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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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신제의 변화와 역사적 의미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1 01:27:48     79

 

지금까지 지리산에 대한 나라제사의 역사를 알아보았다지리산은 한반도의 남쪽 경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이었다역사적으로 지리산은 백제의 남악이었으며 신라와 고려를 거쳐서 조선과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사전에 등재되었다왕조를 넘어서 나라의 산천제가 계속하여 베풀어졌다.

고대의 지리산은 백제와 신라의 남악이었다사비도읍기 백제에는 동서남북의 각 방면을 대표하는 산이 있었다나라 남계의 무오산이 곧 지리산이었다통일기 신라에서는 지리산을 오악 가운데 남악으로 정하여 중사로 삼았다지리산 제장은 경상도 청주 즉 진주에 설치하였다통일신라는 영토를 확장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새로이 편입한 세력을 상징하는 산을 오악으로 삼았다남악 지리산은 통일신라의 남쪽 방면을 대표하면서 옛 가야세력을 상징하는 산악이었다오악의 제사를 통하여 각 방면을 진호하여 그것이 상징하는 지방세력을 신라에 편입하고자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명산대천을 선별하여 사전에 실었다지리산은 전라도의 명산으로 나라제사의 대상이 되었다고려에서는 앞선 신라와 달리 명산대천의 등급을 나누어 변사하지 않았다개경의 송악서강을 비롯한 각 지방의 영험한 산천 신을 사전에 등재하였다지리산의 신을 모시는 신사는 전라도 남원부에 설치하였다그 신은 성모천왕성모천왕이라 불리었는데 신상을 신사에 모시었다국왕은 해마다 봄과 가을에 지리산에 향축을 내리어 제향을 올리었다왕을 대신하여 제고사를 파견하여 치제하도록 하였다정기적으로 나라 제사를 지낸 것은 산신이 나라를 호위하고 재난을 없애서 복리를 얻기를 바랐다비상시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면 산신에게 영험을 빌었다지리산 신의 위령으로 정치와 사회의 혼란을 막아서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바랐다.

조선시대 지리산은 4악의 하나로 중사에 올랐다조선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서 사전체계를 수립하였다산천의 등급을 나누어 중사와 소사 및 수령제로 편제하였고 국왕이 산천제를 독점하고자 하였으며 산천 신을 지기로 파악하였다지리산은 중사의 4악 가운데 남악이었다지리산신사는 전라도 남원부 남쪽 소아리에 설치하였고 여기에 지리산지신이라고 쓴 신패를 봉안하였다해마다 봄과 가을 중월로 택일하여 제일을 삼았고국왕을 대신하여 전라도 관찰사가 지리산에 치제하였다산천의 신은 비구름을 일으켜 오곡을 적셔서 백성에게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이처럼 백성에게 공덕이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올려서 제사하였다수재와 한재전염병 등 재난이 있을 때에도 국행제를 올려서 민생의 안정을 빌었다지리산에 대한 나라제사는 백성에게 은택을 베푼 신의 공덕에 보답하는 의미가 있었다.

대한제국이 성립하면서 지리산은 오악 중 남악으로 다시 편성되었다황제국 체제의 성립으로 국가제사를 개편하면서 오악오진사해사독을 새로이 정하였다지리산은 제국의 남쪽 방면을 대표하는 악으로 자리매김하였다일제는 고종을 폐위시킨 뒤 오악의 제사를 비롯한 국행제를 폐지하였다. 1908년에 나라의 산천에 대한 제사가 사라졌고 국제신사의 기능도 정지되었다지리산신사에서 설행하던 지리산에 대한 나라제사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산천제의 구성에는 변동이 나타났다영토의 범위와 수도의 변화에 따라서 사전에 등재한 개별 명산대천이 달라졌다사비도읍기 백제는 부여 인근의 삼산을 중시하였다통일신라는 경주의 인근 삼산을 대사로 삼았다고려에서는 개경의 송악을 수위로 산천제를 구성하였다조선에서는 한양의 삼각산을 중요하게 여겼다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은 계속하여 나라제사의 대상이었다신라는 50곳의 명산대천에 제사하였다이 가운데 고려 왕조에서 계속하여 치제한 산천은 25곳 내외이었다이 가운데 다시 조선에서 국행제를 지낸 산악은 삼각산감악산계룡산과 지리산 등에 지나지 않았다이는 지리산이 한반도 남부지방을 상징하는 가장 크고 높은 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리산의 신을 모시고 제사를 설행하는 제장에는 변화가 나타났다신라에서는 경상도 방면의 지리산을 나라의 남쪽으로 보았다경상도 진주에 제장을 설치하였다고려시대에는 개경을 기준으로 삼아서 전라도 남원부에서 지리산에 제사하였다이는 신라 때 경상도 동래의 바닷가에 있었던 남해 신의 제장을 고려 때에 전라도 정안현으로 옮긴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조선시대에 이르면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그 남쪽을 전라도 방면으로 설정한 점은 다르지 않다지리산신사는 남원부의 남쪽 지금은 구례에 설치하였다.

