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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최치원 3
최치원의 사회사상과 정치이념
경문왕대 이후 유학지식인은 선사비명을 지으면서 비명에 유교적 표현을 가미했다. 그것은 경문왕계 왕실이 유학진흥책을 통해 왕권강화를 도모했던 노력을 은근히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적어도 경문왕대 이후 신라사회에는 유교적 정치이념을 추구할 만한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최치원은 위난의 시기일수록 군주는 공적인 경로를 통해 옳고 바른 신하를 선발하여 재능에 따라 임무를 부여하고, 또한 어진 신하의 등용과 출세를 원활히 하기 위해 전형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가능해지면,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어진 신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전형의 기준은 존왕적 사고에 입각한 효·충의 유교적 실천덕목을 토대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인재등용론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정치체제는 물론 사회질서의 확립을 유념한 것이다. 최치원은 재당시절에 고변의 글을 대찬(代撰)하면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정치체제의 구축과 군왕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의 확립을 늘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유학지식인을 중심으로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국가제체의 운영을 모색했다. 때문에 우선 국학을 통한 유학교육의 강화를 제시했을 듯하다. 경문왕과 헌강왕이 자주 국학에 행차했던 만큼, 이러한 방안은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유학지식인들이 대개 국왕측근 관료로 임명되었고, 진성왕대에 들어서는 진골귀족의 왕권에 대한 거센 도전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유학적 소양을 기준으로 관료의 임용과 승진을 결정하는 방안도 모색되었을 것이다. 헌강왕이 문신들에게 시 창작을 독려한 것은 유학습업을 바탕으로 문신의 고과를 매기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을 위호하면서 유학지식인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6두품 중심의 국가체제 운영방안을 시무책에 담았다.
한편으로 최치원은 지방사회의 동요를 막기 위한 방안도 모색했다. 우선 지방민의 유망을 방지하는 제도적 보완장치를 구상했을 법하다. 지방민의 봉기가 가혹한 조세수취로 일어났으므로, 수취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지방제도에 대한 개편도 거론되었을 듯하다.
다음으로 『계원필경집』에서 반적진압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으므로, 군왕의 교화로 설득되지 않는 반국가 세력에 대한 철저한 응징방안도 제시되었을 것이다. 다만 지방사회에 대한 위무책은 어디까지나 왕실을 중심으로 한 사회안정책이었기에, 지방을 거점으로 독자적 활동을 추구했던 호족세력과 결연을 꾀하는 방안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최치원의 시무책은 왕실의 전제화를 지지하고 진골귀족의 정치 사회적 위상을 견제하면서 신라사회를 개혁하려는 염원을 담았다. 결국 최치원의 사회개혁안은 경문왕 이전부터 6두품 유학지식인이 추구한 유교적 정치이념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시무책은 경문왕계 왕실이 추구한 왕권강화의 이념적 토대였기에, 왕권이 점점 약화되었던 진성왕대에는 이미 시행될 수 없었다. 또한 진골귀족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호족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하여 신라국가의 안위가 더 이상 보장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시행되기도 버거웠다. 더욱이 6두품 계층의 신분적 위상만을 강조한 것이어서, 유망농민들이 크게 활동했던 당시의 신라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능하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를 읽는 최치원의 현실인식은 어디까지나 신라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다만 최치원이 추구한 사회개혁안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구현하려는 6두품 유학지식인의 공통된 인식에서 제시되었기 때문에, 6두품 출신 유학지식인들이 고려사회에서 활동하면서 고려국가의 체제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해인사는 신라 하대 화엄종의 종찰이자, 의상계 화엄종 사찰이었다.
의상은 해동의 각모(覺母)로 한 나라를 이끌어 교학이 십산에 두루 미쳤다. 화엄십산은 미리사·화엄사·부석사·해인사·보광사·보원사·갑사·화산사·범어사·옥천사·국신사·청담사 등 모두 12곳이었다. 최치원은 의상이 가르침을 계승한 화엄대학을 나열하면서 해인사가 의상계 화엄종 사찰임을 분명히 했다.
