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남명 묘소와 풍수
남명(南冥) 묘소
사적지 제305호에 포함된 남명 선생 묘소는 별묘 뒤편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사리마을을 지나 노송이 우거진 숲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면 닿을 수 있다.
묘소 자리는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지맥의 하나가 별묘 뒤에서 끝나기 바로 직전의 양지 바른 곳이다. 천왕봉이 빤히 올려다보이고 덕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다 산천재와 덕천서원도 지척간의 거리에 둔 명당이다.
남명과 어릴 때 함께 공부했고 당시 큰 선비였던 성운(成運)은 남명에 대한 묘갈문(墓喝文)에서 “슬프다. 공은 배움에 독실하고 행함에 힘써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감에 넓게 알고, 깊게 깨달아 그와 견줄만한 이가 드물어 또한 어진 이에 추배(追配)하여 후학들의 종사(宗師)로 삼을만 하거늘 혹자는 이를 모르고 그 평함이 자못 사실과 달랐다. 그러나 어찌 오늘날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으리오. 백세 먼 뒷날 아는 이가 나와주기를 기다릴 수밖에……”라고 썼다.
남명은 사후 각 지방과 기관에서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청원하는 상소가 35번이나 있었지만 당파의 영향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 있을 때 스스로 아무런 벼슬길에도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일관했지만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남명의 묘소에는 원래 있던 비석을 떼 내 앞쪽으로 옮겨놓고 새로운 비석을 세워 놓았다.
원래의 비석은 마멸이 심하여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데 특히 비석의 곳곳에 총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남명 선생의 비석은 6・25의 혼란기에 총탄을 맞았던 것이다.
“남명 선생의 묘소가 있는 이곳은 아군의 지휘소가 자리했고 맞은편 덕천강 건너 산봉우리에 적군이 포진했었지요. 쌍방에 총격전이 치열했는데 그때 선생의 비석에도 총상이 입혀진 것입니다. 끔찍한 일이지요.”
남명 선생의 13대손인 조재영 씨는 당시 군경이 사리마을 둘레를 목책으로 두르고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한편으로 적군도 가장 악명이 높았던 남부군을 이곳 덕산에 투입함으로써 피아간에 격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조씨는 당시에도 이 마을에 살면서 전투상황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태 씨가 쓴 ‘남부군(南部軍)’에도 이곳 덕산에서의 전투를 무용담을 곁들여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남부군이 남명 선생의 묘소에 총을 쏘아 비석에도 총상을 입혔던 사실을 알고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많은 제자 의병(義兵)으로
남명 선생의 묘소에서 6・25의 상처 자국을 지켜보는 것은 그의 평소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게 만든다.
남명의 좌우명은 ‘내명자경 외단자의(; 內明者敬 外斷者義 ; 안으로 밝은 것은 敬이요, 밖으로 결단함은 義이다)였다. 그는 이 좌우명을 산천재에 써 붙여놓고 제자들과 함께 수양의 지침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닌 작은 칼에도 이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조식은 가난한 선비로 살면서도 우유부단하고 약삭빠르게 출세에만 연연하는 세태를 개탄하고 이러한 풍조에 휩쓸리지 않을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가 없으며 알고 행하지 못함은 오로지 알지 못한 때문이라고 했다.
남명은 제자를 가르칠 때 항상 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던 점에서 일반적인 산림처사와는 궤를 달리한다. 특히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에 이를 예고하고 제자들에게 병법(兵法)을 가르쳤으며 국방전략에 대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과연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의병장으로 구국일선에 나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는 바로 남명의 외손서로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렸는데 그는 원래 글을 하는 선비였다. 또 정인홍(鄭仁弘) 김면 조종도(趙宗道) 이대기(李大基) 전치원(全致遠) 이정 하낙(河洛) 등 남명의 문하생 60여 명이 각자 의병들을 이끌고 왜군과 싸워 관군이나 딴 지역의 의병들과는 달리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정인홍은 당시 낙향해 있던 합천에서 계속 왜적을 무찌르면서 용맹을 떨치자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선조는 의병대장의 직함까지 내렸다. 그러나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은 이를 사양하면서 상소문을 올렸는데 약 5천언의 장문으로 조정에 대해 불을 뿜는 듯한 직언이었다. 나라가 왜 전쟁에 휘말리고 그 전쟁을 감당못해 대혼란을 겪게 되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고 앞으로 전쟁을 극복하고 전후에 국가를 재건하는 방법을 상달했던 것이다’(권인호 ‘서원의 역사와 유학사상’).
의(義)를 위해 목숨 바쳐
‘의(義)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는 것이 남명의 가르침이었다. 또한 그는 ‘인간의 가치가 물질과 권세에 있지 않다. 그 위에 있는 것은 곧 정신적 가치이다’라고 가르쳤다.
남명의 이러한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선비들은 유약함을 벗고 강건해졌으며 벼슬길에 나간 관리들은 청렴결백을 자기의 중심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산야에 묻혀 도(道)를 닦는 문인들은 의(義)를 길러서 나라에 변란이 일어났을 때는 홀연히 일어나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경의(敬義)를 신조로 삼았던 남명은 ‘인성(人性)과 천명(天命)을 떠들어대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데 힘쓰도록 하라’며 지행일치(知行一致)의 행동철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임진란 때의 진주대첩이나 6만 진주군관민의 옥쇄(玉碎)의 원동력이 되었다.
