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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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덕문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2 02:56:05     111

 

입덕문

 

진주에서 지리산(중산리 또는 대원사)을 찾는 차량들은 원지(院旨)의 단성교(丹誠橋)를 지나 잘 표장된 도로를 총알같이 달려 잠깐 사이에 덕산에 닿게 된다천왕봉 등정에 마음이 부푼 사람들은 덕산이라 불리는 곳을 눈여겨 볼 틈도 없고시외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이곳 정류소에서의 정차 시간을 짜증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이 덕산을 빼놓고 지리산을 말할 수가 없고지리산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한 덕산이다.

오늘날엔 덕천강을 끼고 2차선 포장도로가 잘 닦여 차량들이 쌩쌩 번개같이 내달려가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덕산을 잇는 도로가 없었다. 2차선 도로 확장포장도 10여년 남짓하지만 이곳에 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따라가다 석문을 통과해야 덕산동(德山洞)’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천왕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지리산 마을 중의 진짜 지리산 마을인 덕산은 1561년 남명(南冥조식(曺植선생이 61세의 나이로 찾아들어 운명하기까지 12년 동안 학문과 덕망을 베풂으로써 지리산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도 맡아오고 있다.

남명 선생이 덕산동을 찾아들 무렵의 이곳은 어떠했던가.

덕천강을 따라 한 좁은 벼랑을 타고 들어가니 발아래 강이 길게 누워 흘렀다양쪽 산자락에 단풍이 물들어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았는데아래에는 거울 같은 맑은 물에 고기떼가 헤엄쳐 놀고 새들은 숲에 날아들며 노래한다냇바닥의 돌들이 기이하고 거대하여 눈길을 끈다그저 즐거울 뿐이다이윽고 찾아든 곳이 양당촌이라는 마을이었다집집마다 나무를 길러 숲을 이루었고 감나무가 집들을 둘러 그윽하니 가히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남효온(南孝溫)의 遊山記抄’, 晉陽誌].

지난날의 덕산이 얼마나 이상향이었는지는 위의 글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그에 앞서 단성(丹誠쪽에서 벼랑길을 타고 들어가면서 발아래 길게 누워 흐르는 덕천강의 아름다움을 지켜보며 느끼는 감동이 더 앞선다.

더구나 이 벼랑길을 따라가는 곳에는 큰 자연석문이 있었다청학동(靑鶴洞)을 이야기할 때 항상 등장하는 바로 그 석문이다. “석문을 지나 물을 따라 수십리 들어간……의 그러한 석문이다그러나 이곳의 좁다란 벼랑길도 자연석문도 이제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없다.

60여 년 전 덕산에 이르는 도로를 개설하면서 자연경관을 무지막지하게 파헤치고 자연석문도 없애버린 것이다그 석문은 보통 석문이 아니었다남명(南冥선생이 덕산으로 옮겨올 때 입덕문(入德門)이라고 명명했던 석문이다.

 

다시 옮겨세운 刻字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아희야 무릉도원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남명(南冥선생이 덕산을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단정을 내리고, 61세란 고령에 고향을 등지고서 거주처를 이곳으로 옮기기까지는 지리산을 무려 17차례나 탐승했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그가 얼마나 지리산을 동경했는지는 화개동천과 청학동 신흥동 3마천의 용류담과 휴천계곡 3삼장의 노루목(유평계곡)과 왕산 1단성 단속사 1악양과 청암 옥종방면 3회를 찾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 덕산은 7차례를 다녀간 끝에 마침내 옮겨 살 곳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남명 선생은 명종 16(1561회갑을 맞이한 해에 합천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덕산으로 찾아들었다그는 자연석문을 지나기에 앞서 이 석문을 입덕문(入德門)’이라 명명했는데 고제(高弟)인 이제신(李濟臣선생이 각자를 했다.

남명 선생은 또 절경의 덕천강으로 내려가 갓끈을 씻었다입덕문 아래 강가의 널찍한 반석에는 탁영대(濯纓臺)’란 각자가 있는데 남명선생이 덕산동을 찾아들 때 갓끈을 씻은 곳이라 하여 후학들이 새겨놓은 것이다.