의상의 화엄교학은 연기된 여러 법상의 차별을 인정하고 그것이 원칙적인 하나 속에 모아지는 성기론적 경향을 띠어서 중앙집권적인 전제주의와 어울리는 면을 가졌다. 의상 추모결사는 법제자인 성기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성기는 바로 의상 화엄사상의 성기론적 성격을 대변하는 승려였다. 최치원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권강화를 추구했으므로 의상 화엄사상에 호감을 가졌다.
최치원은 해인사는 물론 불국사 황복사 등의 의상계 화엄사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의상의 융섭적 화엄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최치원은 진성왕대에 쇠락해진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가 복원되고, 진성왕의 훙거 이후에도 신라국가가 여전히 유지되기를 바라는 의지를 화엄승전에 담고자 했다. 때문에 원칙적인 ‘하나’ 속에 삼라만상을 융섭하는 의상의 성기론적 화엄사상을 「부석존자전」을 통해서 부각했다. 이것은 6두품 유학지식인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이 구현되기를 희망했던 자신의 이상과도 부합되었다.
당시 신라사회는 점차 혼란해졌다. 최치원은 해인사에서 혼란한 사회상을 지켜보았다. 때문에 원칙적인 융섭사상을 강조하더라도 당시 사회에 나타난 여러 다양한 모습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그는 유식사상과 함께 선종사상을 이해했다.
그는 화엄사상 내에 법상종사상을 포함하면서 전체적으로 유식의 논리를 뛰어넘는 통합사상을 추구했다.
최치원은 법장의 교판론을 설명하면서 ‘정혜에 머무는 것은 결국 마음이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선정은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이고, 지혜는 이와 사를 관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과 교를 의미한다. 최치원은 선과 교가 시대에 따라 각각 강조되지만, 그것이 추구하는 바는 결국 하나라고 인식했다. 그는 법장의 화엄사상을 표현하면서 교와 선을 함께 이해하려고 했다. 곧 의상의 융섭적인 화엄사상을 강조하면서도 법장 화엄사상과 관련된 유식사상과 선종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유식사상은 현상계(現象界), 곧 현실에 대한 인식을 중시한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때에 지방호족들은 일정지역을 거점으로 성장하며 점차 신라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했다. 최치원은 화엄사상을 통해 왕실의 안정을 희구하면서도 유식사상을 통해 독자적 지배를 꾀했던 호족들을 파악하려고 했다.
최치원은 도교사상에 대한 이해를 가졌다. 그는 고변 휘하의 막료를 지내면서 도교관련 글을 지었다. 고변은 이미 도교에 상당한 조예를 가졌으므로, 고변을 통해서 도교를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그것은 신선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고변이 신선을 추구한 장량(張良)에 비유되었기 때문이다.
고변은 유교를 바탕으로 장량의 선격을 이루었기 때문에, 최치원의 도교인식은 유교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은 여러 글을 찬술했다. 그는 저술에 유교·불교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그대로 반영했고 도교에 대한 입장도 제시했다. 특히 도교에 대해서는 심신의 수련을 통한 신선도의 추구를 강조했다.
제심(齊心)에 게으르지 않고서 진인(眞人)을 알현하려 함은 신선도를 닦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다. 사람을 제도하려는 마음의 수련은 신선을 추구함보다 우선된다. 최치원은 재당시절에 신선도를 이해하면서, 그것이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으로 기능해야 함을 지적했다. 자연히 귀국 후 그의 도교사상은 신선도를 중시하면서 외형보다 내면의 수련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립될 소지를 가졌다. 그것은 금단도의 비판과 도교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특히 「보덕전」의 찬술에 반영되었다.
그는 금단에 의한 신선술을 배제하고 도교사상 자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서 노자와 『도덕경』에 특별히 유념하는 경향을 지녔다. 신라사회에서 『도덕경』은 이미 유교사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이해되었다. 자연히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 역시 유교적 사고와 연관하여 『도덕경』을 중시하는 도교사상을 가지면서 그것이 불교와 관련됨을 유념했다.
