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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제(山川祭)의 역사와 지리산
산천제(山川祭)의 역사와 지리산
김아네스
1. 산천과 국가제사
산천제(山川祭)는 산천의 신기에게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일정한 의식을 갖추어 비는 것을 뜻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산천을 신령이 깃든 성소로 생각하였다. 산천에 산신(山神)이나 수신(水神), (神龍)이 있다고 믿어서 제사하였다. 여기에서 치제의 대상이 된 산신과 수신은 산악과 하천의 신기로 제한되지 않았다. 악(嶽), 독(瀆), 해(海), 명산(名山), 대천(大川), 성(城), 암(巖), 봉(峯), 강(江), 진(津), 도(渡), 연(淵), 명소(溟所), 분소(噴所), 정(井), 곶(串)과 섬[島]의 신 등 다양한 대상을 포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면보다 높이 솟아오른 산악지형에 산신이 있으며, 물이 모이거나 흐르는 강수, 바다 등에 수신 또는 용신이 깃든 것으로 믿었다. 이러한 다양한 산악, 강수, 바다 등의 신을 숭배하여 치제하던 것을 아울러 산천제라고 하였다.
역사상 나라에서는 산천의 신을 사전에 실어서 치제하였다. 사전(祀典)은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행하는 각종 제사의 종류와 의례에 관한 법식을 가리킨다. 국가의 제사체계 안에 산천제가 포함되었다.
신라에서는 삼산(三山)과 오악(五嶽)을 비롯하여 명산대천을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어 편제하였다. 고려 때에는 명산대천을 나라의 사전에 등재하여서 제사를 받들었다. 조선시대에는 악해독(嶽海瀆)을 중사로 하였고 여러 산천을 소사로 삼았다. 이러한 나라의 삼산, 오악, 악해독, 여러 산천에 대한 제사가 왕조를 넘어서 국가제사로 계속되었다.
그런데 나라에서 치제한 산천의 대상과 범위는 시대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나타났다. 신라에서는 경주 인근의 삼산 즉 나력, 골화, 혈례를 대사로 삼았다. 고려 때에는 개경의 송악(松嶽)을 수위로 산천제를 구성하였다. 조선은 한양의 삼각산을 중심으로 악해독의 제사를 편제하였다. 왕조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나라의 사전에 등재한 산천의 구성에는 변동이 있었다. 산천의 신은 그것이 소재하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믿어졌다. 대체로 각 왕조에서는 수도에 위치한 산천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수도의 진산(鎭山)은 왕실의 안녕을 보장하는 호국신이라는 관념이 있었던 것이다.
나라의 산천제는 원칙적으로 국왕이 주제하였다. 『예기(禮記)』에서는 나라제사의 기본 원리를 밝히었다.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사방(四方)에 제사하고 오사(五祀)에 제사하고 해마다 두루 제사를 지낸다. 제후(諸侯)는 자기 방향에 해당하는 곳에 제사하고 산천에 제사하고 오사에 제사하며 해마다 두루 제사한다. 대부(大夫)는 오사에 제사하고 두루 제사하며 사는 자신의 조상에게 제사한다. ……그가 제사지낼 신이 아닌데 제사하는 것을 음사(陰祀)라고 한다.” 특정한 지역 안의 산천에 대한 제사는 그 영토의 제후만이 주관할 수 있었다. 국왕은 산천제의 주제자로서 통치영역 안의 산천 신을 섬기었다. 나라의 산천제는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상징적 통치 행위였다. 이 점에서 산천제는 정치성과 종교성을 아울러 가졌다.
