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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남명 조식 1
조선시대 사림과 남명학파
실천을 중시한 조선의 큰 선비, 남명 조식
남명의 처사적 삶
남명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6월 26일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아버지 조언형(曺彦亨)과 어머니 인천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활동하던 16세기는 사림들이 정치세력화하면서 기존 정치세력인 훈구세력과 대립을 겪으며 연속적으로 사화가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기에 조식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조식은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해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아버지가 지방관으로 전전하는 와중에 유교 경전을 비롯해 천문, 지리, 의학, 수학, 궁마(弓馬) 등 지식과 재능을 익혔다. 특히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기 위해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18세 때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는 당시 청송계곡 일대에서 생활하던 성수침(成守琛)과 성운(成運)을 만났는데, 이들의 영향을 받아 높고 넓은 인생의 경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그는 유학 서적 이외에 노장(老莊)과 불서(佛書)를 섭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세가 되던 해인 1519년(중종 14)에 발생한 기묘사화는 그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숙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며, 그의 아버지 또한 파직되었다. 이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삼가로 내려갔다. 그러나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여의치 않자 1531년 31세 때 김해 탄동의 부호였던 처가로 가 산해정을 세우고 약 18년 간 학문을 연마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다.
김해에서 점차 명성을 날리면서, 그는 사림의 영수로 추앙되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 조정에서는 그에게 관직을 제수하면서 출사를 종용하였다. 1538년(중종 33) 당시 조정에서 활동하며 사림들에게 명망이 높았던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참봉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8세 때 고향인 삼가로 옮겨 계부당과 뇌룡정을 지어 생활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다. 61세 때는 지리산 자락 밑의 덕산으로 이사해서 산천재(山天齋)에 거처하며 여생을 마쳤다. 이 동안에도 조식은 출사하지 않고 처사로서 생활하였다. 1554년(명종 9)에는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황의 권유마저 물리쳤고, 이듬해 또 다시 벼슬을 내렸으나 거부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실로 처사적인 선비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로써, 임종시에도 스스로 처사(處士)로 불러주기를 당부하였다.
실천을 강조한 사상가
조식의 처사적 생활은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이어졌다. 한 예로 1555년(명종 10) 조정의 부름을 거부하며 올린 상소에서 “나라의 일이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라고 하며 정치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그의 이 같은 비판은 근본적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는 <민암부(民巖賦)>에서 “백성들은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뒤집기도 하네”라며 위정자들이 백성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서리(胥吏)의 작폐로 인해 망국에 이를 수도 있다는 이른바 ‘서리망국론’ 또한 백성을 위한 정치가 올바른 정치라는 생각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에 바탕한 것이었다. 곧 당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은 ‘수기(修己)’의 전제로 인간의 본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할 필요성에 주목하고, 사단(四端: 仁, 義, 禮, 智)과 칠정(七情)에 대해 깊이 연구하였다. 이에 비해 조식은 수기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은 이황과 같지만, 수기의 방법으로써 ‘경(敬)’을 해석하고 바로 실천의 문제로써 ‘의(義)’를 중시하였다.
조식과 이황의 학문적 입장 차이는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측면이 많다. 이황은 스스로 벼슬보다는 은둔을 원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오랜 관직생활을 통하여 많은 문인들을 정계에 포진시켜 놓았던 만큼 현실 개혁보다는 안정적인 현실생활을 강조하는 경향이 컸다. 반면에 조식은 시종일관 비판자적인 위치에서 현실 모순을 인식하고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조식은 임종시까지도 ‘경의(敬義)’ 두 글자를 쓸 정도로 수기와 실천을 강조했다. 문인인 김우옹에게는 ‘경’의 표식으로 성성자(惺惺子: 항상 깨어있다는 의미의 방울)을, 정인홍에게는 검을 준 사실은 그러한 남명의 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조식의 이런 점은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임진왜란 때 많은 문인이 의병활동에 나서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수용한 남명
조식은 성리학자였다. 그러나 이황과 같이 학문 자체에 몰두하기보다는 선학들이 주장한 학문의 요점을 밝히고 이를 실천에 옮긴 인물이었다. 또한 실생활에 필요하다면 성리학 이외의 학문도 수용하였다.