신라사회에서 노장사상은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은일(隱逸)을 꾀하는 경향을 지녔다. 특히 산수에 머물러 명리(名利)를 버리고 도를 추구함은 신라고유의 신선사상과 연결되면서 심신의 수련을 통해 득선을 구하는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장량은 선도를 배워 신선이 되길 원했지만 끝내 중도에 멈추어서 학의 등 위에 오른 허깨비의 모습에 불과했다. 장량의 신선술은 양생을 통해 득선하는 방법이지만, 중생을 제도하고 자신을 깨끗이 했던 낭혜에 미치지 못했다. 최치원은 장량을 비판하면서 내심을 닦아 사람을 구제하는 득선의 방법을 강조했다. 그것은 이전의 6두품 유학지식인들이 희구했던 신선사상을 계승한 것이었다. 최치원의 도교사상은 유교적 관념을 기반으로 이해되었지만, 그 근저에는 불교와 연관되어 본성을 깨우치려는 수련적 신선사상이 자리하였다.
그는 신라 전통에 의지하여 발전한 유교와 불교를 존숭하였던 임금을 최고의 신선으로 상정했다. 경문왕과 헌강왕은 유교를 진흥하고 불법을 존숭한 으뜸가는 신선이었다. 신라의 임금을 최고의 신선으로 상정한 것은 경문왕과 헌강왕을 칭송하려는 목적을 담은 것이었다. 수련적 신선사상을 제시한 최치원의 도교사상은 경문왕계 왕실을 내세우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다.
신라사회에서 유교와 불교의 수용과 성행은 일찍부터 도를 추구했던 신라인의 타고난 성품과 우리 고유의 신앙체계에 의해서 가능했던 셈이다. 자연히 유교와 불교의 교의를 분별하여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사회 내에는 유교와 불교 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최치원은 이전의 유학지식인들이 제시한 유불교섭사상의 경향을 수용하여 양교의 갈등을 해소하고 교의와 실천덕목의 궁극적인 일치와 조화를 내세웠다. 특히 신라사회에 상존하는 유불교섭의 사상경향이 신라의 전통과 긴밀히 연관되었음을 은근히 강조했다. 그의 유불인식은 신라전통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왕도정치를 부각한 당시의 경문왕계 왕실도 유·불교의의 교섭과 실천덕목의 일치를 내세우면서 신라전통을 강조했다. 자연히 경문왕·헌강왕은 물론 이후의 경문왕계 왕실은 그의 유불인식에 호감을 가질 수 있었다.
최치원은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유식사상과 선종불교를 이해하려는 불교사상을 가졌고, 유교를 바탕으로 도교를 이해하면서도 신라전통을 아우른 불교와 연관되어 수련적 신선사상을 강조했다. 특히 신라사회에 이미 상존했던 유불교섭사상을 집성하여 호법을 통해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모색하였다. 자연히 그는 유교와 불교, 도교를 나누지 않고 함께 이해하면서 이들의 융합에도 관심을 보였다. 최치원이 유교·불교·도교 삼교를 융합하려 했음은 「난랑비서(鸞郎碑序)」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인 풍류가 있었다. 풍류는 노사구(魯司寇)의 가르침과 주주사(周柱史)의 종지(宗旨),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敎化)인 삼교를 포함하며, 그 가르침의 근원은 이전부터 전해져오던 「선사」에 실렸다. 최치원은 화랑 난랑을 기리는 비명의 서문에서 신라에 이미 유교·도교·불교를 아우르는 고유의 풍류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베풀었고,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지켜 묵언의 종지를 세웠다. 그러나 공자와 노자는 석가와 비교하면 힘겨루기 어려웠다. 최치원은 공자·노자·석가를 비교하여 유교와 도교가 성세(盛世)하지만 불교에 비하면 그만 못하다고 표현했다. 그는 유교와 도교보다 불교를 수승(殊勝)하게 인식했다. 곧 불교를 통해서 유교와 도교를 인식하거나 융합하려고 했다.
신라 말의 유학지식인들은 삼교를 함께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졌다. 신라의 토착신앙이 유교·불교·도교와 관련하는 모습은 이미 신라 중고기에 형성된 화랑도를 통해서 확인된다.