국왕이 주제하는 산천제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가에서 주요 산천을 선별하여 왕도와 지방의 개별 산천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제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 왕도의 북교(北郊)와 같은 특정 공간에 주요 산천의 신위를 모셔서 치제하는 일이 있었다. 셋째 전국의 산천 신을 아울러 국왕이 보편적 산천 신에 제사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첫째 유형처럼 사전에 개별 산천을 등재하여 치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컨대 지리산에 국왕을 대신한 제관을 파견하여 나라제사를 올리는 것이 첫 번째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 글의 지리산 제사도 역시 첫 번째 유형의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산천제의 역사적 전개 속에서 지리산 산신제의 설행과 그 의미에 관하여 살피고자 한다. 지리산은 한반도 남부지방에 자리한 가장 크고 높은 산이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남쪽의 지리산을 북쪽의 백두산과 대비하여 말하였다. 지리산은 남쪽 경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은 백제, 신라의 남악이었으며 고려를 거쳐서 조선과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사전에 올라있었다. 왕조를 넘어서 나라의 산천제가 계속되었다. 이 점에서 지리산은 산천제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대부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나라제사를 봉행한 산천은 그다지 많지 않다. 왕조를 넘어서 나라제사를 이어간 산천은 지리산을 비롯하여 삼각산, 계룡산, 감악산 등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산의 제사에 관한 검토는 명산대천 제사의 역사와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2. 백제와 신라의 오악(五嶽) 제사 성립과 지리산
예로부터 산천은 숭배의 대상이었다. 고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산천제를 지내었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3월 3일에 하늘과 선천에 치제하였다. 이 날은 왕의 사냥일이기도 하였다. 왕이 사냥을 하여 산돼지와 사슴을 잡아서 희생으로 사용하였다. 산상왕(山上王) 7년에 왕은 아들이 없자 산천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이 달 보름에 천(天)이 왕의 꿈에 나타났다. “내가 너의 소후(小后)에게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 왕이 산천 신에게 후사를 얻기를 기원하였다. 그러자 천신이 응답하였다. 산천 신은 천신과 연결되어 있는 신격으로 믿어졌다. 백제를 보면 고이왕(古爾王) 10년(243)에 큰 제단을 설치하여 천지와 산천을 아울러 치제하였다. 아신왕(阿莘王) 11년(402)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자 왕이 친히 횡악(橫嶽)에 제사하였다. 『삼국유사』 남부여전 백제 조에 따르면 부여에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의 삼산이 있었다. 일산은 부여의 금성산이라 하며, 오산은 부여 염창리의 오석산으로 보이고, 부산은 백마강 맞은편의 부산으로 비정되었다. 도읍 인근의 세 산에 나라제사를 올렸다. 이는 신라의 대사(大祀)에 경주 주변의 삼산을 등재한 것과 같다. 신라는 일찍이 『신당서』 신라 전에 보이듯이 산신에게 즐겨 제사지냈다. 신라의 산천제에 관하여는 일성이사금과 기림이사금 때에 태백산에 치제한 기록이 전한다. 나라의 주요 산악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지리산은 언제부터 나라제사의 대상이 되었을까. 오늘날 지리산은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에 걸쳐 있다. 고대의 지리산은 백제와 가야, 신라의 영토에 속하였다. 통일기 신라의 중사(中祀)에 남악(南嶽) 지리산의 제사가 있었다. 그 이전 시기에도 지리산은 나라제사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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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산으로 북계에는 오산(吳山)이 있으며 동계에는 계람산(鷄藍山)이 있고 그 산의 남쪽에 조조산(組粗山)이 있었다. 남계에는 무오산(霧五山)이 있으며 서계에는 단나산(旦那山)이 있고 그밖에 산단산(山旦山), 예모산(禮母山) 등이 있었다. 이러한 『괄지지』의 기록은 백제 사비시기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산은 나라의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산으로 오악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계(北界)의 오산은 북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 15년(655) 5월에 붉은 색 말이 ‘북악 오합사(烏合寺)’에 들어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북악은 부여의 북쪽에 있는 북계 오산과 같으며 오서악(烏西嶽)으로 추정되었다. 북계를 북악으로 풀이할 때 동계, 남계, 서계, 동악, 남악, 서악으로 볼 수 있다. 백제에서는 동서남북과 중앙을 대표하는 산악을 오악으로 편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운데 남계 무오산은 남악으로 볼 수 있다. 이 무오산이 곧 지리산이었다. 그 위치의 추정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내용이 『한원』 백제조에서 인용한 『괄지지』에 있다 여기에서 기문하(基文河)의 발원지가 국남산(國南山)이라 하였다. 국남산은 나라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앞서 본 나라의 남쪽 경계[國南界]의 산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즉 국남산은 남계의 무오산이라 풀이할 수 있다. 무오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이 기문하였다. 기문하는 곧 섬진강이었다. 섬진강의 발원지는 지리산이다. 따라서 무오산은 곧 지리산이라 할 수 있다.