지리산신사에 모신 신에 대한 관념도 시대에 따라 변하였다지리산신은 성모라 불리는 여성 신으로 믿어졌다혹은 천왕이나 성모천왕으로도 불리었다성모와 천왕 가운데 어떤 칭호가 더 오랜 역사를 가졌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천왕은 산신을 천신과 연결된 신격으로 믿었던 고대인의 생각을 반영하며 성모는 여성 산신의 존칭으로 쓰였다고려시대까지 사람들은 지리산의 신을 인격화하여 신앙하였다그리하여 신사에는 성모천왕의 인격적 형상을 신상으로 조성하여 안치하였다그러다가 조선시대에는 산천 신을 인격화하여 신앙하는 것을 금하였다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산천 신을 영령의 기가 모인 지기로 파악하였다지리산 신의 이름은 성모천왕이 아니라 지리산의 신이라고 하였다이에 따라 지리산신사에 지리산지신이라 쓴 위패를 봉안하였다.

나라의 산천제가 가지는 기능에도 변화가 있었다신라에서는 제사를 매개로 지리산이 소재한 지방을 진호하여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이루기를 바랐다고려시대에도 지리산의 영험을 믿어서 치제함으로써 산신이 나라를 호위하고 재난을 없애서 복리를 얻고자 하였다이때까지 산천 신은 지역을 수호하는 신으로 믿어졌다그 제사의 기능은 신의 위엄과 영험으로 나라의 평안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조선시대에는 산천 신을 제사하여 신이 비구름을 일으키고 재난을 물리쳐서 민생의 안정을 돕는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았다이러한 신의 공덕에 보답하는 의미로 산천제를 설행하였다.

이제까지 지리산에 대한 나라제사의 역사와 시대별 변화를 더듬어 보았다지리산에 대한 나라제사는 산천 신에 대한 국가적 숭배의례의 지속적 봉행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지리산 산신제는 산신의 영험과 공덕을 기리는 나라의 종교의례이었다국왕은 지리산을 비롯한 나라의 주요 명산대천에 제례를 올려서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바랐다또한 지리산에 대한 국행제는 국왕의 통치권이 미치는 남쪽지방의 영토를 확인하는 정치의례이었다악해독과 명산대천은 국왕이 통치하는 영역의 각 방면을 상징하였다여기에 국가제사를 지냄으로써 국왕은 자신의 영토를 확인하여 그 권력을 드러내고자 하였다이처럼 지리산 제사는 국가적 차원의 숭배의례로 정치성과 종교성을 아울러 가졌다산천에 대한 국가 숭배의례로서 지리산 제사는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고대부터 고려조선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왕조를 넘어서 지리산 국행제의 역사가 이어졌다숭배의례를 지속적으로 봉행하면서 지리산은 나라를 대표하는 영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리산은 나라뿐만 아니라 고을제사마을제사개인적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였다왕실에서부터 민간에까지 지리산 신의 영험을 바라는 제사가 다양하게 베풀어졌다민간의 산천제는 성모천왕을 받들어 치성을 드리고 굿을 노는 무교식 제사가 일반적이었다민간에는 일찍부터 지리산 성모를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 하거나 팔도무당의 시조라고 하는 설 등이 널리 퍼져 있었다영호남의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성모의 초월적 신통력에 빌었다개인의 복리를 바라는 뜻에서였다이러한 지리산 산신제의 전통은 나라제사가 폐지된 이후에도 면면히 이어졌다앞으로 민간의 지리산 제사에 관하여는 별고를 마련하여 검토할 예정이다.

 

『지리산의 종교와 문화』 김기주 외 7인 보고사

2013년 5월 31일 초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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