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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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서산대사
지리산 화개동천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 못지않게 서산(西山)대사의 높은 숨결이 배어 있다. 서산대사의 지리산 입산은 ‘산이 인물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영산(靈山)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해준다.
1520년 최세창(崔世昌)의 외아들로 태어난 운학(雲鶴)소년은 아홉 살에 어머니를, 다음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아가 된 그를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이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켰다.
‘서울에 가서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유생(儒生)들의 틈에 끼어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그 뒤 학문은 더 늘지 못했고, 벗들과 놀기만 했다. 하루는 한 학사님이 5,6명의 자제들을 모아 놓고 결의형제를 맺어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훈계 말씀을 했다. 거기서 3년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여 생원시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했다.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승이 전라감사가 되어 호남으로 떠났다. 우리 동문 세 사람이 의논 끝에 감사님을 찾아 전주로 갔다. 우리가 도착하고 보니 그분은 상을 당하여 서울로 돌아가고 없었다. 우리 세 사람은 답답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런 가운데 한 사람이 “천리길을 걸어 스승을 찾아왔다가 일은 틀렸으나 빈손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남쪽지방 산천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서로가 옳다 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출발하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운학소년이 훗날 휴정(休靜)이란 법명을 얻은 뒤 술회한 기록이다.
서산대사의 지리산 입산은 이처럼 우연하고 딱한 처지에서 이뤄졌는데 그가 지리산에 입산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큰 인물이 되기 어려웠음을 우리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학소년은 숭인(崇仁)스님의 권고를 받고 의신사(義信寺)의 한 암자에서 머리를 깎고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에서 시적(示寂; 1604년 세수 85세, 법랍 67년)했고 금강산 구월산 오대산 등에 머물기도 하여 지리산보다 다른 산과 더 깊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지리산 화개동천의 명당들이 모두 그가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했던 곳이며 그가 지리산에 입산하여 공부를 계속한 것이 무려 13년에 이른다.
그는 주위 사람의 권유로 31세 되던 명종 5년(1550년) 승과시험에 응시하여 중선(中禪)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어 3년을 지내면서 왕실과 인연 깊은 봉은사 주지직도 2년간 겸직했다. 그러나 산을 떠난 승려생활이 싫어 그가 다시 산으로 들어간다.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에 머물면서도 언제나 그의 가슴에는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대지팡이와 짚신만으로 이 절, 저 절을 전전하던 대사는 명종 15년(1560년) 그리운 지리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화개동천 신흥계곡의 피폐한 내은적암(內隱寂庵)을 다시 중수하고 그의 당호가 된 청허원(淸虛院)을 지어 비로소 자신의 거처를 마련했다. 청허원에서 대사는 많은 집필을 했는데 역작 ‘삼가귀감(三家龜鑑)’도 이곳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내은적암(內隱寂庵)에서 집필
대사는 <삼가귀감>의 원고를 산청 단성의 단속사(斷俗寺)로 들고 가 목판조각으로 책을 엮으려고 했다. 판본이 완성되어 인쇄과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 이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성여신(成汝信)이란 유생이 “스님이 외람되게 유(儒)를 논하느냐” 하며 절의 사람을 시켜 불태워버렸다. <삼가귀감>은 선가(禪家・불교) 유가(儒家・유교) 도가(道家・선교)의 귀감이 될 내용을 엮은 책인데 조판 순서에 유가가 끝부분에 짜여 있음을 트집잡은 것이다.
서산대사는 화개동천 청허원에서 머물면서도 덕산동(德山洞)의 남명(南冥) 선생을 자주 찾아가 친교를 맺었다. 성여신이란 사람은 남명 선생의 수제자로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합격한 예절이 바른 선비로 임진왜란 뒤에는 폐허가 된 향토의 복구와 풍속을 바로잡고 학풍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가 ‘삼가귀감’의 판본을 불태운 것은 당시의 유불(儒佛)갈등에 따른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이 그 배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서산대사는 화개동천의 청허원에서 6,7년간 머물다가 지리산을 떠나 묘향산으로 갔는데 당시의 불교 탄압이 그 이유로 보이며 역작이 불태워지는 수난 때문에 그 뒤로는 다시 지리산을 찾지 않은 것 같다.
