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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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악(嶽) 제사의 정비와 지리산
조선 초 태조는 산천 신에게 봉작하였다. 태조 2년(1393) 정월과 그 4년(1395) 12월에 나라의 대표적인 명산대천과 성황・해도의 신에 대한 봉작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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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지리산을 호국백(護國伯)으로 봉하였다. 송악성황을 진국공에 봉하였고 화령, 안변, 안산의 성황을 계국백이라 하였다. 태조 2년(1393)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기 이전으로 송악의 성황을 중요하게 여겼다. 왕실과 연관이 깊은 지역의 성황에 봉호한 것이다. 지방의 명산으로는 지리산, 무등산, 금성산, 계룡산, 감악, 삼각산, 백악 등을 호국백으로 삼았다. 그 밖의 명산대천 신에게는 호국지신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뒤 태조 4년(1395)에 한양의 산을 새로이 봉하였다. 백악산을 진국백에 봉하고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삼았다. 산천 신에게 대왕, 공, 백 등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러한 산천 신에 대한 봉작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것이었다. 이는 신을 의인화하여 작위를 봉하는 것으로 신사에 신상을 봉안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서 나라에서 산천의 봉작제도를 폐지하였다. 앞선 고려 말 공민왕 19년(1390)에 명나라 황제가 사신을 통하여 조서를 보내어 산천의 봉호를 폐지하도록 하였다. 이 조서에 따르면 산천은 상제의 명을 받는 것일뿐 나라가 봉호를 더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였다. 산천 신에 대한 봉ㅎ를 제거하고 신의 칭호로 다만 산수의 본래 이름을 쓰게 하였다. 하지만 고려 때에는 이를 시행하지 못하였다. 산천의 신을 인격화하여 인식하는 전통이 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산천에 대한 봉호가 폐지되었다. 산천신은 이전의 봉호 대신에 산수의 본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초 산천제의 편제와 시행은 커다란 변화를 맞았다.
조선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서 사전(祀典) 체계를 수립하면서 산천제의 등급을 나누었다. 국왕은 나라 안 산천에 대한 제사권을 가졌다. 유교적 명분 이념에 따르면 경・대부・사・서인이 산천의 신에게 제사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까지 이러한 명분론은 사회적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교적 제사체계의 편성이 이루어졌으며 산천제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 초 국왕을 중심으로 한 산천제의 정비는 태종대, 세종대, 성종대를 거치면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지리산을 비롯한 산악에 대한 국가제사를 정하였다. 산천 신에 대한 제사의 체계화가 이루어졌다.
태종 14년(1414) 8월에 예조에서는 산천의 등제를 나누도록 하였다. 악・해・독은 중사로 하였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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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지리산은 경성의 삼각산(三角山), 경기의 송악(松嶽山)산, 영길도의 비백산(鼻白山)과 더불어 악으로 중사가 되었다. 해신의 제사로는 동해, 남해, 서해의 제사가 있었으며 독의 제사는 한강, 덕진, 웅진, 가야진, 압록강, 평양강 등으로 정하였다. 조선의 중사와 소사는 대체로 고려 때에 나라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고려의 산천제를 계승하여 조선 초 국행제를 올리는 중사, 소사와 고을의 수령이 치제하는 소재관제사로 나뉘었다. 악의 제사에 보이는 삼각산, 송악산, 배백산, 지리산은 고려시대 나라의 산천 제장이었다. 앞선 신라 때에는 5악을 두었는데 조선은 4악을 설정하는 데 그쳤다. 아마도 유교적 명분이념에 따라서 5악은 천자국 체제에 합당한 제사이기 때문에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4악만을 정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은 중사인 4악의 제사 가운데 하나로 편제되었다. 지리산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연관하여 정치적 의미가 깊은 명산이었다. 고려말 이성계는 지리산 운봉을 넘어 황산(荒山) 서남쪽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명망을 높이고 신왕조의 개창을 준비하였다. 또한 그가 왕위에 오르기에 앞서서 이씨 왕조의 개창을 예언하는 이서(異書)를 지리산 바위에서 얻었다. 지리산은 예언서를 간직한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더불어 악의 방위를 살피면 중앙에 삼각산, 남쪽에 지리산, 서쪽에 송악산, 북쪽에 비백산이 있었다. 신라 때에 뒤이어 지리산은 다시 남악으로 중사에 올랐다.
