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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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최치원 1
최치원의 삶
최치원은 신라 말에 활동하였던 사상가로 한국 유학의 종조이자 한국 한문학의 비조로 추앙되어 지금까지 존숭받고 있다. 그는 857년(헌강왕 1) 유교와 불교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당나라의 권위에 민감하였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견일은 경문왕계 왕실과 친밀하였는데 당시 왕실은 유학과 불법을 존숭하면서 숙위학생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따라 그는 868년(경문왕 8) 12세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최치원은 일찍부터 당나라 유학을 통해 높은 관직에 진출하려는 의지를 가졌다. 당에 들어가 태학에서 유학을 익혔고 6년 뒤 국자감 학생으로서 진사의 대우를 받는 생도시의 빈공진사시에 합격하였다. 876년 말단의 지방관직인 선주 율수현위에 임명되었지만 고급관료가 되려고 1년만에 사임하고 입산하여 시부와 책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당시 당나라 전역을 유린하였던 황소의 약탈 위협을 피해 회남절도사 고변에게 나아갔다. 그는 고변의 휘하에서 4년 동안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맡아 활동하면서 황소를 질책하는 <격황소서>를 작성하여 이름을 날렸다.
최치원은 당에서 얻은 명망을 자부하며 884년 가을 신라 사신 김인규, 사촌동생 최서원 등과 함께 금의환향의 길에 올라 이듬해 3월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후 국왕 측근의 문한직인 시독겸 한림학사를 맡아 왕실이 일으킨 불교 행사의 각종 발원문을 작성하고 왕명으로 사산비명을 찬술하면서 경문왕계 왕실의 왕권강화에 참여하였다.
최치원은 889년(진성여왕 3) 전국 곳곳에서 초적이 봉기할 즈음 태산군(지금의 정읍), 부성군(지금이 서산), 천령군(지금의 함양)등의 지방관으로 나아갔다. 893년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894년 진성여왕에게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시무책 10여조를 올려 아찬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시무책을 반대하는 세력이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책봉하자 지방 곳곳을 유랑하다가 897년 진성여왕을 따라 해인사에 은거하였다.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안녕을 기원하였던 왕실 측근의 관료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국왕이나 왕족과 교류하면서 왕실의 안녕을 염원하는 각종 불교 행사에 참여하며 글을 직접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892년 견훤이 신라의 서남 지역을 장악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자 후백제 건국 이전부터 동요하였던 서남 지역의 민심을 위무하려고 노력하였다. 천령을 비롯한 태산, 부성의 지방관을 역임한 것은 최치원이 지방사회의 안정을 꾀했던 진성여왕의 의도를 따른 결과였다.
그는 재당시절 절도사 밑에서 활동하며 당시 절도사들이 자신이 확보한 지역을 다스리면서 독자세력화 하였던 지방 사회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였다. 특히 말단 지방관을 지내며 지방 사회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그는 890년 무주도독 김일을 따라 직접 태산군과 부성군의 태수로 나아가 서남 지역의 민심을 회유하면서 후백제의 세력확장을 경계하려고 하였다.
학사루와 천령태수 최치원
892년 후백제의 건국은 신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신라 지방군을 규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세운 견훤이 무력을 앞세워 경주를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무진주(지금의 광주)를 수도로 삼은 견훤은 섬진강을 따라 남해안을 거쳐 낙동강으로 올라와 경주로 침입하거나 남원과 함양을 거쳐 합천, 고령, 청도를 침입하거나 남원과 함양을 거쳐 합천, 고령, 청도를 넘어 경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실제로 901년에 견훤은 남원과 함양을 거쳐 합천의 대야성을 위협하였다.
이미 신라 왕실의 지방 지배력 약화를 걱정하면서 태산군과 부성군의 태수로 스스로 나아갔던 최치원은 후백제와 접했던 군사전략상 요충지를 방어하려고 하였다. 그는 남원에서 합천을 잇는 지리산 북부의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천령군 태수를 맡았다. 최치원이 천령태수로 임명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견훤의 후백제 건국 이후부터 893년 사신으로 임명되기 이전의 시기였을 것이다.
