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산천재
지리산 - 태산교악
지리산 품안은 한없이 넓다. 이를 두고 태산(泰山)이라 했다. 지리산 천왕봉은 높이 솟구친다. 이를 보고 교악(喬嶽)이라 했다. 조선팔도 인물평에는 태산교악이라는 말이 있다. 영남인의 기질을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했던 것이다. 지리산은 태산교악이다. 지리산 정기를 선비기상으로 발원시킨 양대산맥 하나가 지리산 문하다.
풍토는 인물에게 영향을 미친다. 소백산 비로봉은 흙들로 형성된 토산이다. 토산은 후덕하고 인자스런 기운을 담고 있다. 백두대간 중 소백산과 덕유산이 이에 속한다. 인자한 소백산 지령은 퇴계라는 인걸을 만들었으니, 소백산 문하는 인자하며, 자애로운 자모(慈母)기풍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기풍은 소백산 문하 서원에 영향을 주었다. 소수서원, 도산서원 그리고 병산서원들을 들어가면, 아기자기한 건축물들이 어머니 품안처럼 우리를 안겨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지리산 문하의 기풍은 그와 다르다. 지리산 천왕봉은 높이 솟구치는 바위들로 형성되었다. 백두대간 중 이러한 석산(石山)을 대표할 수 있는 것들은 금강산, 설악산 그리고 지리산 천왕봉이다. 천왕봉 기상은 남명(南冥)이라는 인걸을 낳고 키웠기에 남명문하는 엄한 아비인 엄부(嚴父)기풍을 갖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지리산문하 서원을 들어서면, 곳곳에서 엄한 기풍이 서려있는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것이 남명문하서원들의 특징이며, 천왕봉 지령이 빚어놓은 지리산 선비들의 공간인 것이다.
남명이 지리산에 입산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61세 때였다(1561년). 10년에 걸친 지리산 답사 11번째 만에 비로소 명당 터를 잡았던 것이다.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가 그곳이다. 이곳 일대가 천왕봉 정기를 가장 잘 받는 명당이라는 것은 덕천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남명 시비(詩碑)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두류산에 양단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 찾아보니 / 복사꽃 떠내려 오는 맑은 물에는 명당 산이 숨어 있더라. / 사람들이 무릉도원 명당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면 / 나는 여기다라고 말하겠노라.]
양편의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을 양단수(兩端水)라 한다. 백두정기가 천왕봉을 거쳐 내려오다가 양단수를 만나자 멈추는 이곳이야말로 무릉도원 명당이라는 것이 남명의 풍수 평가였다. 무릉도원이라는 대 명당에는 조건이 있다.
물길이 빠져나가는 들머리는 외부사람의 눈에 발견되지 않아야 한다는 비밀통로 조건이 붙는다. 제아무리 잘 먹고 잘 살던 마을이더라도 탐관오리들이 찾아와서 수탈해 가면 무슨 소용인가. 이를 두고 남명은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자 잠겼어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맑은 물줄기를 타고서 무릉도원 복사꽃이 떠내려 오긴 오는데, 산 그림자 흔적마저도 감추고 있다는 내용은 완벽한 문단속을 표현한 것이다. 남명은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보는 합천군 삼가마을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글공부를 했던 의령의 자굴산에서도 천왕봉은 보인다. 천왕봉은 남명을 남명이게 한 스승이기도 했다. 이 같은 인연에서 10년간 택지 끝에 이곳을 발견하고서 무릉도원이라 했던 것이다. 무릉도원 입구에는 항상 문단속을 하는 석문(石門)이 있다.
이곳 산천재 일대가 무릉도원이라면, 산영조차 잠겼다는 들머리 지점도 있어야 한다. 그곳은 20번 국도를 타고서 여기 산천재로 들어오기 전, 한 오리쯤 떨어진 곳에 세워놓은 입덕문이라는 석문이 서 있는 곳이다. 산천재 답사는 그곳을 무릉도원 입구로 삼아서 시작된다.
산천재 찾아가기
대전에서 진주까지 연결된 고속국도를 사람들은 대진고속도로라고 부른다
. 대진고속도로(중부고속국도) 남쪽에는 산청군이 있다. 산천재는 산청군에 있다는 선입견 때문에 초행길인 사람들은 곧잘 산청 나들목에서 빠져버린다. 잘 가다 삼천포로 빠져버린 격이다. 산청 나들목에서 20km쯤 더 남쪽에 있는 단성 나들목이 산천재로 가는 길목이기에 이곳에서 빠져야 한다.