조식의 학문에 대해서 이황은 “남명은 비록 이학(理學)으로 자부하고 있지만 그는 다만 하나의 기이한 선비로 그의 이론이나 식견은 항상 신기한 것을 숭상하였다.”고 평가한 바 있다. 이황은 그가 도교의 노장사상을 수용하고 양명학자와 접촉하는 등의 행동을 이단이나 혹은 신기한 것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조식은 평소 자신이 강조하던 ‘경(敬)’이 도가의 수련법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의 서실을 노자가 지칭한 이상사회에서 유래한 용어인 ‘계부(닭이 알을 품는다는 뜻)’와 《노자(老子)》에서 “죽은 듯이 있다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침묵하다 우레처럼 소리를 낸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뇌용사’라고 하여 노장사상과의 깊은 관련성을 드러냈다. 조식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문인이며 동시에 외손녀 사위인 곽재우는 도가의 양생법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다.
조식은 노장사상의 수용 이외에도 당대 양명학자인 경안령 이요(李瑤)와 서신 교환하는 것을 보면 양명학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양명학 관련 저술이 보이지 않고 있으며, 실천성도 성리학에 바탕한 것이어서 단정적으로 양명학자로 파악하기는 곤란한 측면도 있다. 또한 조식은 불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인식을 보여 서산대사 휴정, 사명당 유정과도 교유하는 등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을 가졌다. 자칫 성리학 일변도에서 획일화될 수 있는 위험성을 탈피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신병주, <남명 조식의 학풍과 남명문인의 활동> 《남명학연구논총》3, 1995
허권수, 《남명 조식》, 지식산업사, 2001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 출판사 역사공간
남명조식의 지리산 산행과 <유두류록(遊頭流錄)>
조선 유학의 큰 선비 남명 조식은, ‘지리산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호를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 지을 만큼, 지리산을 경외하였다. 합천 삼가에 살던 남명은 모두 열 두 차례나 지리산을 올랐다. 그는 덕산동(德山洞)으로 세 번, 청학동, 신응동으로 세 번, 용유동(龍遊洞)으로 세 번, 백운동으로 한 번, 장항동(獐項洞)으로 한 번 등 지리산을 산행하였고, 열두번째 산행 때 산행기인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다.
마지막 산행은 그가 60을 바라보던 58세 때인 1558년(명종 13)의 일이었다. 남명은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환갑이 되던 해에 지리산 자락 덕산으로 옮겨와 말년을 지냈다.
남명의 열두번째 산행은 4월 11일부터 25일까지 보름 동안 이루어졌다. 그는 동생 조환, 유생 원우석과 함께 삼가현 토동 자신의 집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남명의 산행에는 여러 사람들이 따랐다. 자형 이공량이 그의 아들 이준민과 함께 동참하였고, 진주목사 김홍과 동생 김경, 아들 김사성, 전 고령현감 이희안과 청주목사 이정, 이정의 동생 이백, 그리고 유생 백유량 등 명망있는 문인과 유생들이 남명의 산행을 좇았다. 남명 일행이 지리산을 찾았을 때는 섬진강 일대에 진달래, 철쭉이 만발하고 있었다.