이어서 태종 14년(1414) 9월에는 예조에서 산천에 관한 제사의주(祭祀儀註)를 올렸다. 다음해 4월에는 춘추의 중월에 전국에서 산천제를 설행하게 하였다. 태종 16년(1416) 9월 예조는 악해독과 산천에 제사하는 관원을 정하도록 하였다. 중사인 지리산에는 전라도의 감사가 섭사(攝祀)하게 되었다. 태종 16년(1416) 9월에 전라도 도관찰사 권진이 외산(外山)의 초제(初祭)에 향축을 받들고 갔다. 관찰사는 국왕을 대신하여 지리산에 제사하였다. 국왕 중심의 산천제 정비로 조선의 지리산에 대한 국가제사가 이루어졌다.
세종 때에는 산천단묘순심별감을 파견하여 전국의 산천 제장을 조사하였다. 그 활동을 바탕으로 악해독과 산천의 제장과 신패를 상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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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부에 지리산 사묘를 정하고 신패에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이라고 썼다. 당시 전국 산천의 단묘 가운에 산 위에 묘를 세워서 그 산을 밟고서 산신에게 제사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지리산의 신사는 남원부 남쪽 소아리(小兒里: 지금의 구례군 광의면)에 있었다. 그 이전부터 지리산신사가 소아리에 위치하였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다가 조선 초 소아리로 옮겼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만약 다른 곳에 위치하였던 신사를 옮겼다면, 산 위쪽에 사묘가 있던 것을 뒤에 산 아래쪽 소아리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초기의 지리산신사는 산 아래쪽에 있어서 이곳에서 지리산을 우러르며 나라제사를 설행하였다.
세종 때에는 단묘와 함께 신패 제도를 정하였다. 신패의 설치는 신상을 철거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졌다. 고려 때까지 지리산신사에는 신상을 모시었다. 신상을 받드는 것은 신을 인격적 형상으로 신앙하는 일과 연관이 깊었다. 고려 말 조선 초 산천 신을 인격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대두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고려 말 공민왕대 명나라 태조는 산천 신의 칭호는 산수의 원래 이름을 쓰도록 하였다. 명의 조서에서 악진해독은 영령의 기가 모여서 신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산에 서려있는 영령의 기(氣)를 산신으로 보았다. 산천 신을 인격화한 신이 아니라 지기(地祇)로 인식하였다. 산신의 인격화를 부정한 명나라 예제를 수용하고 산천 신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조선 초 국제 신사에서는 신상을 없애고 신패를 설치하였다. 지리산신사에는 신상 대신 ‘지리산지신’이라고 쓴 신패를 모시었다.
세종 20년(1438) 무렵에 이르면 국가 제례에 대한 정비가 일단락되었다. 산천제의 정비는 『세종실록』 오례의를 거쳐서 성종 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완결되었다. 여기에 악해독에 대한 제향(祭享)의식과 절차를 규정하였다. 제향일과 재계, 진설, 희생의 준비를 비롯하여 행례 절차로 전폐, 작헌, 송신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지리산과 같은 악의 제사는 해마다 봄과 가을 중월의 상순으로 택일하여 올렸다.
또한 산천 신은 수재(水災), 한재(旱災), 여역(癘疫)의 재난이 있을 때 비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뭄이 심해지면 악해독과 산천의 신을 대상으로 비를 빌었다. 산천 신이 비구름을 일으켜 곡식을 적시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으로 믿었다. 중종 11년(1516) 4월 무진일에 가뭄으로 8도 악해독의 신에게 비를 빌도록 하였다.