진흥왕은 신선을 숭상해서 원화를 조직했다. 나아가 나라를 부흥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화랑을 조직했다. 화랑은 신선을 숭상하고 풍월도를 중시한 진흥왕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나라의 신선’인 국선이라고 불렸다. 화랑은 신라 최고의 신선이며, 나라를 보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
신선의 최고인 화랑은 나라 사람에게 유교적 소양을 갖도록 하는 방편이었다. 흥륜사 승려 진자는 미륵이 화랑으로 현신하기를 꿈꾸어 수원사에 갔다가 돌아와 왕경의 영묘사 북쪽에서 미시를 찾았다. 왕은 미시를 국선으로 삼았고, 나라사람들은 그를 ‘미륵선화’라 불렀다. 진자는 화랑인 미시를 구하여 국선으로 모셨으므로, 화랑은 진자에 의해서 불교와 긴밀히 관련되었다. 화랑의 형성과 조직에는 도교사상도 녹아져 있었다. 국선인 화랑에는 유교와 불교는 물론 도교적 관념이 모두 반영되었다.
「난랑비서」는 ‘난랑(鸞郞)을 송독하는 비명의 서문’이란 뜻이다. 난랑은 ‘난(鸞)’과 ‘랑(郞)’으로 이루어진 이름이었다. ‘랑’은 화랑을 의미하지만, ‘난’은 군주의 지덕을 상징하는 새의 이름을 일컫는다. 자연히 ‘난랑’은 군주인 화랑, 바로 국선인 임금을 말한다. 응렴은 국선으로 즉위했으므로, 최치원이 추모한 난랑은 경문왕인 셈이다. 「난랑비」는 경문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명이다. 「난랑비서」는 경문왕계 왕실이 점차 쇠퇴해지자 왕실의 권위를 부각하기 위해서 국선인 경문왕을 강조하려고 찬술되었다.
화랑제도는 진흥왕이 인재를 뽑기 위해 시행했던 신라고유의 인재등용 방법이다. 신라 하대에 화랑의 활동이 점차 부흥하는 가운데 화랑출신인 경문왕이 즉위했다. 최치원은 풍류를 떨쳤던 화랑 경문왕이 즉위한 뒤에 유교와 불법의 존숭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부각했고, 유교·불교·도교 삼교를 융합하고자 노력했음을 강조했다. 경문왕에 의한 삼교융합의 모색은 경문왕계 왕실을 위호하는 또 하나의 정치이념이었다.
최치원의 삼교융합사상은 그의 유교적 정치이념, 화엄사상, 수련적 신선사상, 유불교섭사상 등과 같이 경문왕계 왕실을 부각하는 존왕적 성격을 가졌으며, 신라국가를 재건하려는 호국적인 성격을 담았다. 그는 왕실을 옹호하는 사상경향을 가졌기에 각 사상에 대한 이해는 깊을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고려 초 지식인들에게서 최치원의 사상이 계승된 흔적은 잘 찾아지지 않는다. 더욱이 선종사상이 화엄사상의 논리를 초월하며 조사선을 강조하고, 선종승려가 교종불교의 실천적 측면을 내세우면서, 화엄사상을 통해 왕실을 중심으로 삼교융합을 내세웠던 최치원의 사상경향이 반향을 일으키는 데는 한계가 없지 않았다. 이러한 한계는 후삼국시기에 해인사가 견훤과 왕건의 복전으로 갈라져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렇지만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왕실을 옹호하며 전통을 강조하는 최치원의 사상은 은근히 내세워질 수 있었다.
최언위는 신라 말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신라국가의 개혁과 재건을 꿈꿔온 최치원의 역사의식을 계승했다. 최언위는 고려에 귀부하고 나서도 계속 최치원을 계승했다.