남명이 택한 열두번째 산행의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그는 진주 금산에 살던 자형 이공량의 집을 찾아 3일 간 머물렀다. 그리고 사천에 거주하는 이정의 집을 찾았으며, 이때 김홍, 이정, 이백 등이 산행에 동참하였다. 남명 일행은 사천에서 배를 타고 곤양을 거쳐 섬진강 하류를 따라 섬진나루, 악양, 삽암, 도탄 등을 지나 쌍계사에 이르렀다.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갈 때 남명은 삽암에서 고려 말의 처사 한유한(韓惟漢)의 옛 집을 둘러보았고, 도탄을 지날 때에는 우리나라 도학의 실마리를 열었던 정여창의 옛 집을 생각하는 등 지리산 자락에 남겨진 선현(先賢)들의 자취를 찾기도 하였다. 남명의 지리산 산행은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 또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수련의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행은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행로를 더 나아가지 못하고 쌍계사에 머물렀다. 3일 간의 비가 그치자 남명은 쌍계사를 찾은 호남 유생 4명과 함께 보조국사 지눌이 머물렀던 청학동 불일암(佛日庵)으로 향하였다. 다음날에는 산길을 따라 지리산 능선 반대편에 자리한 신응사(神凝寺)를 찾았다. 그러나 일행은 연일 계속되는 비로 계곡물이 불어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었다. 남명이 신응사에 머물고 있을 때 호남의 선비 기대승도 마침 상봉에 올랐는데, 비 때문에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남명은 신응사에서 비가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3일 뒤에 쌍계사를 거쳐 악양현으로 내려와 지리산 산행을 정리하였다. 산행을 시작한 지 열 사흗날이 되는 4월 24일에 남명은 귀향길에 올랐다. 하동, 광양 일대가 한 눈에 보이는 삼가식현(三呵息峴)을 넘어 횡천을 거쳐 북천의 정수역에서 묶었다. 다음날 일행은 덕천강변 다회탄가의 칠송정을 살펴본 뒤 경호강을 건너 삼가로 돌아왔다. 지리산 산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지리산 유람기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작성하였다.
<유두류록(遊頭流錄)>과 남명
남명이 여러 차례 지리산을 찾은 것은 단지 지리산과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산수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지리산에 배어있는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등 선현의 흔적을 더듬으며 부족한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유두류록(遊頭流錄)> 곳곳에 남아 있다.
사람의 습관이란 잠깐 사이에 낮은 데로 치닫는다. 청학동에 올라가서는 마치 신선이 사는 산에 올라 신선이 된 듯하였지만,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겼다. 신응동에 들어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은하수에 걸터앉아 하늘로 돌아가거나 학을 부여잡고 공중으로 솟구쳐 다시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 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좁은 방에서 구부리고 자면서 그것을 자신의 분수로 달게 받아들였다. 평소의 처지에 만족하더라도 수양하는 바가 높지 않으면 안 되고 거처하는 곳이 작고 초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이 선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고 악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인한 것이다. 위 로 향하는 것, 아래로 치닫는 것은 모두 사람이 하는 것이니, 단지 한 번 발을 들어 어디로 향하는가 에 달려있다.
남명은 산행 동안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세 군자의 자취를 생각하였다. 그는 벼슬보다 도학의 수련과 효행의 실천에 앞선 세 군자의 행적을 더듬으며, “명산에 들어온 자 치고 그 누군들 마음을 씻지 않겠으며, 누군들 소인이라고 하길 달가워하겠는가? 그러나 군자는 군자가 되고 소인은 소인이 되고 마니, 한 번 햇빛을 쬐는 정도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하면서, 항상 스스로 삼갈 것을 마음에 새겼다.
남명은 엄격하게 자신을 수양하면서도, 그 수양이 한낱 마음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남명에게 현실을 무시한 수양은 신선이 되기만을 꿈꾸는 허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남명은 자신의 내면을 수양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애썼다. 이러한 남명의 생각은 지리산의 웅혼한 기상에서 비롯하였다. 남명은 여러 차례 지리산을 올랐지만 언제나 부족한 자신을 꾸짖었다.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올라가는 사람이 세 번이나 숨을 내쉰다는 삼가식현에서 “두류산의 원기가 여기까지 백리나 뻗어 왔건만 여전히 높이 솟아 작아지거나 낮아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산 중에서 두류산보다 큰 산은 없고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두류산이 가까이 있지만,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구나. 그런데 하물며 두류산처럼 크게 어질지도 못하고 눈앞에 닿은 듯 가깝지도 않으며, 여러 사람의 눈에 환히 드러날 정도로 밝지도 않은 사람은 어떠하겠는가”라고 자신을 호되게 질책하였다.
지리산에 대한 남명의 감정은 신앙에 가까우리만치 경건하였다. 그가 <유두류록>을 남긴 것은, 지리산의 한 모퉁이를 빌어 자신의 일생을 마치려 한 깊은 뜻에 비롯되었다. <유두류록>에서 “몸을 보전하는 백가지 계책이 모두 어긋났으니 이젠 방장산과의 맹세조차 저버렸구나”라고 탄식하였지만, 지리산은 그의 삶에서 영원한 정신적 지주이자 표상이었다.