단성 나들목을 나와 20번 국도를 타고서 서쪽으로 가려할 때, 우측 편 바로 옆에는 문익점선생의 목화시배지가 보인다. 그곳에서 조금만 가면, 남강 물줄기 다리 너머에는 성철스님의 생가였던 겁외사가 산기슭 밑으로 살짝 보인다. 이러한 풍경은 작은 언덕을 올라갈 때 경호강과 함께 사라지는데, 언덕을 내려가면 제법 잘 꾸며진 마을 하나를 보게 된다. 고풍스러운 마을은 진주 일대에서 명당마을로 유명한 남사마을이다.
남사에서 십리가량을 더 가면, 내리막길 삼거리에서 툭 터진 강줄기가 보인다. 지리산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이곳부터가 지리산 문지방이라 할 수 있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0번 국도를 계속 타고 십리가량을 더 가면 입덕문(入德門) 석비가 나온다. 남명이 붉은 글씨로 써 놓은 입덕문은 무릉도원 입구 석문에 해당된다.
지리산 남명문하유적은 산천재에서 시작하여 산천재로 마무리된다.
퇴계문하서원인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답사할 때는 주로 건축물에 눈길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그와 다르다.
이곳에서는 건축물보다는 터를 읽어야 하고, 터가 담고 있는 주변산세를 감상하여야 한다. 이런 식의 답사를 두고 무진장 어려운 답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한번만 경험하면 퇴계문하서원의 건축물 해석보다 훨씬 쉬운 답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단 산천재 정문 앞에 서 보자. 산천재 뒷녘으로 산봉우리 두 개가 보인다. 좌측에 있는 높은 봉우리가 지리산 천왕봉이다. 천왕봉 우측에 있는 봉우리는 중봉이다. 천왕봉과 중봉은 형제처럼 나란히 서 있다. 저런 모습 때문에 지리산에서도, 실상사에서도, 정령치에서도 한 눈에 식별되는 것이 천왕봉이다.
천왕봉은 이곳에서 바라볼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러므로 천왕봉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이곳을 찾아 택지하였던 것이 남명의 산천재라는 것도 알게 된다. 아름다운 산봉우리와 마주하는 집은 아름다운 산 기운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터 잡이 정서였다.
남명이 이곳 터를 찾는 데에 소요된 시간은 10년이었다. 터 잡기 10년에 집짓기 1년이라는 우리 속담처럼 터 잡기는 집짓기보다 더 중요시 되었다. 이곳에 산천재를 지을 때, 남명은 백수(白手)였다. 오늘날 백수라는 어원이 산천재 주련에 걸렸다. 읽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춘산저처무방초 (春山底處無芳草) 지애천왕근제거 (只愛天王近帝居)
백수귀래하물식 (白手歸來何物食) 은하십리끽유여 (銀河十里喫有餘)
“봄 산 어느 곳인들 산나물이 없겠느냐마는 / 오직 하늘 닿은 천왕봉이 마음에 들었기에 / 백수(빈손)가 이곳으로 들어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까? / 은하수 같은 십리허의 물줄기는 마시고도 남겠다.”
백수신분이었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 ; 1501~1572), 그러나 당시 조선팔도와 역사를 호령하였던 기개 높은 백수였다. 이런 것이 남명의 호연지기 기상이다. 산천재는 천왕봉의 호연지기를 담는 곳이다.
천산재가 아닌 산천재
산천재 마루에서 방문을 쳐다보면, 산천재(山天齋)라는 현판이 보인다. 남명이 작명한 문패다. 대다수의 식자들은 산천(山天)을 산천대축괘(山天大畜掛)에서 따온 것이라며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처음 삼년은 이 말대로 그 뜻을 찾아 헤매었으나, 결국은 애매모호한 말장난임을 알게 되었다. 산천재도 보이는 대로 보면 보이는 글자다.
하늘(天)과 산(山)을 따져보면, 높은 것은 당연히 하늘이다. 이럴 때는 천산재(天山齋)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남명은 산천재라고 작명했다. 산을 하늘보다 높이 쳤던 것이다. 이는 산천재에 적혀있는 “천명불산명(天鳴不山鳴)”이라는 남명 싯귀에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늘이 소릴 내어도 산은 대꾸하지도 않는다.”라는 것이 천명불산명이다.