백제가 무오산 즉 지리산을 남악으로 편제한 것은 언제였을까. 무령왕 때 이후일 것이다. 백제는 무령왕 때에 이르러 지리산 방면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백제가 섬진강 유역의 4현을 차지하였다. 이 때 기문(己汶) 즉 남원과 대사(帶沙) 즉 하동 지역을 백제의 강역으로 삼았다. 그 뒤 이 지역에 지방관을 설치하여 지방 지배를 실시하였다. 지리산이 백제의 영역이 된 뒤부터 지리산권은 남쪽 변방으로 중요성이 더해졌을 것이다. 이때부터 백제는 지리산을 남계의 산, 남악으로 편제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처럼 지리산은 백제의 남악으로 나라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또한 지리산은 가야의 변경이기도 하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영토는 ‘동쪽으로 황산강(黃山江)이며 서남쪽은 창해(滄海)이고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이며 동북쪽은 가야산이라 하였다. 지리산은 가야의 서북쪽 영역의 한계에 해당하는 산이었다. 나라 경계의 방호를 위하여 황산강, 지리산, 가야산에 치제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산의 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라고 하여 숭배의 대상이었다. 최치원이 쓴 석이정전(釋利貞傳)에 따르면 정견모주가 천신에게 감응하여 대가야의 왕과 금관국 왕을 낳았다고 한다. 가야산신은 가야국의 국모로 알려졌다. 또한 세상에서 전하기를 대가야국의 정견왕후가 죽어서 가야산의 산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가야에서는 왕실의 국모 또는 왕후가 죽어서 가야산의 산신 정견천왕이 되었다고 믿었다. 가야에서는 가야산을 성산으로 여기어 치제하였을 것이다. 그 서북쪽 경계에 자리한 지리산에 대한 제사도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살필 수 없다.
통일기 신라는 나라제사에 오악을 편제하였다. 신라의 제사체계에 관하여는 『삼국사기』 제사지 신라 조에서 살필 수 있다. 삼산과 오악 이하의 명산대천을 나누어서 대사, 중사, 소사로 나누었다. 대사에는 나력, 골화, 혈례의 삼산이 있었다. 중사에는 오악과 사진(四鎭), 사해(四海), 사독(四瀆), 그 밖의 산천 6곳이 있었다. 소사에는 지방 각지의 산악 24곳이 실려 있다. 모두 50곳의 명산대천을 사전에 실어서 치제하였다. 지리산은 오악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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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오악을 보면 동악은 토함산(吐含山)이며 남악은 지리산(地理山)이었다. 서악은 계룡산이고 북악은 태백산이며 중악은 부악(父嶽) 즉 공산(公山)이었다. 오악은 신라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위치하였다. 여기에서 동서남북은 통일기 신라의 그것이었다. 세주에 보이는 소재지를 보면 웅천주의 계룡산은 통일 이후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통일 이전에 경주평야를 둘러싼 산악들로 북악, 서악, 남악, 중악, 동악을 삼았다. 그러다가 신라의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을 이룬 뒤에 국토의 사변에 있는 산악으로 새로이 오악을 정하였다.
오악 가운데 지리산은 남악이었다. 세주를 보면 지리산의 제사는 청주(菁州)에서 올렸다. 청주는 신문왕 때 쓰던 지명이었고, 경덕왕 때에는 강주(康州)라 불렀다. 이곳은 지금의 진주를 가리킨다. 진주 지역에 지리산의 신을 모시고 중사를 올리는 제장이 있었다. 진주의 지리산에서 제사하였다면 천왕봉에 그 제장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리산의 천왕봉은 진주와 함양의 경계였다. 아마도 천왕봉에 신사를 설치하여 제사하였거나, 그 아래에서 천왕봉을 향하여 제사하였을 것이다.