산천제는 민생의 안정에 기여하는 산천 신의 공덕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악의 하나였던 지리산에도 기우제를 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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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3년(1645)에는 전라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나라에서는 전라도 지리산, 금성산 남해당(南海堂)에 향과 축을 보내어 여제를 지냈다. 지리산과 남해는 중사에 올랐고, 금성산은 소사의 하나였다. 여제를 통하여 전염병을 물리치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기를 바랐다. 나라의 재난이나 재앙을 물리치기 위하여 치제하여 산천신이 공덕과 은혜를 베풀기를 바랐다. 그 밖에도 성종의 병이 심하였을 때 종묘(宗廟), 사직(社稷), 소격서(昭格署) 등과 더불어 외방 산천에 기도하게 하였다. 지리산에는 좌랑 이희락(李希洛)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지리산에 대한 제사를 규정에 맞추어 올리지 않는 일이 나타났다. 현종 원년(1660) 7월에 이경석이 차자를 올려서 지리산 제사의 헌관으로 교생(校生)이 나셨던 점을 비판하였다. 지리산에 올리는 제사에 지방관이 나아가지 않고 교생에게 대행하게 하였던 것이다. 같은 현종 9년(1668) 9월에는 구례현감 이지행이 남원 지리산 추례제(秋例祭)에 헌관으로 차출되었는데 참여하지 않아서 파출되었다. 남원읍지인 『용성지(龍城誌)』를 보면 지리산 신사의 국행제에서 헌관은 당상관이 맡았으며, 대축(大祝)은 수령으로 삼았고, 집사(執事)는 생원・진사・교생 가운데 맡은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관료들이 국가제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제관으로 차정되는 일을 꺼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숙종 때에 오면 남원의 지리산신사를 개수하였다. 숙종 3년(1667)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전우(殿宇)를 수리하였다. 이전까지 신사에는 세칸의 전우가 있었다. 남원부사는 신사를 수리하고 부속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에 따라 지리산신사는 전우(殿宇)와 신문(神門), 성생청(省牲廳), 객사(客舍), 유생청儒生廳, 지응청(支應廳), 마구, 대문 등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개수한 지리산신사에서 국행제를 봉행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조선에서는 지리산을 악(嶽)의 하나로 정하고 중사에 올렸다. 그리고 남원부 남쪽 소아리에 지리산신사를 정하였다. 신사 안에 ‘지리산지신’이라고 쓴 신패를 만들어 보셨다. 신사에 모신 산신은 산악에 서린 영령의 기(氣)가 모여서 된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지리산신사에서는 봄과 가을 중월에 전라도 관찰사가 국왕을 대신하여 중사를 올렸다. 제사를 통하여 지리산의 신이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기를 바랐다. 그리고 신이 백성에게 베푼 은혜와 공덕에 보답하고자 치제하였다.
1897년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성립하였다. 고종은 황제국 체제에 맞는 국가의례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경운궁 앞에 환구단(圜丘壇)을 세워서 하늘에 제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었다. 고종은 광무 5년(1901)에 오악과 오진, 사해와 사독을 정하여 사전을 갖추려는 뜻을 밝혔다. 장례원(掌禮院)에서 널리 상고하여 산천의 제사를 지낼 곳을 정하게 하였다.
고종 황제는 광무 7년(1903, 고종 40) 3월 23일에 장례원의 주본에 의하여 오악, 오진, 사해, 사독으로 봉행할 산천을 정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에서 새로이 오악을 제정하였다. 오악 가운데 중악은 삼각산이고, 동악은 금강산이며, 남악은 지리산, 서악은 묘향산, 북악은 백두산이었다. 조선에서 제사하던 악은 삼각산, 송악산, 지리산, 비백산이었다. 이를 오악 체제로 바꾸었다. 삼각산과 지리산만이 계속하여 악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지리산은 남악으로 다시 대한제국의 사전에 올랐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일제는 융희 2년(1908, 순종 2)에 국행제를 폐지하였다. 이로써 남악 지리산에 대한 나라의 제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리산의 종교와 문화』 김기주 외 7인 보고사
2013년 5월 31일 초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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