하늘의 소리(天鳴)인 명종 임금의 어명이 남명에게 여러 차례 당도했다. 무슨 관직을 제수하노니 입궁하라는 어명이었다. 그러나 남명은 요지부동한 지리산 천왕봉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이런 남명의 행동은 불산명(不山鳴)이다. 이럴 경우에는 산이 하늘보다 높다. 그러므로 천왕봉 기상이 서린 산(山)자를 권위주의 임금을 상징하는 천(天)자보다 앞에 적어놓은 것이 산천재(山天齋)였던 것이다.
산천재 문패가 걸린 양편에는 소박한 벽화 2개가 어렴풋이나마 보인다. 자세히 보면 계곡물과 소 그리고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중국 요순시절 요임금은 허유에게 나라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허유는 산속으로 들어가 계곡물에 귀를 씻었다. 귀 씻는 광경을 목격한 농부가 그 이유를 물어오자, 허유는 그 이유를 말했다. 그러자 농부는 대뜸 소를 끌고 위로 가벼렸다. 더러운 소리가 흐르는 물을 어찌 소에게 먹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이후 허유는 기산(箕山)으로 들어가 평생을 살았다 한다.
이를 화제로 삼아 그려놓은 그림이다. 기산에 입산하여 살았다는 허유는 천왕봉 아래 산천재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살았던 남명을 상징한다.
산천재 문패 바로 위에는 바둑 두는 노인들도 그려져 있다. 신선이 장기 두는 놀음에 구경꾼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다는 무릉도원 광경을 그려놓은 그림이다. 이런 광경의 산천재를 주역으로 퍼즐맞추기식 풀이를 하면, 그때부터 남명유적들은 오리무중이 된다. 반면 보이는 그대로 풀어 본 산천재라는 글자는 13년 전(1548년)에 지었던 남명의 뇌룡(雷龍亭)정과도 연결된다. 뇌룡(雷龍)은 벼락치는 용을 말한다. 그래서 뇌룡정 주련에는 시거이룡현(尸居而龍見), 연묵이뇌성(淵默而雷聲)이라는 글자도 걸려있다. 풀어보면 “잠자는 용의 코털 건드렸다가는 벼락 맞는다” 쯤 된다.
명종 10년, 뇌룡정에 있던 남명의 코털을 건드렸던 대왕대비 문정왕후는 날벼락을 맞았다. 남명이 올린 단성소 내용 중 “세상 물정도 모르는 일개 과부가 왕대비랍시고 국사를 좌지우지하니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인다. 이 나라가 어찌 여인천하냐! 그러니 과부대비 그만 물렀거라!”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생각은 모나게 해도 행동을 둥글게 하라”가 퇴계와 퇴계문하의 교육관이었다면, 남명과 남명문하는 그와 달랐다. “모난 생각이 옳다고 생각되면 행동도 모나게 하라”가 남명의 교육관이고 행동지침이었다. 이런 것들이 퇴계와 남명문하의 다른 기풍이다.
다른 것은 또 있다.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의 강당 양편에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그 같은 배치는 우리 건축물의 기본양식이다. 그런데 이곳 산천재는 서재가 생략되어 있다. 서재가 생략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집짓기에 사용되었던 건축술은 풍수였다. 남명은 풍수지리학까지 도통했던 선비였기에 문하생들에게 풍수까지 가르쳤다. 이런 생각이 들자 눈길은 자연스럽게 풍수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산천재 풍수설계
450여 년 전, 남명이 이곳 덕산 땅에 산천재를 택지했을 당시를 상상해 보자.
덕산 땅은 어느 지점에서 관산(觀山)하더라도 산줄기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치고 있는 장풍(藏風)국면임이 드러난다. 이러한 장풍국면에 들어 있는 이곳을 남명은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했다. 천하의 무릉도원이기에 모든 곳이 명당일거라는 생각은 오판을 불러온다. 무릉도원 내에서도 명당과 흉당은 존재한다. 이때 명당 혈을 찾는 유일한 방법이 풍수다.
한국인은 집터를 잡을 때, 가장 먼저 배산임수(背山臨水)를 따졌다. 배산과 임수 중에서도 배산을 우선시 했다.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는 글자에 들어있는 지령(地靈)은 산줄기를 타고 오는 산기운이기에 배산을 중요시했다.