고려 광종대에 신라출신 지식인은 국왕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반면에 호족출신 지식인은 광종의 호족세력 탄압으로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최언위 집안은 광종을 유교적 이상에 충실하면서 호법을 강조한 군주로 상정했다. 자연히 광종의 왕권전제화 노력은 최치원의 사상을 계승한 최언위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유교와 불교를 함께 이해하며 군왕의 역할을 강조하는 존왕적 정치이념을 제시했던 최언위 가계는 광종 말에 호족세력이 왕권전제화에 반발하면서 중앙정계에서 배제되었다. 이때 신라의 고려귀부 후 고려 관인이 되었던 최은함(崔殷含)의 후손 최승로(崔承老)는 성종대에 중국문화에 대한 호감보다 고유문화의 계승을 강조하면서 불교보다 유교를 치국의 요체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그것은 호적의 지역적 기반을 인정하면서 최치원의 존왕적 정치이념에 따라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건설을 희구하는 것이었다. 최치원의 존왕적 정치이념과 사상은 나말여초 격변기에 분열을 공존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최치원은 신라 말 이래 많은 역사가의 주목을 받았고, 그의 저술은 자주 회자되었다. 그는 비록 왕실을 중심으로 했지만, 신라의 역사문화를 종합했고, 사회의 혼란과 분열을 융합하려고 애썼다. 한국사에서 신라의 역사와 문화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루는 바탕으로 이해되었다. 자연히 신라의 역사문화를 다룰 때 최치원은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최치원은 중국의 역사문화에 익숙하면서 신라의 전통을 강조했다. 따라서 중국문물이 수용된 뒤 우리 문화를 이룬 시원을 찾을 때 최치원이 그 원조(遠祖)로 거론되는 경우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의 이면에는 왕권과 신권(臣權)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과 신분계층의 대립에 의한 사회변혁이 제법 있었다. 자연히 정치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국왕을 중심으로 통합할 필요가 제기되었을 때, 전통과 외래문화를 아우른 최치원의 활동과 그 저술은 무엇보다도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람들은 동방사람들을 오랑캐로 여기면서도 어질고 현명해서 가르쳐 교화하기 쉽다고 정의했다. 동방은 해 뜨는 곳으로 태평하여 이미 어진 바탕이 숨어 있었다. 이전부터 중국사람들은 우이를 본받아 동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차례대로 했는데, 그것은 도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동이는 중국의 모범이 되는 셈이다. 최치원은 변방의 오랑캐인 신라가 중국에서 예와 악을 습업하여 마침내 중화를 일깨우는 중심으로 자리했음을 자부했다.
다만 최치원은 신라가 황제를 모시는 제후국임을 유념하면서, 제후국 중에 가장 뛰어난 나라였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문화의 수용과 발전이 신라의 전통적 토착문화를 토대로 구현되었음을 부각했다. 나아가 그러한 과정을 거쳐 신라는 중국을 일깨우는 나라가 되었음을 자랑했다.
최치원은 고구려가 땅의 험함을 믿고 교만을 부리면서 임금을 죽이고 백성에게 폭학(暴虐)하는 등 하늘의 명령을 거역했기에, 당 태종이 공손히 천벌을 행했다고 했다. 그 뒤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별도로 읍취(挹翠)들과 함께 모의하고 나라 이름을 도적질하여 발해를 세웠다고 보았다. 발해는 천명을 어긴 이유로 당나라의 응징을 받은 뒤에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다. 최치원은 발해를 당나라 황제의 교화를 벗어난 교만한 무리라고 규정했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를 교만하고 흉악한 나라로 여겼고, 당나라 황제가 천벌을 받들어 그들을 깨끗이 제거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보면서 나라 이름을 도적질한 나라로 규정했다.
최치원은 발해의 기원에 대해서 고구려의 후예, 또는 속말말갈의 나라로 보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졌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면서 당나라의 위업을 주로 내세웠지만, 속말말갈로 규정하면서는 신라의 속번(屬蕃)임을 은연 중 강조했다. 최치원의 발해에 대한 관심과 표현은 어디까지나 신라중심적이었고, 그것은 경문왕계 왕실의 안녕과 특별히 관련되었다.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장일규 / 신서원
2008년 12월 15일 초판1쇄 발행
*본문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편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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