남명이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 시구는 그러한 남명의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씀 題德山溪亭
천 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 請看千石鐘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 非大扣無聲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 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天鳴猶不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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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영 외, 《체험의 문학-국토기행》,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7
최석기 외 옮김,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돌베개, 2000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 출판사 역사공간
남명학파의 문인들
남명학파의 형성
남명은 서울에서 잠시 생활하기도 하였으나, 곧 낙향하여 처가인 김해와 지리산 덕산에서 주로 학문활동을 하였다. 따라서 남명 학맥의 주요 무대는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상우도가 되었다. 특히 남명은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인사들을 문인으로 받아들여 산해정과 산천재 등지에서 남명학파로 지칭되는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남명학파의 지역적 범위는 주로 경상우도에 치우쳤다. 대체로 진주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김해, 밀양, 청도, 북쪽으로는 창녕, 현풍, 성주, 서쪽으로는 산청, 함양, 하동 및 남쪽으로는 사천, 고성 등지에 미쳤다. 퇴계학파가 주로 안동 일대에 치우친 것과 대비된다. 남명학파의 중심지인 경상우도는 고려 무신 집권기와 몽골침략기에 민란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주민의 기질도 과격하고 현실 대응자세가 저돌적이며 직선적인 경향이 다분하다.
남명학파의 중심지인 경상우도는 초기 사림세력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5세기 후반 영남사림파의 종장인 김종직이 밀양에서 출생하여 함양과 선산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지방의 문교를 진흥시켰고, 그의 문하에는 우도 출신 사림들이 다수 모였다. 그의 3대 제자라고 할 수 있는 김굉필(현풍), 정여창(함양), 김일손(청도)를 비롯하여 유호인, 표연말, 신영희 등이 모두 우도 출신이었다. 15세기 후반 경상우도의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동향은 16세기 후반 남명학파 형성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으며, 남명이 삼가에서 김해를 거쳐 말년에 덕산에 정착하여 강학하면서 진주 일대는 남명학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남명 사후 문인들을 중심으로 1576년9선조 9) 산천재 부근에 덕산(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그의 출생지인 삼가현의 회현(晦峴)에 회산서원을 세웠다. 1578년에는 부사 하진보가 향촌 인사들과 공모하여 김해 탄동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기축옥사로 남명 문인들이 큰 타격을 받고 곧이어 남인이 집권해서 북인은 수세에 몰려 있었으므로 선조 말까지는 조식에 대한 추숭사업이 중지되었다. 광해군의 등극과 함께 대북(大北)세력이 집권하게 되자, 대북세력의 산림이었던 정인홍은 스승의 추숭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609년(광해군 1)에는 덕천서원과 용암서원, 신산서원에 사액하였고, 1614년에는 조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는 한편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서울의 삼각산 백운봉 아래에 조식을 봉사하는 서원을 건립하여 1618년 백원서원이란 사액을 내렸다.
남명학통을 강화하려는 정인홍의 노력은 스승의 문묘 종사 추진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인홍은 1611년(광해군 3)은 이른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려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에 대해, “두 사람은 모두 유학하는 사람으로 소인이 득세하여 군자를 해칠 때 이들을 구하지 못한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였다.”는 등으로 그들을 비판하면서 남명과 퇴계의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이어 그는 스승 조식을 문묘에 모시기 위해 관학 및 팔도 유생들에게 상소하게 하였으며, 1619년에는 경상우도 유생 수백 명이 다시 상소하였으나 이는 끝내 실현되지 못하였다.
남명문인의 의병활동
조식은 평소 무예와 병법 뿐만 아니고 국방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장차 왜구의 화가 있을 것임을 예견하였다. 이러한 그의 인식은 문인들에게 전해져 전란을 대비하고 항전하는데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남명 문인들의 의병활동은 스승의 실천정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후 일본군은 약 20여 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등 거칠 것 없이 북진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군을 신병(神兵)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조총을 귀신의 무기라고 하며 두려워하였다. 지방의 수령들과 변방 장수들은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서 고을과 성을 버리고 깊은 산속으로 도망하기에 급급하였다.