덕산 땅의 모든 지령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뻗어 내린다. 이 말은 천왕봉에서 빠져나온 산줄기들이 덕산 땅을 감싸고 있다는 말도 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집터를 택지할 경우는, 산줄기 족보를 따질 필요가 없다. 덕산 땅은 모두 천왕봉 족보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단지 산줄기 중 마지막 끝부분이 출중하게 생긴 것만 찾으면 된다. 이러한 생각이 당시 남명의 택지 제1단계였다. 이러한 추정은 산천재로 들어오는 마지막 산봉우리를 살펴보아도 확인된다. 산천재 뒤로는 웅크린 봉우리가 머리를 내리듯 들어오고 있다. 저 같이 출중한 봉우리는 이곳 주변을 살펴도 몇 개 더 있다. 배산이 파악되면 그때부터는 임수를 살펴야 한다. 산천재 앞면으로는 시천 물줄기가 흘러가니, 이는 임수(臨水)가 된다. 배산 조건과 임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가운데 지점에는 명당 혈이 있다. 더불어 천왕봉 풍광까지 충족되는 이곳이기에 남명은 바로 여기를 택지했던 것이다.
터가 정해지면 그때부터는 집을 설계한다. 이때 산천과 조화를 이루는 집이어야 명당집이 된다. 이것이 제2단계 작업에 속한다. 이때도 산을 등지고 물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 배치가 다시 적용된다. 이를 어기면 명당 터도 흉당작용을 한다.
조선왕조 시절에는 역적이 나오면 역적문중 선산에 있는 명당무덤들을 흉당무덤으로 만들어버렸다. 흉당화 방법 중에 하나가 멀쩡한 배산임수 무덤을 거꾸로 돌려 배수임산(背水臨山)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역장이라고 한다. 배수임산하고 있는 집이란 결국 역장시킨 무덤과도 같다.
제대로 잡은 배산임수에 양지바른 남향집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풍수명당집이다. 산천재도 배산임수에 남향집 배치를 하고 있다. 한국인 표준 명당집인 산천재는 여기에 풍수 명당조건 하나를 더 갖고 있다. 이점이 산천재의 빼어남인데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시야를 넓혀야 한다.
주변 산천과 집을 한목에 파악할 수 있는 풍수방법이 있다. 프로기사들은 바둑판 전체포석을 한 눈에 파악하고, 그에 가장 잘 맞는 정석을 선택한다. 이때 포석이 풍수형국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남명은 산천재를 어떤 형국으로 파악했던 것일까. 형국을 파악할 때는 먼저 산줄기부터 관찰하여야 한다.
천왕봉과 산천재를 연결하는 산줄기는 대동여지도를 활용하면 유익하게 식별된다. 대동여지도의 해당 산줄기에 붙어있는 곁가지들을 제거하면, 오늘날 등고선지도보다 식별하기가 훨씬 용이해진다. 천왕봉에서 웅석봉을 거쳐 덕산동 산천재로 들어오는 대동여지도 산줄기를 풍수형국도에서 찾아보면,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풍수에서는 산을 용(龍)이라 한다. 회룡(回龍)은 산줄기가 C자 모양으로 회전한다는 표현이다. 고조(顧祖)는 출발한 조상산(祖山:여기서는 천왕봉)의 끝머리가(여기서는 산천재 뒷산) 다시 조상산을 쳐다본다는 용어다.
산천재를 나로 했을 때, 아비는 웅석봉이 되고 할배는 천왕봉이라는 풍수족보를 갖추게 되는 것이 산천재의 회룡고조형이다. 아비는 아들에게 회초리를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손자에게 회초리 드는 할배란 한국인의 정서에는 없다. 무슨 짓을 해도 그저 귀여운 손자이기에 용돈도 주고 세뱃돈도 주는 것이 할배다. 용돈, 세뱃돈이라는 것은 소위 명당 발복을 받는다는 것에 해당된다. 손자 중에서도 할배를 항상 쳐다보고 있는 손자 녀석이 더 많이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인지상정이다.
남명은 할배 용돈과 세뱃돈인 천왕봉 정기를 더 받기 위해 천왕봉 방향을 가로막는 서재를 생략시켰던 것이다. 이때 동재는 산천재 마당으로 굴러들어온 천왕봉 정기를 못 빠져나가게 막는 울타리 역할도 한다. 이것이 회룡고조형에 의해 설계된 산천재 배치다. 산천재의 회룡고조형을 논증할 수 있는 풍수문화재는 우리 땅 지천에 널려있다.