신라가 오악을 비롯한 명산대천 제사를 편제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명산대천 제사에 나오는 소재 군현의 명칭을 보면 경덕왕 16년(757)에 군현 명칭을 개칭하기 이전의 것이 대부분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산천의 사전체계가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주, 군, 현은 신문왕 5년(685)에 새로이 정비되었다. 제사지 신라 조의 제사 대상이 사전에 편제된 것은 신문왕 때의 군현체제의 정비와 연관이 있었다. 명산대천의 소재지에 9주의 명칭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신문왕 때 9주를 창설한 뒤에 산천제에 대한 편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산천제의 소재 군현을 보면 성덕왕 34년(735)에 당나라에서 영유를 인정받고 경덕왕 때 군현을 새로 설치한 북쪽 지역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기 신라의 명산대천 제사는 신문왕 5년(685)부터 성덕왕 34년(735) 이전의 어느 때에 정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일을 이룬 뒤 신라는 동서남북의 사변과 중앙을 상징하는 산악을 오악으로 삼았다.
오악은 대사의 삼산이나 소사의 여러 산과 더불어 신라의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었다. 나라에서는 자연의 산악 그 자체가 아니라 산악의 주재자로 믿었던 산신에게 제사하였다. 오악에는 각각 산신이 있었다. 예컨대 동악 토함산의 신은 석탈해로 믿어졌다. 남악인 지리산의 산신은 성모(聖母), 천왕(天王) 또는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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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에서는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용녀와 혼인하여 송악에 살 때 성모 곧 지리산 천왕이 도선을 통하여 송악이 명당임을 알리게 하였다. 지리산의 신은 성모이며 천왕이라 불리었다. 지리산의 주(主)인 성모천왕이 도선에게 은밀히 삼한을 통합할 수 있는 비법을 말하였다. 삼암사를 세우도록 밀촉한 것이다. 두 기록은 고려 때의 것이다. 그렇지만 갑자기 고려에 와서 지리산 신을 성모, 천왕, 성모천왕이라 불렀던 것으로 볼 수 없다. 이미 신라 때부터 지리산 성모천왕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신라 말 고려 초의 사정을 전하는 기록에서 지리산 신이 등장하였을 것이다. 남악에 대한 제사는 지리산 성모천왕을 받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악의 산신에 대한 제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오악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다. 하나는 신라영토의 사방과 중앙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남악 지리산은 신라의 남쪽 경계를 대표하는 산이었다. 이 점은 백제에서 국남산 또는 남계로 무오산 즉 지리산을 설정한 뜻과 다르지 않다. 다른 하나는 오악이 신라에 새로이 편입한 지역의 어떤 세력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지리산의 제장이 진주에 설치된 것을 볼 때 남악은 가야세력을 상징하는 산이라 볼 수 있다. 신라가 주위의 여러 나라들을 흡수하고 정복해 나가는 과정의 산물로 오악이 성립한 것이다.
신라의 오악은 국가의 진호(鎭護)와 연관이 깊었다. 남악은 나라의 남쪽 방면을 대표하는 산이었다. 또한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편입한 가야세력을 상징하는 산이었다. 나라에서는 오악의 제사를 매개로 하여 각 지방의 세력을 신라에 편입하고 의례의 주관자인 국왕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것이었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호국신앙의 반영으로 산신에게 치제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전국 각 방면의 지역 세력을 진압한다는 목적에서 산천제를 지냈다. 이를 통하여 나라의 평안과 사회의 안정을 바랐다. 이러한 의미에서 남악의 지리산 신은 나라의 수호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고대의 지리산은 백제와 신라의 남악으로 치제 대상이었다. 사비도읍기 백제에는 동서남북의 각 방면을 대표하는 산이 있었다. 남계를 대표하는 무오산은 지리산으로 여겨진다. 이를 남계의 산 또는 남악으로 삼아서 중요하게 여겼다. 통일기 신라에서는 오악을 중사에 등재하였다. 지리산은 오악의 하나인 남악이었다. 나라에서는 남악의 제장을 청주 즉 진주에 두었다. 천왕봉에 신사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악은 신라의 남쪽 방면과 옛 가야세력을 상징하는 산악이었다. 나라제사의 대상이었던 지리산의 산신은 성모, 천왕, 성모천왕으로 불리는 인격적 여성 신이었다. 나라에서는 남악 지리산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국가의 남쪽 방면을 진호하고자 하였다.