관군의 무력함을 대신한 것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었다. 주로 전직 관료나 명망있는 유생들을 중심으로 봉기한 의병들은 “신하로서 충에 죽고, 자식으로서 효에 죽어야 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신분의 귀천을 떠나 하나로 뭉쳐 일본군에 저항하였다. 일본군이 상주를 점령한 4월 하순에 유생 곽재우가 의령에서 일어난 것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학연과 지연을 중심으로 서로 호응하였다. 임진왜란의 의병 가운데 남명 문인들의 의병활동은 특히 주목된다.
남명 문인은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의병 대열에 합류하였다. 당시 이 지역에는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 청도의 박경신 등을 비롯해 이로, 조종도, 하락, 전치원, 이대기 등 많은 의병장이 활동하였다.
남명 문인들은 자신의 기반이 되었던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봉기하였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호남지방의 의병장들과도 연합하여 항전하였다. 연합작전에는 호남지방 사류들과 경상우도 사류들의 교분이 미리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의병장 박성무의 경우 남명 조식에게 성리학을 전수받고, 호남 의병장 김천일의 문하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지리산 중심의 생활권이 남원 등지로 확대되고, 남해안을 따라가는 교통로가 확보되면서 이전부터 사상적,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
남명 문인들의 의병활동은 경상우도의 지역 방어에 그치지 않고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보호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당시 경상도 초유사로 활약하였던 김성일(金誠一)은 경상우도가 무너지면 호남이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국가의 붕괴를 자초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경상우도와 호남의 상관성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으로써, 임진왜란의 극복과정에서 남명 문인들의 활동이 주목되는 이유이다.
퇴계학맥으로 이탈
인조반정은 남명학파를 크게 위축시켰다. 물론 남명학파의 세력 위축이 비단 인조반정 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광해군 대를 전후하여 남명 문인들 가운데 일부가 퇴계문하로 이탈해 갔다. 대표적으로는 오건, 김우옹, 정구,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온건한 기질과 정치관을 가지고 중앙 고위 관직까지 진출했다는 점이다.
성주출신 김우옹은 부친 김의참이 일직부터 남명과 교류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도 15세 때 남명의 제자인 오건이 성주교수로 부임해 오자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또한 그의 부인은 남명의 외손녀로 회령부 만호 김행의 딸이었다. 이러한 관계 때문인지 50세 때 발생한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의 일파로 지목받아 회령에 귀양가기도 하였다. 다만 그는 남명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도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생애 후반에는 오히려 퇴계의 문인들과 긴밀한 교유관계를 가졌다. 그는 선조 초반 동인과 서인이 나누어지는 상황에서 이들의 조정과 중재에 앞장섰다. 이는 타협을 중시하는 그의 온건한 정치관에 바탕한 것으로, 반대세력에게 우유부단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정구는 퇴계와 남명의 가르침을 동시에 받았다. 그의 출신지가 성주라는 지역적 위치와 최영경이나 김우옹과의 관계를 고려한다면 남명계에 가깝지만 성리학의 이론적 측면을 중시한 학문관은 퇴계 계통에 가깝다. 그러한 이유에서 정구는 말년에 남명보다 퇴계에 기울어지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선조가 남명과 퇴계를 평가하라고 질문하자, 그가 학자들이 접근하기에는 남명보다는 퇴계가 낫다고 한 답변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정인홍이 1611년 제출한 ‘회퇴변척소’ 이후에는 사류들의 공론이 정인홍에게서 멀어짐을 알고, 문위, 조임도 등을 규합하여, 정인홍이 주도한 대북세력의 반대세력임을 분명히 하기도 하였다. 정구의 저술인 《심경》 등에 보이는 성리설은 퇴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성리설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의약, 풍수지리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남명이 추구하였던 박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곧 정구는 퇴계와 남명의 학문을 절충하면서도 정치적 입장에 의해 퇴계 문하로 이탈해갔다고 할 수 있다.
