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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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문익점
목화시배지와 문익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목화를 재배하였던 시배지가 남아 있다. 목화의 재배는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붓대에 숨겨 들여온 목화씨를 이곳에 심으면서 비롯되었다. 마을 입구에는 비각과 함께 <삼우당문선생면화시배지>라고 쓰여진 사적비가 있다. ‘배양(培養)마을’이라고 불리는 마을 사람들은 문익점의 업적으로 기리는 뜻에서 지금도 옛터에 밭을 일구어 목화를 재배하고 있다.
문익점(1329~1398)은 고려 말기에 활동하였던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일신, 호는 삼우당이며, 본관은 남평이다. 그는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고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에 좌정언이 되었으며, 이 때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 원에서 충선왕의 셋째 아들로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던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귀국과 함께 파직되어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뒤 문익점은 귀국할 때 붓대 속에서 넣어 가지고 온 목화씨를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단성에서 시험 재배하였다. 그는 목면을 보급한 공으로 1375년(우왕 1)과 1389년(창왕 1)에 각각 승진하여 간의대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하다가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1440년(세종 22)에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다. 현재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묘소가 있다.
목면 보급과 의복의 발달
전세계의 면(棉) 품종은 모두 6종류이다. 그 가운데 중국에 전래된 것은 원산지가 인도인 (아주면亞洲棉: 木棉)과 아프리카산 비주면(非洲棉: 草棉) 두 가지이다. 중국에 면화가 알려진 것은 한대에서 육조에 걸친 시기였다.
그러나 13세기 말 경에 황도파(黃道婆)가 취자차(取子車,: 씨를 뽑아내는 기계), 소사차(繅絲車): 실을 뽑아내는 기계) 등의 직기(織機)를 대중화하면서부터 목면이 널리 확산되었다. 곧 수작업에 의해 직포하기 어려운 목면을 씨를 분리하고 실을 방적할 수 있는 기계를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색이 목면포를 보고 읊은 시를 볼 때, 목면씨는 문익점 이전에 이미 전래되었다. 따라서 문익점은 단순히 목화씨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도입된 목화씨를 재배하고 그것을 방적할 직기를 도입, 보급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 직물수공업은 비단으로 만든 견직물, 모시로 만든 저직물, 삼베로 만든 마포직물 등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원나라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면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육상무역로가 형성되었다. 이에 고려의 대외무역도 크게 발전하였고, 유통경제 또한 활성화되었다. 직물수공업의 경우 견직물과 저직물의 생산과 유통은 원과 고려 지배세력의 호감을 받아 크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역구조가 바뀌고 직물수공업도 침체되었다. 때문에 고려의 직물과 의복은 지배층 위주의 견직물, 저직물 일변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복으로써 목면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었다. 특히 친원세력을 축출하려는 공민왕은 목면의 도입과 보급을 통해 농민들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려고 하였다.
목면이 재배되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의복은 대부분 삼베로 만들어진 옷이었다. 농민들은 추운 겨울철에 마포를 여러 겹 겹쳐 입으며 추위를 견뎠다. 마포의 생산은 대부분 여성들이 전담하였으나 생산 시간이 길고 생산 절차가 까다로운 고역이었다. 목면은 직물이 가진 보온성 때문에 농민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연작이 가능한 작물이면서 생산 절차가 간소하여 생산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목면은 사아, 활, 물레와 같은 직기를 사용하여 생산되었다. 목면의 재배는 직물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기에 목면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직물 생산성의 향상은 요역, 군역, 공물을 면포로 대납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농업경영에서 한층 자율성과 생산성을 확보하였고, 경제적 기반을 통해 정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목면의 도입과 재배는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익점이 지리산 일대에 목면을 재배한 것은 이 지역이 그의 처가였던 점도 있으나 기후가 온난하고, 이미 중국에서 들여온 차[茶]가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자세히 들여다보기
홍회유, 《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 과학백과사전출사, 1979: 지양사, 1989
최영호, <고려말 경상도지방의 목면 보급과 그 주도세력> 《고고역사학지》 5`6, 1990
위은숙, <고려후기 직물수공업의 구조변동과 그 성격> 《한국문화연구》 6, 1993
출처; [지리산 문화권] / 저자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 출판사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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