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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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병사 개요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안으로 한결같이 단결하여 백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를 영토로 하여 주체적인 역사와 빛나는 민족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고조선)에 대하여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전서로 일컬어지는 『산해경』에 이르기를, 군자국(君子國)이 북쪽에 있으니, 관을 쓰고 검을 차며, 짐승을 먹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두 마리의 문호(文虎)를 곁에 두고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민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망하자 배달겨레는 의병을 일으켜서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새로이 세워 찬란한 문화를 이어왔다.
특히 고구려는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여 7백여 년 이어오는 동안, 한·위·수·당의 침략을 차례로 저지하면서 웅건한 고구려의 고대문화를 이룩하였는데, 한반도를 지켜내는 방패 역할을 해왔다. 그 덕택에 마한 백제 신라 가야는 북쪽으로부터의 대규모 외침은 없었으나, 왜국(일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는데, 특히 백제는 왜국의 종주국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고대국가들이 고조선을 뿌리로 하고 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보니, 때로는 적대국이 되기도 하였는데, 7세기 중엽, 군사 외교적으로 위축되었던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렀다.
이후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국권회복(부흥)투쟁이 이어졌지만, 백제는 결국 3년 만에 완전히 나라를 잃게 되었고, 고구려도 국권회복 투쟁에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당나라는 신라를 그들의 계림도독부로 생각하여 속국처럼 취급하려 하자, 당나라와 국운을 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신라는 이른바 ‘여제(麗濟)’의 유민들과 연합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며, 고구려 유민은 발해를 건국하여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여 ‘해동성국’이라는 말을 듣게 되니, 남북국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발해는 거란의 침략으로 나라를 일게 되고, 고조선의 후예가 세운 나라는 신라뿐이었으니, 과거에 비해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신라 말기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서게 되고, 마침내 왕건이 고려를 세워 건국 초부터 북진정책을 국시(國是)로 삼고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과 고조선의 한 구성원이었던 여진족에 시달려야 했고, 13세기 중엽부터는 수십 년간 7차례나 몽골의 대규모 공격으로 인해 결국 원나라 부마국으로 전락한데다가 14세기 중엽부터 북부지방은 홍건적, 남부지방은 왜군의 침략이 수백 차례 계속되었으니, 국토는 황폐화되고, 고려인들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마침내 1380년(우왕 6년) 이성계가 왜군 아지발도가 이끈 군대를 전라도 운봉 황산에서 물리치고, 이어 왕위에 올랐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조선에 와서는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를 정벌하였지만, 나라를 세운 지 2백 년 만에 왜국의 침략으로 인해 국토가 폐허가 되고, 국왕이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으며, 급기야 명나라 원군의 도움과 의병투쟁으로 겨우 나라를 보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30여 년 뒤에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의 침략으로 국왕이 항복하여 군신관계를 맺게 되어 약 3백 년 동안 제후국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열강의 침략으로 병인 신미양요를 겪게 되었으며, 1894년에는 일제가 경복궁을 침범하여 부왜내각을 구성하여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자 동학농민군의 투쟁이 있었고, 이듬해 왕비를 참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든 의병이 봉기하여 의병투쟁을 벌였고, 한일의정서에 이어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일제 통감부 설치를 하려고 하자 ‘국권회복’을 위해 다시 의병투쟁을 격렬하게 펼쳤지만 결국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
[한국의병사] 상 이태룡 / 푸른솔나무
초판 1쇄 발행 2014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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