3. 고려시대 명산대천(名山大川) 제사의 편제와 지리산
고려는 건국 초부터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였다. 태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 산천 숭배를 중요하게 여겼다. 후삼국 전쟁기에 산천 신의 영험에 기대어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나라를 운영하고자 하였다. 그는 훈요(訓要)에서 자신이 “삼한산천(三韓山川)의 음우(陰佑)로 대업을 이루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에 있다고 하면서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 명산, 대천,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팔관회를 통하여 오악과 명산대천의 신기를 받들었다. 이러한 산천 신의 도움으로 건국과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던 것으로 믿었다.
고려시대 산천제의 정비는 성종 때에 국가제사 체계를 개편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성종 원년(982)에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상서에서 “산악에 대한 제사와 성수(星宿)에 대한 초례가 번독하다”라고 비판하였다. 고려 초 여러 산악에 빈번하게 치제한 것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성종은 그 치세 9년(990) 9월에 산천의 제사를 취사하여 정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치세 동안에 나라에서 치제할 대상을 정하고 제장 및 제사의례를 마련하여 사전 체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때에 산천제를 국가제사의 하나로 편성하고 산천 제장을 정비하였다.
고려의 산천제는 송악과 서강을 비롯한 개경의 제장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도읍인 개경과 주변 군현의 여러 명산대천을 국가 제장으로 등록하였다. 그리고 개경을 기준으로 사방의 제장을 정하였다. 예컨대 동해신사(東海神祠)는 개경의 정동쪽 바닷가인 동계 익령현에 설치하였고 남해신사는 개경의 남쪽 전라도 정안현에 있었다. 서해신사는 개경의 서쪽 바닷가 서해도 풍주에 설치하였다. 개경을 중심으로 산천제를 편제하고 국가 제장을 구성하였다. 지리산도 역시 국가 제장의 하나로 사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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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제사에 관하여는 『고려사』 지리지의 남원부(南原府) 조에 실려 있다. 지리산은 신라의 남악으로 중사(中祀)에 올랐으며, 고려에서 이를 따랐다고 하였다. 문맥상 지리산이 고려에서도 중사에 올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사』 예지(禮誌) 길례(吉禮) 편의 중사 조에서는 산천제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예지의 길례 잡사(雜祀) 조에서 몇 몇 산천의 제사에 관한 연대기적 기록을 실었을 따름이다. 고려에서는 산천제를 중사, 소사로 나누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에서도 지리산을 국가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 때와 달리 고려에서는 지리산을 남원부의 산으로 적었다. 산신을 모시고 국가 제사를 올리는 제장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장을 옮긴 까닭은 개경을 중심으로 산천제를 편성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리산은 진주, 함양, 남원 등 여러 군현에 걸쳐 있었다. 이 산은 남방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이었다. 개경을 기준으로 볼 때 그 남쪽 방면은 전라도였다. 이에 따라서 경상도 진주에 있던 지리산 제장을 전라도 남원으로 옮겼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장을 옮긴 배경에는 고려 왕실의 지리산 성모천왕에 대한 인식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지리산 성모천왕은 도선을 통하여 고려 왕조의 개창과 후삼국 통일에 음조하였다. 이때 성모와 고려 왕실을 연결하는 인물로 도선이 등장하였다. 도선은 지리산 구령의 암자에 있으면서 이인(異人)을 만나서 산천 순역(順逆)의 형세를 배웠다. 그 땅은 구례현계(求禮縣界)로 사도촌(沙圖村)이라 하였다. 도선은 전라도 방면 지리산 자락에서 풍수설을 익혔다. 고려 왕실은 도선의 풍수설을 정치이념으로 삼아서 송악 명당설을 내세웠다. 이 때문에 고려에서는 도선이 머물렀던 전라도 방면의 지리산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아닐까 한다. 도선과 지리산을 연관시켜 인식하여 전라도의 지리산을 사전에 올렸던 것이다.