남명은 1561년에 산천재를 창건했다.
그보다 700년 전에 회룡고조형을 완성시킨 뼈대있는 풍수현장도 있다. 경북 수도산 수도암 삼층석탑이 그 현장이다. 수도암 삼층석탑과 가야산 상왕봉이 서로 쳐다보고 있는 회룡고조형이다. 이는 수도암과 가야산 해인사 풍수관계에서도 논증되고 있다. 당시 가야산 상왕봉의 회룡고조형에는 문제가 있었기에 삼층석탑을 세워 이를 할배로 만들었던 것이다.
석탑을 세운 창건주가 한국풍수 원조인 도선국사이고, 수도암 삼층석탑은 보물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기에 확실한 풍수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두 사진들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산천재와 천왕봉과의 관계가 삼층석탑과 상왕봉 장면과 통한다. 산천재나 삼층석탑이나 똑같이 산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암 삼층석탑은 회룡고조형에 따라 설계된 남명 산천재를 논증시켜주는 또 하나의 문화재 현장임과 동시에 최초의 비보풍수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명문사학 서원을 가다] 장영훈 도서출판 담디
초판발행 2005년 7월 7일
산천재
자동차를 타고 덕산으로 들어서다보면 지리산 천왕봉이 정면으로 올려다보이는가 하면 왼편의 덕천강 옆에 산뜻하고 정갈한 모습의 기와집이 노송과 어울려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기다란 토담 위에 기와를 얹었고 집 밖에도 수백 평의 뜰에 잔디를 심고 조경을 한데다 주차장도 마련돼 있어 예사스러운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덕산 시외버스 정류소를 300m쯤 남겨놓은 이 한식기와집이 곧 산천재(山天齋)이다.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이다.
여기가 곧 남명 조식 선생이 회갑을 맞이한 명종 16년(1561년) 합천 삼가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입덕문을 거쳐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산천재(山天齋)’라 이름하여 지리산 중심부에서 최초로 유학의 강학도장을 열었던 곳이다.
이 산천재가 자리한 곳은 아주 절묘한 명당이다. 중산리 계곡에서 흘러온 신천(新川) 물과 대원사 앞을 흘러온 삼장천이 여기서 한데 모여 덕천이란 이름으로 산천재 토담 아래로 내려간다. 두 끝의 물이 모인다고 하여 양단(兩端)이라고도 하고 두 시내가 큰 못[潭]을 이루면서 한 줄기로 합해진다고 하여 양당(兩塘)이라고도 한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의 남명의 그 이름난 시가 여기서 유래하며 ‘이윽고 찾아든 곳이 양당촌이라는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대나무를 길러 숲을 이루었고 감나무가 집들을 덮어 그윽하니 가히 무릉도원……’이란 남효온(南孝溫)의 ‘遊山記抄’의 마을이름도 거기에서 연유한다.
남명이 세운 산천재란 서당은 단칸 초옥이었다. ‘집 앞에 대들보가 없이 한 칸 초정을 세우고 때로 거기서 시를 읊었는데 그 집을 도토리집이라 불렀다.’는 게 진양지의 기록이다.
그런데 남명가족이 기거했던 집은 이 산천재에서 도로를 건너 북쪽 산기슭의 사윤동(絲綸洞)이라 불리는 마을이었다. 이곳은 예부터 산의 떠돌이들이 살아왔다고 위의 책이 적고 있다.
남명은 만년에 덕산으로 옮겨와 살게 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시로 노래했다.
‘우연히 사윤동에 살게 되어/ 오늘에야 조물주의 은혜를 알았네/ 예부터 숨겨진 곳을 숨어들기까지/ 어렵게 일곱 번을 왔다네’
남명은 합천군 삼가에서 태어나 부친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자 서울로 이사 가서 명문의 자제들과 사귀며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과거공부보다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하는 방대한 독서량을 보였다. 기묘사화 때 당쟁에 말려 부친이 파직되고 죽자 그는 삼가로 내려왔다가 다시 김해의 처가로 옮겨 18년간 제자를 길렀다. 45세에 모친상을 당한 그는 다시 향리인 삼가로 돌아와 제자들을 기르다가 회갑을 맞은 만년에 이 덕산으로 마지막 거처를 정한 것이다.