함양군 함양읍에는 최치원과 관련된 두 곳의 유적이 있다. 대덕리에 있는 상림(上林)과 학사루(學士樓)가 그것이다. 대관림(大館林)이라고도 불리는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渭川)의 호안림(護岸林)이다. 상림은 최치원이 천령태수로 재직할 때 위천의 홍수 피해를 막고자 둑을 쌓아 강물을 돌리고 여러 종의 나무를 심어 만들었다고 전한다.
함양군청 앞 운림리에 있는 학사루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이 자주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던 곳이다. 후세 사람들은 최치원을 기려 이곳을 학사루라고 불렀다.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함양의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소실되었다가 1692년(숙종 18)에 중수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건물은 흥학재(興學齋), 함덕학교 등으로 운영되었으며, 군립도서관으로 이용되었다가 1979년 군청 앞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학사루는 조선시대에 무오사화가 일어난 진원지였다. 김종직이 함양 현감으로 있을 때 학사루에 올라 당시 관찰사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보고 “어찌 소인배의 글이 학사루에 걸려 있는가. 당장 철거하라”고 명령을 하였다. 이 일로 김종직과 유자광은 감정이 상했으며, 이들이 조정에 천거되어 중앙관직을 맡으면서 감정이 더욱 나빠져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발단이 되었다.
최치원은 전국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경주의 남산, 의성의 빙산,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마산의 별서 등은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그는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무책이 사실상 실행되지 못하고 진골귀족의 견제를 받자 경주를 떠나 곳곳을 유랑하였다.
당시 신라는 경상도 일대만을 지배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의 유랑지는 북쪽으로는 의성의 빙산 일대, 남쪽으로는 동래의 태종대 일대에 국한되었다. 합천의 청량사와 하동의 쌍계사는 함양의 학사루와 함께 지리산 일대에 남긴 유랑지였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시를 읊고 글을 지은 뒤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에 은거하였다. 합천 가야산 홍류동과 쌍계사 입구에 남겨진 석각과 함께 학사루에 전해지는 최치원의 행적은 세상을 등진 사상가가 말년에 신라 고유신앙의 자취가 남아 있는 지리산에 의지해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던 회한을 담고 있다.
지리산 일대에 남아 있는 최치원의 유적은 지리산 일대의 승려들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최치원은 쌍계사를 창건했던 혜소의 탑비를 직접 짓고 쓰기도 하였다. 유학자인 최치원은 혜소의 성품과 선사상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이로써 최치원을 통해 유학과 불교는 함께 융합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선종사상을 중심으로 교종불교를 이해하고 있던 조계종 승려 혜심이 13세기 초 송광사에서 ‘유불이 결국 하나의 근원에서 나왔다’는 유불동원사상을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이기백, <신라 골품체제하의 유교적 정치이념> 《신라사상사 연구》 일조각, 1986
이재운, 《최치원연구》, 백산자료원, 1999
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국민대 박사논문, 2001
지리산을 노래한 최치원의 시
어느 산승에게 줌
스님이여,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산이 좋다면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이 다음에 내 자취 한 번 보구려.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
지리산에 숨어 세상을 피할 때 쓴 시
우리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의 별천지라네.
신선이 옥베개를 밀어 일어나니
순식간에 천년이 지났네.
최치원은 말년에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입산하였다. 이 때 그는 자신의 이상과 욕심이 좌절되자, 현실세계를 등질 소회를 시로 남겼다.
<어느 산승에게 줌>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는 시이다. 시에서 그는 청산에 들어가 세속과 인연을 끊고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듭 다짐하고 있다.
<지리산에 숨어 세상을 피할 때 쓴 시>는 세속을 떠나 은거하였던 최치원의 행적을 후대 사람들이 거론하면서 그의 작품으로 구전된 시이다. 최치원은 이제 세상과의 인연을 개의치 않고 피안에 머물고 있다.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 출판사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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