지리산의 신을 모시고 나라제사를 올렸던 곳은 남원의 지리산신사(智異山神祠)이었다. 그 소재와 관련하여 노고단(老姑壇)에 신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신라의 천왕봉에 있었던 제장을 고려에서 노고단 또는 노고단 근처로 옮겼던 것으로 보았다. 남원 방면의 높은 봉우리였던 노고단에 지리산신사를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 명칭을 볼 때 노고단은 지리산 신인 노고를 받드는 제단이었다. 그 지리적 위치를 보면 남원부에 속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노고단은 신의 사묘(祀廟)가 아니라 신단(神壇)이었다. 단은 하늘을 향하여 개방된 구조였다. 뒤이어 살피듯이 고려시대 지리산신사에는 신상을 모시었다. 그 소재와 형태를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신상을 봉안하기에 단은 적합한 시설이 아니었다. 인격적 형상의 신상을 봉안하기에는 사묘가 적합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노고단에 국가제사를 위한 신사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 점에 관하여는 앞으로 좀 더 검토가 이루어져야 하겠다.
지리산의 산신은 성모천왕이라고 불리었다. 고려에서는 산신의 형상을 신상으로 만들었다. 지리산신사에는 지리산 신상을 조성하여 안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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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17년(1187)에 지리산 신상의 머리가 없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지리산 신상은 성모천왕을 인격적 형상으로 만든 것이다. 신상은 지리산 산신의 상징이었다. 이를 통하여 고려시대 신사에 지리산 신상을 안치하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종 때 이규보가 지리산 대왕에게 올린 제문에서는 지리산 신에게 옷 한 벌을 바쳐 작은 성의를 표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의 옷은 신상에게 입힐 수 있는 신복이었을 것이다.
신상의 머리가 사라진 것은 신이 자취를 감춘 것과 같았다. 왕은 이를 중대한 사안으로 받아들이고 중사를 보내어 신상의 머리를 찾도록 하였다. 이 사건에 관하여는 당시 명종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한 권경중의 해석이 전한다. 이 사건은 재이(災異)의 진도로 풀이되었다. 신은 백성의 주인이었다. 지리산 신상의 머리가 사라진 것은 인민이 상을 무시하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러한 징조를 보임으로써 임금이 스스로 반성하고 마음을 고치게 하려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명종 17년은 이의민(李義旼, ?~1196)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하극상의 풍조가 널리 퍼졌고 정치 사회적 난맥으로 정국이 혼란하였다. 지리산 신은 머리를 감추어 왕실과 나라의 혼란을 경고하였던 것이다. 지리산은 남방을 진호하는 큰 산악으로 그 신이 영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적을 보인 것이다.
이제 지리산에 대한 나라제사의 내용과 목적에 관하여 알아보자. 사전에 등재한 명산대천에는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외산제고사(外山祭告使)를 파견하였다. 제고사는 봉명사신으로 향과 축을 받들어 명산대천을 찾아서 제사하였다. 문종 18년(1064)에는 양계(兩界)와 패서도(浿西島)의 경우 감창사와 안찰사가 제고사의 임무를 겸하도록 하였다. 그 밖의 산남(山南) 지방에는 계속하여 제고사를 임명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남부 지방의 모든 도(道) 안찰사도 제고사를 겸하였다. 국왕의 책무는 신을 섬기며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왕을 대신하여 안찰사가 제고사의 임무를 겸하여 신을 받들고 지방을 다스렸다. 이에 따라서 지리산에 대한 봄과 가을의 정기제는 전라도 안찰사가 제고사를 겸하여 받들었을 것이다. 나라에서는 명산대천에 치제하여 산천 신이 나라를 호위하고 재난을 없애 복리를 얻기를 빌었다.