‘남명의 가르침은 지리산을 가까이 두고 있는 서부경남 사람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해오고 있는데 이 때문에 그가 타계한 지 2백여 년이 지난 1862년 삼정이 문란한 데 항의한 진주민란이 일어났고, 이것이 삼남지방으로 번져 동학운동의 계기가 됐으며, 나아가 기미독립운동, 형평사(衡平社)운동 등으로 이어져왔다’[이종길(李鍾吉) 지음 ‘지리영봉’].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경상우도(서부경남) 사람들은 의(義)를 중히 여기는 남명의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대체로 착한 일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의로운 일 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풍을 갖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는 것.
남명 선생의 묘소 비석이 총탄을 맞았던 것도 그가 산림처사로 후학을 가르치면서 항상 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던 것과 견주어 깊은 감회를 갖게 해준다.
총탄 흔적을 안고 있는 그의 옛 비석은 어째선지 다른 곳으로 치워지지 않고 묘소 앞쪽의 석축에 기대 놓았다.
이 묘소를 포함한 남명 선생 유적지 모두를 앞으로 사적지로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펴게 된다고 하니 그때 손을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남명 선생의 묘소를 찾아 경배를 올리는 것도 뜻이 있겠다.
『지리산365일 3권』 최화수 지음 도서출판 다나
1995년 1월 25일 4쇄 발행
남명묘소 풍수
산천재를 나오면 도로 쪽으로 남명기념관이 있다. 기념관 뒤편으로는 둥그런 산봉우리가 보인다. 산발치 아래에 남명사당까지 차려놓은 산봉우리는 산천재의 배산이다.
배산 정상에는 남명묘소가 있다. 산천재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남명선생묘소 입구라는 안내석이 보인다. 안내석이 가리키는 대로 산길을 따라 3분 정도 올라가면 남명묘소에 닿는다.
산천재에서 제자들을 11년간 가르치던 남명은 1572년 운명했다. 유해는 남명 자신이 생전에 직접 잡아놓은 이곳에 안장되었다. 평소 제자들에게 성리학은 물론 제자백가와 주역에 병법 그리고 풍수지리까지 가르친 남명이 직접 잡은 묘소이기에 당연히 눈길이 갔다.
남명묘소 뒤를 보면, 약간 솟아오른 잉(孕)도 보인다. 잉과 이어지는 산줄기를 역 추적하여 보면, 10m 가량의 산줄기가 갈지자(之) 형상으로 들어오고 있다.
소수서원에서도 보았던 태식잉육장법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이때 육(育)은 혈(穴)을 가리키는 풍수용어로써 남명무덤이 이에 해당한다.
남명묘소도 천왕봉에서 뻗어내린 정기를 받고 있다. 천왕봉에서 남명묘소까지 이르는 산줄기가 무덤 가까이에 이르러 태식잉을 보여주며 무덤(육)으로 들어온다. 이런 것이 풍수 형세론(形勢論)의 설명이다.
강의실에서 수강생들에게 풍수자료들을 보여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이해를 하기는 한다. 그러나 백문이불여일견이듯 서술적 강의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풍수다. 게다가 조선왕조 500년과 오늘날 100년, 도합 600년간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을 속였던 것이 무덤풍수장이들이었기에 누가 풍수장이 말을 믿겠는가. 그래서 나온 말이 “반풍수 사람잡네”, “뻥이야”, “풍친다” 등등의 풍자들이다. 항간에는 사주보는 명리학이 풍수지리인양 혹세무민하는 사람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명리학과 풍수지리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야다.
남명묘소와 천왕봉이 한눈에 보이는 관산점에서 찍은 사진을 보자. 천왕봉에서 남명묘소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눈길을 끄는 부위가 있다. 뻗어내린 산줄기 중 남명묘소가 있는 산봉우리는 둥글게 생겼다. 봉긋한 봉우리 위에 올라타고 있는 것이 남명묘소다. 저 같은 모습을 풍수에서는 누에머리인 잠두(蠶頭)라고 한다. 남명묘소는 잠두형이다.
누에는 뽕잎을 먹을 때, 머리를 8자 모양으로 흔든다. 흔드는 머리통을 산기운 운동성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도 아리송하기는 마찬가지다. 둥근 산봉우리를 동물 대가리로 보는 것은 그런대로 연상된다고 하더라도, 저게 누에 대가리인지 범 대가리인지 용 대가리인지는 생각하기 나름 아닌가. 이런 것까지 확연히 논증시켜주어야 비로소 하나의 형국은 성립된다.
형국이 성립되려면 가장 먼저 배산과 앞산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가령 양가집 규수인 옥녀봉(玉女峯)과 마주하는 앞산이 말(馬) 형상이거나 소(牛) 같이 생겼을 경우는 문제가 발생한다. 옥녀와 말과 소는 바람난 애마부인처럼 애마처녀, 젖소처녀 발복한다는 정서 때문에 형국은 성립될 수 없다.
남명묘소의 봉긋이 솟은 앞산 봉우리는 전형적인 옥녀봉이다. 옥녀봉 앞으로 길게 뻗어 나온 산자락은 비단을 풀어놓은 형상이다. 이런 형상을 두고 풍수에서는 옥녀가 비단을 짠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이라 한다.
옥녀가 비단을 짜려면 실(絲)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남명묘소 배산인 잠두형과 앞산인 옥녀직금형 사이에 있는 마을을 사리(絲里)마을이라고 붙여놓았다. 누에(남명묘소)가 실을 내뿜자(사리) 이를 받아 옥녀가 비단을 짠다(앞산). 그러므로 옥녀직금형과 실 사(絲)라는 마을이름은 남명묘소가 잠두형임을 객관적으로 논증하는 일례가 된다. 이런 것들이 문화재풍수를 입증하는 향토지명인 것이다.
[조선시대의 명문사학 서원을 가다] 장영훈 도서출판 담디
초판발행 2005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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