(七義祠)와 의병들의 넋을 추모하는 영묘정과 숭의각이 있다.

 

5. 연곡사와 고광순 의병장

 

연곡사

연곡사는 서기 543(신라 진흥왕 4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나확실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이후 고려 원종 때 종암 진정선사가 중건하였으며도선국사진각국사현각선사 등 역대 많은 고승들이 수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그리고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대사의 제자였던 청매인오(靑梅印悟: ?~1623)가 의승장이 되어 이 연곡사를 근거지로 하여 3년 여간 왜군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

또 정유재란 때에도 연곡사 서남쪽 왕시루봉 너머 석주관을 지키기 위해 연곡사 승병들이 참가하여 일반 의병들과 함께 합세하여 싸웠으나중과부적으로 전원 순국하고 연곡사 건물도 왜군들에 의해 모두 소실되었다그 후 1627(정조 3동파당(桐坡堂정심선사(定心禪師)가 다시 중건하였다그러나 구한말이었던 1907년 10의병장 고광순이 연곡사를 본거지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면서 연곡사는 일본군에 의해 또 다시 전소되었다.

이렇게 피아골 연곡사는 애국지사들과 함께 번번이 운명을 같이 하였다그 후로 다시 중건하였으나근대에 여·순사건이 일어나 반란군 잔여병들이 피아골로 피신하여 들어오자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1950년경 아군에 의하여 또 다시 불태워졌다.

 

고광순 의병장

고광순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서 본관은 장흥초명은 광욱자는 서백호는 녹천으로 전남 담양군 창평에서 태어났다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고경명 선생의 12세손으로서 연로한 시골 유생이었으나구한말 때 그의 문중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을 일으킴으로써, 1907년경부터 시작된 호남지역 의병활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895년 음력 8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그는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킨 기우만과 합세하여 일본군들을 쳐부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중 선유사(宣諭使신기선의 권고로 북상을 중단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그 후 1905년 11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고광순은 다시 일본군을 쳐부술 것을 결심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순창에 이르렀으나최익현은 이미 패하여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1907년 2월 다시 그는 남원의 향리 양한규와 연합하여 남원을 점령하기로 하고창평 소재 저산(猪山)에 있는 전주이씨 재실에서 의병을 결성하였다.

의병장으로 추대된 고광순은 고제량을 부장고광수를 선봉장고광훈을 좌익장고광채를 우익장으로 삼았고참모에는 박기덕호군장에는 윤영기종사에는 신덕균·조동규를 각각 뽑았다그러나 고광순 의병부대가 남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양한규 의병군이 패퇴하자 남원을 점령하려던 계획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창평으로 돌아온 고광순은 1907년 3(음력), 다시 능주의 양회일장성의 기삼연과 함께 창평·능주·동복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의병봉기를 계획하였다이처럼 그는 60세 노구에 이르도록 오로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10여 년간 고군분투하였다그로 인해 그는 최익현·기삼연과 더불어 1906~1907년 당시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꼽혔다.

그는 1907년 8월 4(음 9월 11월봉산 국수봉을 향해 죽음을 맹세하는 고유제를 지낸 후의병들을 이끌고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로 들어왔다그는 연곡사를 장기항전의 근거지로 삼고 의병들을 훈련시키며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인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글씨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 세웠다고광순 의병부대가 연곡사를 본거지로 삼아 항전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일본군은 연곡사 의병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는 한편전남 담양군 창평에 있는 고광순 의병장의 생가와 가묘를 불태우고이에 저항하는 고의병장의 농아 아들까지 무참히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본군들은 연곡사에 있는 의병들을 공격하기 위하여 광주에 주둔해 있던 1개 중대와 진해에 있었던 1개 소대를 출동시켰다광주에서 출발한 병력은 화개 쌍계사를 거쳐 신흥리에 집결하였고진해에서 출발한 병력은 산청에서 대성골로 내려와 신흥리에서 합류하여 연곡사를 향해 출발하였다이들은 농평재를 넘어 연곡사 뒤편 계곡으로 내려왔다이와 같은 적정을 파악하지 못한 고광순 의병장은 그날따라 예하 부대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거나의병들을 모집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여 주변 각 지역으로 출동시켰다.

9월 11일 새벽일본군은 야간을 틈타 연곡사를 완전히 포위한 후 먼동 틀 무렵 기습공격을 시작하였다이때 연곡사 본영에는 고광순 의병장과 부장 고제량 등 몇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일본군이 연곡사 경내까지 기습하여 온 것을 뒤늦게 안 고광순 의병장은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부대장 고제량에게 피신하여 뒷날을 기약하라고 명령했으나고제량은 주장을 남겨두고 어찌 혼자 살겠느냐며 같이 싸우다 순사하였다이 전투에서 고광순 이하 25명의 의병들이 순국하였다일본군은 전투 종료 후 의병부대의 거점으로 이용된 연곡사를 소각한 후 철수하였다.

참변 소식을 들은 당일구례군 유학자 현곡(玄谷박태현(朴泰鉉)과 소천(小川)은 마을 장정들을 사서 밤에 연곡사로 올라가 고의병장의 시신을 절 옆에 묻은 다음 매천(梅泉황현과 함께 제사를 지내 주었다.

동생 고광훈은 이듬해 봄고의병장의 시신을 고향인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로 옮겨 장례를 지냈다이로써 임진왜란 때 호남지역 의병장이었던 고경명 선생과 그의 두 아들 고중후 고인후 3부자그리고 12세 후손인 고광순 의병장과 형제 등 고의병장의 문중 모두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의병활등을 하다가 참화를 당하였다. 1958년 구례군민은 고광순 의병장이 순절한 연곡사 경내에 순절비를 건립하였고, 1962년 정부에서는 고광순 의병장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지리산이천년』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보고사

2010년 11월 19일 초판 1쇄 펴냄

 


Guest (행간격 조절: Enter, Shift + Enter)

로그인하시면 댓글 작성 가능합니다. 로그인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