정기적인 제례 이외에도 나라에 재앙이나 재난이 생기면 수시로 명산대천에 제사하였다. 산천 신의 영험으로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태백산제고사(太白山祭告使)가 있었던 것을 보면 때로는 지리산제고사(智異山祭告使)가 파견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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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자번(1237~1306)은 지리산제고사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이 병이 들자 죄인을 석방하고 섬에 유배간 자를 방면하였다. 죄인에게 은혜를 베풀어 병을 고치려 하였다. 이와 더불어 왕은 지리산에 제사하도록 명하였다. 홍자번을 지리산에 보내었다. 명산대천의 제사는 제고사의 임무였다. 이를 전라도 안찰사에게 명하지 않고 홍자번을 보내었다. 그는 지리산제고사로서 특별히 왕의 치병을 빌었던 것이다.
무인집권기인 신종 때 경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정부군은 반민을 진압하면서 여러 신(神)에게 33차례 제사하였다. 산신에 대한 제사를 경주의 동악(東岳) 즉 토함산과 서악(西岳) 즉 선도산, 경주 인근 안강현의 북형산, 해안현의 공산 등에 올렸다. 더불어 지리산에도 치제하였다. 신종 5년(1202) 윤 12월에 지리산 대왕에게 제사하였다. 이규보가 쓴 「지리산대왕 앞에 바치는 기원문」을 보면 통군 상서 김척후의 병이 낫기를 지리산 신에게 기도하였다. 지리산 신의 영험으로 병이 낫는다면 신령의 위력이 더욱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지리산은 반군의 근거지인 경주나 정부군이 머무르던 선주(善州)에서 가까운 산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리산가지 사신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그 까닭은 지리산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아울러 남쪽지역을 진호하는 산으로 영험이 높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고려말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지리산신사에 기도한 일이 있었다. 외적의 침입은 나라의 불행이며 신의 수치로 생각하였다. 지리산 신의 신통력을 통하여 나라의 안녕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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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때 정지(鄭地, 1347~1391)가 왜구와 싸우면서 지리산신사에 기도한 내용이다. 정지가 전함을 이끌고 섬진에 이르렀을 때 고려군은 겁을 먹고 있었고 비까지 내렸다. 그는 사람을 보내서 지리산신사에 기도하였다. 나라의 존망이 이 싸움에 달렸으니, 고려군을 도와서 신의 수치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지리산 신은 영험을 보였다. 비가 그쳤고, 고려의 군사는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정지가 하늘에 머리를 조아리자 바람이 유리하게 불어서 적을 격파하였다. 바람이 유리하게 분 것도 지리산 신과 연관되었던 것으로 믿어졌다. 사람들은 산신이 비와 바람을 조절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지리산 신의 위령(威靈)에 의지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킬 수 있었다.
요컨대 고려의 지리산은 성종 때 나라의 사전(祀典)에 올라서 국가제사의 대상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리산의 남원지역에 신사를 설치하였다. 지리산신사에는 지리산 신의 신상을 받들어 모시었다. 산신 성모천왕을 인격적 형상으로 만들어 섬겼다. 국왕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지리산에 향축을 내려서 나라의 곡식으로 제향을 올렸다. 왕을 대신하여 지리산제고사를 파견하여 치제하였다. 나라제사를 통하여 산신이 나라를 호위하고 재난을 없애서 복리를 얻기를 바랐다. 특히 지리산은 남쪽 지역을 진호하는 큰 산으로 산신이 영험하다고 알려졌다.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치제하여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구하였다. 지리산 산신의 영험으로 정치와 사회의 혼란을 막고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지키고자 하였다.
『지리산의 종교와 문화』 김기주 외 7인 보고사
2013년 5월 31일 초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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