남명 문인들은 기축옥사로 최영경이 억울하게 죽자 그의 신원운동을 펼쳤으며 임진왜란의 국난을 맞이해서는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광해군 즉위 후 정인홍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전개한 회퇴변척을 계기로 많은 이탈자를 보게 되었다. 물론 일부 문인들의 경우 시세에 영합하여 이탈해 가고 또한 후손들에 의해 더 큰 영향력을 지닌 퇴계의 학통에 선조를 올려놓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 광해군대를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남명을 계승한 강우지역의 학맥
인조반정 이전에 한강 정구가 사망하고,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처형 당하면서 낙동강 서쪽의 강우(江右)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는 크게 위축되었다. 물론 인조반정 직후 정인홍 문인들을 중심으로 일부 북인세력과 결탁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시도한 적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정치적, 학문적으로 남명학파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인조반정과 함께 남명학파를 위축하게 만든 사건이 1728년(영조 4)에 발생한 무신란이었다. 영조 즉위 초 경종을 지지하며 남인과 일부 소론세력의 주도 하여 발생한 무신란 당시, 안음을 중심으로 일어난 정희량과 합천을 중심으로 정희량에 동조하여 일어난 조성좌는 정인홍의 문인 정온과 조응인의 후손들이었다. 이로 인해 난 진압 후 남명학파의 본산이었던 강우지역은 반역향으로 지목되면서 더욱 위축되었다.
당시 집권 노론세력들은 이 지역에 대하여 50여 년 동안 과거 응시를 제한하는 한편 사족들의 노론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초까지 진주 및 인근 지역에 거주하면서 덕천서원 운영을 주도하였던 하징의 후손들과 권준의 후손들이 노론화되었다. 아울러 17세기 초부터 퇴계학맥이 강우지역에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 전반 이만부가 덕천서원의 원장이 되면서 퇴계학맥과 깊은 교분을 쌓아나갔다. 이후 퇴계학파의 중요인물인 이현일과 김성탁 등이 광양에 유배된 것을 계기로 문인이 되거나 교류하면서 퇴계학맥에 근접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이 지역 학자들은 《남명집》의 중간(重刊)과 남명을 문묘에 종사하려는 남명 조식의 추숭 작업을 끊이지 않고 계속하였다. 또한 정조는 1796년(정조 20) 8월 13일 예조정랑을 덕천서원에 보내 남명에게 사제(賜祭)하면서 남명을 선양하였다. 이것은 당시 덕천서원의 원장이 정조의 측근세력이던 남인 번암 채제공이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19세기 이후 강우지역에는 기호남인의 영수 성재 허전과 영남 남인의 영수 정재 유치명 및 그의 문인 한주 이진상, 노론 계열의 노사 기정진 등의 학맥이 이어져 왔다. 이 가운데 이진상의 학맥은 면우 곽종석으로 이어졌으며, 곽종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회봉 하겸진, 심산 김창숙, 심재 조긍섭, 중재 김황 등이 있다.
한편 기정진의 문인으로는 삼가의 노백헌, 정재규가 주목된다. 정재규는 이 지역 노론계 학맥을 대표하며 남인계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진상이나 곽종석 등과 성리학뿐 아니라 남명의 학문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토론하였다.
물론 정재규 이전에 강우지역에는 일찍부터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있었는데, 진주에 거처하던 하명이 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하명이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기에, 스승으로부터 남명의 신도비문을 받을 수 있었다. 남명의 신도비문은 용주 조경과 미수 허목이 지은 것을 포함해 모두 세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허목의 글이 세워졌는데, 1900년대에 허목의 글이 쓰여진 비석을 무너뜨리고 송시열의 글이 쓰여진 비석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정재규였다. 정재규는 조성가 등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노론계열의 홍직필, 임헌희와 그를 이은 간재 전우 등이 문인으로 이름을 높였다. 이 지역 노론계 인사들은 호남의 간재 문하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허선도, <임진왜란의 극복과 영우의병> 《진주문화》5, 1982
이수건, 《영남학파의 형성과 전개》, 일조각 1995
신병주, <남명조식의 학풍과 남명문인의 활동> 《남명학연구논총》 3, 1995
이상필, 《남명조식의 학풍과 남명문인의 활동》, 고려대 박사논문, 1998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 출판사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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