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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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남명 조식 3
실천을 강조한 조선의 철학자 남명
남명 조식은 1501년 합천 삼가면 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 아버지가 벼슬에 나아가면서 한양 생활을 했다.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과 학문을 나누고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선생은 훈구와 사림 간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16세기 초 기묘사화의 회오리 속에 친족과 가까운 벗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관직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지리산을 찾아 유람을 하면서 이 혼란의 시대에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깊이 고심하기도 한다.
선생은 재야(在野)에서 자신을 갈고 닦아 도학의 기강을 세우기로 결심한다. 한양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와 잠시 의령 자굴산에 들어가 독서하다가, 생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처가가 있는 김해로 간다. 그곳에서 산해정을 짓고 18년 동안 다양한 실천적 학문의 깊이와 칼날 같은 정신을 고양했다. ‘산해(山海)'란 '산처럼 높게 바다처럼 깊게' 도학을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나 있다. 그 뒤 선생은 고향인 삼가로 옮겨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정진하면서 문인을 양성하게 된다. 계부당은 ‘닭이 알을 품듯이 정진한다’는 뜻이고 뇌룡정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용이 나타나는 것처럼 신비한 조화를 부리고, 연못처럼 깊숙이 침잠해 있다가도 천둥이 치듯이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산해정이 학문을 연마하는 시기였다면 뇌룡정은 그것을 녹여 내면화하는 체득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 몸소 이룬 바를 실천하여 결실을 맺는 화룡점정의 시기가 펼쳐진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갈고 닦은 도학의 실천을 위해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자리를 잡게 된다. 10여년 동안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여생을 마칠 곳으로 정한 것이다. 선생은 이곳 산천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자신의 생애와 사상에 방점을 찍는다. 비로소 ‘남명학’이 탄생한 것이다. 1572년 남명은 12년 동안 펼쳐온 실천적 유학사상의 산실, 산천재에서 잠들었다. 선생의 묘소는 천왕봉의 산줄기가 왼손을 펼쳐 감싸듯이 웅석봉으로 돌아내려오면서 남명기념관 뒤에서 마무리 되는 산자락의 끝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선생의 사상적 핵심은 '경의(敬義)'로 표현할 수 있다. 선생은 평소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 두 개와 경의검(敬義劍)이라는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방울이 울릴 때 마다 '경'의 마음을 되새기고, 경의검에는 '내명자경 외단자의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라는 글자를 새겼다. 먼저 자기 안에서 의로움을 쌓아서 그것을 바깥으로 펼쳐내는 조화로운 경지를 '경의'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선생께서 말년에 방울은 김우옹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심법(心法)을 전한다.”고 하였다.
남명의 문인(文人)들은 경의(敬義)사상을 실천하여, 의로운 일에 목숨을 걸고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북인의 영수로 광해군 때 대활약했던 정인홍은 대표적 인물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50여 명의 의병장이 남명의 후학이었으며, 경남 의령에서 북을 내걸고 의병을 모았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남명의 사상은 직선적인 강직함으로 인해 정인홍 이후 존재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당대 유학의 실천적 차별점이었으며, 지금에 와서도 지리산의 큰 종(鐘)으로 우리들의 마음에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다.
정리: 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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