또 이 탁영대에서 50m 가량 떨어진 벼랑 위에 노송이 한껏 운치를 뽐내고 있는 것과 어울린 높고 널찍한 바위가 있다이 바위에서 남명 선생은 덕천강의 절경을 시로 읊고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을 법하다이 바위엔 그래서 덕암(德岩)’이란 각자가 있다.

도로를 개설하면서 자연석문인 입덕문은 없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탁영대와 덕암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남명 선생 후학들은 이곳의 남명 선생 자취를 보존하여 그의 유덕을 기리고 자연경관도 보존하기 위해 지난 60년 입덕문보승계(入德門保勝契)’를 만들었는데 82년에는 탁영대 위의 도로변에 입덕문(入德門)’이라 새긴 자연암석을 옮겨 세우고 그 옆에 입덕문기(入德門記)’라는 안내문도 비석에 새겨 놓았다.

 

현재 계원 7백여 명

입덕문기’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곳은 4백여 년 전(1561), 남명 조식 선생이 삼가(三嘉)로부터 덕산(德山)으로 존거(尊居)하실 때 동구(洞口)의 천연석문을 입덕문이라 명명하시고 소요음영(逍搖吟詠하시던 유서깊은 곳이다. 60여 년전 도로 개설로 옛 석문은 없어졌으나 선생이 남기신 정채(精采)와 유향(遺香)은 지금도 그윽하다입덕문 삼자(入德門 三字)는 선생의 고제(高弟도구(陶丘이제신(李濟臣선생의 필적이라 한다. 625병화로 주위경관이 크게 황폐하자 후학들이 1960년에 계(입덕문 보승계)를 닦아 고적(입덕문 탁영대 덕암)을 보호하여 선현의 유덕을 추모하고 계곡 일대의 수목 토석 어족 조수 등 자연 보존을 하기 위해 입덕문 각자를 19826월 22일 옮겨 세웠다입덕문보승계’.

이 입덕문 각자와 탁영대 덕암의 남명선생 발자취가 서린 곳은 덕산 약 2km 못 미친 곳에 한데 어울려 있어 옛날과는 엄청나게 달라졌지만 지금도 아름다운 경승지로 눈길을 끌고 있다덕암 주변의 노송은 도로공사로 고사한 것도 있으나 운치가 넘치며 탁영대 주변 반석들은 수백 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명당이다.

남명선생의 높은 학문과 고매한 정신을 기리고 따르는 문중 후손과 전국의 학자 등 7백여 명이 입덕문보승계를 만들어 매년 이곳에서 모임을 갖고 선생의 학문과 뜻을 오늘에 계승하여 널리 펼 수 있는 사업계획 등을 의논하고 있다고 한다.

남명선생의 13대손인 조재영(曺在永(로타리산장 관리인)는 덕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향리를 지키고 있는데 입덕문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무엇보다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곳은 철따라 자연의 변화도 아름답고 물이 맑아 그야말로 선경 중의 선경이지요지금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도로를 개설하기 전의 옛 모습은 얼마나 좋았을 것인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데 옛모습을 잃고 만 것에 큰 안타까움이 따릅니다.”

조씨의 말을 실감나게 해주는 글이 진양지(晉陽誌)’ 1권에 실려 있다.

덕천의 넓은 반석을 감돌아 파이고 굽어진 바닥을 만들어 깊지도 얕지도 않으면서 수양산과 검음산 사이를 내려가 덕천 벼랑에 이르러니 여기가 두류 만학문이다여기서부터 골이 더욱 깊어지면서 넓게 열렸는데 산과 물이 맑고 아름답고……

지리산을 찾는 이라면 누구라도 입덕문을 모르고 지나서는 안 된다그것은 지리산의 정신을 모르는 것이나 같다그런데도 입덕문 옆에 기자가 오랜 시간 서 있었지만 이곳을 질주해 가는 수많은 승용차며 관광버스 가운데 어느 차량도 잠깐 정차하는 것조차 아예 볼 수 없었다.

 

『지리산365일 3권』 최화수 지음 도서출판 다나

1995년 1월 25일 4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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