남명선생이 소년시절 서울에서 명문의 자제들과 어울려 많은 공부를 했던 것을 두고보면 그가 어떠한 벼슬자리도 마다하고 낙향하여 김해와 삼가를 오가다가 마침내는 지리산의 품에 안긴 것이 결코 예사스러울 수가 없다.
마음은 항상 지리산
남명은 어디에 살든 언제나 지리산을 그리워했고 실제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에도 17차례나 이 산을 찾았던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는 20세 때 벌써 지리산 천왕봉을 올랐었다. 그는 향리인 삼가에서 덕산동을 거쳐 법계사~천왕봉~향적사~영신사~신흥사~쌍계사~불일폭포~화개~악양의 코스를 밟았다. 이 등정로는 지금의 등산객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대단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명이 얼마나 지리산에서 살고 싶어 하기를 갈망했었는지는 10차례나 이 산을 찾고도 정착의 뜻을 이룰 수 없는 안타까움을 읊은 시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명종 13년(1558년) 열한 번째 지리산을 찾은 기행기 [遊頭流錄] 말미에 이렇게 썼다.
‘두류산을 열 번이나 찾아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가수촌 세 둥지에는 가난한 까치가 산다/ 전신의 백가지 계획이 모두 글렀으니/ 방장산의 맹약도 이제는 저버리게 되었네’
남명은 단 한 차례도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만권의 책을 읽어 후학을 가르치는 그의 학문과 덕망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임금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는다. 그가 38세 때 헌릉참봉이란 첫 벼슬이 내려진 것을 사양한 것을 시작으로 단성현감(丹城縣監) 등의 벼슬이 중종과 명종 임금에 걸쳐 계속 내려졌지만 끝까지 사양하였다.
그가 오직 한 가지 바라는 것은 지리산에 가서 사는 일이었다. 권세도 명예도 물욕도 지리산의 자연세계 앞에는 하나의 물거품보다 더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는 일찍부터 지리산을 찾을 때마다 깨닫고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남명처럼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살고 싶은 사람은 오늘에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관리상태 엉망진창
남명은 마침내 회갑을 맞은 노년이었지만 지리산의 품에 안겨 살게 된 것이 얼마나 좋았으면 ‘두류산에 살다’란 이런 시를 지었을까.
‘봄산 어디멘들 방초야 없으련만/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우니 자랑스럽다/ 빈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으리오마는/ 맑은 물 10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지’
맑은 물밖에 먹을 것이 없지만 지리산에 살게 된 것이 이처럼 감격스러웠던 남명의 ‘지리산 귀의’에 가슴을 함께 할 사람들이 혼탁한 오늘의 어지러운 세상에선 더 많을 법도 하다.
산천재는 현재 넓은 터에 새로 지은 기와집으로 잘 단장돼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작은 행랑채에는 ‘남명학연구원’이란 간판도 걸려 있다. 지난 86년 8월 24일 이 연구원이 설립되면서 고려대 김충렬(金忠烈) 교수가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산천재 입구에는 ‘조식(曺植) 유적’이란 큰 안내판이 내걸려 있다. 산천재 덕산서원(덕천서원이 맞음-위드) 세심정 별묘 신도비 묘소 등 남명의 유적지들이 ‘사적 제305호’로 지정돼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남명 선생이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유학의 강학도장을 열었던 역사적이자 향기높은 산천재의 속 모습은 어떠한가. 기자가 찾았을 때 산천재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문 남쪽 강비탈 나무 울타리 틈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 흔적이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보니 눈을 의심케 할 만큼 건물 내부가 엉망진창이다. 방문마다 창호지가 찢겨져 있고 어떤 문짝은 아예 돌쩌귀며 빗살까지 통째로 찢겨나가고 없다. 방바닥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어 마치 폐가를 연상케 한다.
산천재에는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별채의 행랑채엔 ‘남명학연구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역시 찢겨진 창호지 틈으로 목판 얼마가 쓸쓸하게 놓여있다. 물론 이러한 꼴이 된 데는 개구쟁이들의 장난에 따른 것이겠지만 번드레한 모습과 속 모습이 너무 다른 것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이 사적은 관리자도 없다는 것인가. 그게 궁금하다.
남명 선생의 족적을 찾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이 모양을 지켜보고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제대로 관리를 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지금과 같은 기와집이 아니라 원래의 초옥 도토리집으로 세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지리산365일 3권』 최화수 지음 도서출판 다나
1995년 1월 25일 4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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