서산대사의 사상과 업적은 세계 불교 역사상 두 가지 불후의 공적을 남겨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하나는 나라가 왜구의 침략으로 누란의 위기를 처했을 때 승군(僧軍)을 창설하여 국란을 타개한 선검(禪劍) 일치사상을 고취한 것이고 또 하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하여 선교병수(禪敎並修)주의를 창도한 것이라고 한다.
국란 위기에 격서(檄書)
임진왜란으로 선조왕이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대사는 왕의 간곡한 부탁으로 전국의 사찰에 격서를 보내 승병을 모집했다. 그 내용이 추상같다.
‘서라 일어나라 나오라. 때는 왔다. 나라를 위하여 싸울 때가 왔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건져야 한다. 민족을 살려야 한다. 이 때를 당하여 구차하게 살려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 살기만 도모하면 죽음이 있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 길이 터지는 법이다. 나의 사랑하는 승도여 일어나라. 불도여 나오라. ……주야 공부가 생사를 초월한다는 공부였으니 겁날 것이 무엇이며 혈혈단신에 걸릴 것이 없는 홀홀단신이거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냐…….’
서산대사는 나라를 구한 큰 인물이다. 그가 큰 인물로 국가에 기여한 데는 지리산의 명당에서 ‘마음을 비우는 공부’를 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지리산은 명당이 많고 또 그 명당에서 공부하면 도를 얻게 됩니다. 도를 얻은 큰 그릇이 서산대사처럼 국가를 구하고 재난을 막아 주는 것으로 기여한다면 이 산속에서 공부하는 것을 일방적인 국립공원관리법으로 단속해선 안 될 일이지요. ‘공부’란 해야 할 장소가 있어야 하고 그런 장소를 지리산과 같은 영산이 아니면 찾기가 어려우니까요.”
불일(佛日)평전의 변규화(卞圭和) 씨는 올바로 공부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는 인물을 얻기 위해서라도 지리산 토굴 공부를 일방적으로 단속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론을 편다. 서산대사의 경우와 견주어 보면 수긍이 되기도 한다.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를 기려 제향을 올리는 곳은 묘향산의 수충사, 밀양의 표충사가 있고 해남 대흥사에는 표충사와 별도로 대사의 유품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 건물이 세워져 있다. 이는 대사의 제자였던 사명당과 처영의 영향인 듯하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처음 머리를 깎고 13년을 공부한 뒤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6.7년 동안 집필 생활을 했던 지리산 화개동천에는 어째선지 그의 기념관은 고사하고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그가 손수 중수하여 기거했던 내은적암은 그 위치조차 어느 곳인지 알 길이 없다. 어떻게 이처럼 무심할 수가 있는가. 지리산을 얘기할 때 서산대사를 빼 놓을 수 없다면 그 지리산에 그의 흔적이라도 수습해 놓아야 마땅하다.
『지리산365일 3권』 최화수 지음 도서출판 다나
1995년 1월 25일 4쇄 발행
남명선생과 서산대사
임진왜란 때 제자들 또는 본인이 직접 의병 또는 의승군을 일으켜 왜군격퇴에 큰 기여를 한 두 주역인 남명 선생과 서산대사는 동시대에 태어나 생전에 몇 번 만나고 서신도 주고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서산대사는 지금의 하동군 악양면 화개동천에 있는 절에, 남명 선생은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공교롭게 같은 시대에 태어나 지리산 삼신봉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가까운 지역에 머무르게 된 인연으로 만날 수 있었다.
서산대사가 남명에게 보낸 글 가운데, ‘남명처사에게 올리는 글(上南冥處士書)’이 있는데, 이 글은 서산대사가 강정(江亭)에서 남명 선생을 만난 지 5일째 되던 어느 해 여름, 남명 선생이 보내온 집자보축과 친필 단장 한 폭을 받고 고마운 뜻을 표하는 답장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시기는 서산대사가 화개동천 내 어느 절에서 두 번째 지리산 생활을 하게 된 때인 1564~1566년 3년 중의 어느 한 해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림을 대표하는 유학자와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이 국난(임진왜란)을 앞두고 조우하여 서로 존경과 우의를 나누었음은 참으로 절묘한 인연이었다. 약 20여 년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명 선생의 제자들은(남명 선생은 임진왜란 발발 전 약 20여년 전인 1572년 72세로 별세) 의병을 일으켰고, 서산대사는 70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지리산 이천년]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 보고사
2010년 11월 19일 초판 1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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