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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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남명조식 2
남명 조식(1501~1572)
조식(曺植)은 1501년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판교에까지 이른 부친 조언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 5, 6세경부터 26세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 성운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문과에 실패한 후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다가 문득 크게 깨닫고 학문의 대전환을 이루었다고 한다.
26세 되던 해에는 부친상을 당해 고향 선영에 장례지낸 뒤 삼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의령 자굴산 산사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때인 1531년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살면서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1538년에는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였고, 45세 때 모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치른 뒤 삼가 토동에 계부당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후 전생서 주부 단성현감 조지서사지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55세 때인 1555년 남명은 다시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문을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561년 61세 때에는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德川洞: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를 지어 별세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하였다. 그리고 1566년에는 상서원 판관을 제수 받았으나, 왕에게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다시 덕천으로 돌아왔다.
남명은 당시의 학문이 이기(理氣) 사칠(四七) 등 형이상학적 명제 일변도로 경도된 것을 개탄하며 실천적인 수양을 강조하였다. 66세 때인 1566년에는 초야의 어진이를 부르는 소명(召命)이 있어 상경하여 임금을 배알하였다. 1567년 즉위한 선조가 다시 남명을 불렀으나, 무진봉사(戊辰封事)라는 상소문을 올리고 사양하였다. 남명은 이 상소문에서 선조에게 명선(明善)과 성신(誠身)을 통해 국가를 다스려 달라고 진언하였다. 또 그는 공자 안자 정자 주자의 학문을 주로 하되 주자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노장이나 불교라 할지라도 학문에 도움이 되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학문적 개방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 실천 지향적이어서 공담적(空談的) 성격을 지닌 이론위주의 학문을 싫어하였고, 오직 실천이 따르지 못할까 우려하였으며, 나아가 백성들의 현실생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남명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의義를 강조하였다. 산천재 양쪽 벽에 이 두자를 써 붙여놓았을 뿐만 아니라, 평소 지니고 있는 단도(短刀)에도 “내명자경(內明者敬: 안을 밝히는 것은 경), 외단자의(外斷者義: 밖을 결단하는 것은 의)”라는 글귀를 새겨 수양과 학문의 지표로 삼았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당시 사회현실과 괴리된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즉 그는 당시의 선비들이 “세상의 학문한다는 사람들이 생활의 절실한 문제는 버려두고 하늘의 이치만 논하고 있다”라고 하여 주자학에 치우친 당시의 학풍을 비판하였다.
16세기 영남유학의 중심은 조식과 이황이었는데, 두 사람은 각자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여 유학을 전승 발전시켰다. 조식은 136여 명의 문인과 162명의 사숙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이황은 309명의 문도를 양성하여 16세기 후반 이후 근세에 이르기까지 영남유학의 큰 맥을 이루어 나갔다. 즉, 영남의 남부에는 오건(산청)과 정인홍(합천) 등 조식의 문도들이, 영남 북부에는 조목(예안) 김성일(안동) 류성룡(안동) 등 이황의 문도들이 스승들의 학문정신을 이어나갔다. 이 중 조식의 문인들은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경상좌도 전라도 충청도는 물론 서울에 이르기까지 학문적으로는 남명학파를, 정치적으로는 북인세력을 형성함으로써, 광해군으로 하여금 현실을 중시하는 내치와 진취적이고도 실리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게 하는 외치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대에 이르러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며, 남명 문인 중 핵심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던 정인홍이 인조반정 후 몰락하자 남명에 대한 폄하와 함께 그 문도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남명은 72세 때인 1572년 음력 2월 8일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에서 별세하였다. 운명할 무렵 그는 제자들에게 “우리 집에 이 경·의(敬·義)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다. 성현의 온갖 말씀이 이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사간원 대사간에 추증하였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그의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 뒤에 龍巖書院으로 개칭)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위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1615년에는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貞)’이란 시호도 내려졌다. 저서로는 문집 『남명집』과 독서하면서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지리산 이천년]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 보고사
2010년 11월 19일 초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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