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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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대첩
왜군의 만행이 일부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삼남지방 전역에 걸쳐 극에 이르자 우왕은 이성계(李成桂)를 양광 전라 경상도 도순찰사로 삼고,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로 우인열 도길부 박임종 홍인계 임성미 이원계를 원수로 삼아 왜군 토벌에 나서게 했다.
1380년 9월, 왜군이 전라도 남원산성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운봉현(雲峯縣)을 불태우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을 쳤다.
이성계가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이르니, 배극렴을 비롯한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이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나오는 것을 기다려서 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이성계가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면서 적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거늘, 이제 적을 만났는데도 치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고, 드디어 여러 장수의 부서를 정하고서 밝아오는 아침에 운봉을 넘어 왜군과의 거리가 수십 리쯤 되는 황산(荒山) 서북에 이르렀다. 이성계가 이끌었던 부대는 그곳 정산봉(鼎山峯)에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하고 있던 왜군을 무찔러 섬멸하였으니, 이른바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이때 이성계가 몸을 뽑아 쳐들어가니, 왜군의 정예 부대가 대응하지 못하고 거의 다 죽었다. 왜군의 통곡소리가 마치 수만 마리의 소가 우는 것 같았고,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니, 여러 군사가 승승하여 달려 오르며 북을 치고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고려군이 사면으로 공격하여 드디어 크게 깨트리니, 냇물이 온통 붉어져 6~7일간이나 빛이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 못하고, 모두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때 노획한 말이 1천6백여 필이며 병기는 무수하였다고 하니, 왜군의 무리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왜군이 황산대첩 이전에는 고려군보다 10배나 많았는데, 겨우 70여 명만 살아서 달아나니, 이성계가 말하기를, “천하에 적을 전멸시키는 나라는 없다.” 하고, 마침내 끝까지 쫓지 않고 퇴진하여 크게 군악을 올리게 하고 나희(儺戲)를 베푸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1382년부터 왜군은 종전에 비해 규모가 작아졌고, 약탈 횟수도 점차 줄기 시작했는데, 두드러진 것으로는 그 해 10월 남원을 침범하고, 또 왜선 50척이 진포에 들어왔지만 원수 정지(鄭地)가 치니 달아났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경상도와 교주도, 강릉도 지방에는 또 다시 왜군들이 창궐하는 양상을 보였고, 가짜 왜군들까지 약탈을 자행하니 그 폐해가 심했다.
[한국의병사] 상 이태룡 / 푸른솔나무
초판 1쇄 발행 201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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