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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최치원 2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서문(일부)
나말여초는 신라사회의 모순이 드러나고 고려사회가 건설되었던 격변기였다. 호족은 이 시기의 사회변동을 주도했다. 그들은 신라정부의 사회통제력이 상실되자 지방 곳곳에서 할거적 지배를 도모했다. 자연히 사회의 분열과 혼란은 가중되어 태봉과 후백제 등 신라국가를 부정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고, 이들 사이에 치열한 세력다툼이 전개되었다. 분열과 혼란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 의해서 점차 수습되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고려의 국가 체제를 갖추어갔다.
신라사회에서 유교적 정치이념은 대체로 6두품 출신 유학지식인에 의해서 추구되었다. 신라 중고대 이후 6두품 출신은 유학적 소양을 가진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관료로 등장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도당 유학한 뒤 귀국하여 근시기구와 문환기구에 적극 진출하면서 국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왕권강화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진골세력의 견제와 반발로 왕권강화의 노력이 크게 진전되지 못하자 6두품 유학지식인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신라사회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러나 신라의 국세가 기운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은 실패로 기울었고, 이후 6두품 유학지식인은 신라사회에 남아 있거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세력에 귀부하는 등 다양하게 활동했다.
왕건은 유학지식인을 통해서 국가체제를 확립하려고 모색했다. 그것은 신라출신 유학지식인과 호족 휘하 지식인의 참여로 가능했다. 특히 신라출신 유학지식인은 신라 말에 최치원이 모색했던 유교적 정치이념을 계승하여 고려사회에 적용했다. 때문에 고려국가의 운영체계 속에는 최치원의 유교적 정치이념이 반영되었다. 최치원의 정치이념과 사상은 신라고유의 정서를 담았다. 자연히 신라출신 유학지식인은 고려사회 내에 신라의 전통과 그 문화를 부각할 수 있었다.
나말여초의 격변기는 신라의 전통을 배제하고 전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 시기는 아니었다. 고려의 건국을 도운 호족의 문화와 함께 신라의 전통적 문화도 계승되었다. 최치원의 정치이념과 사상은 고려사회에 신라전통을 투영하는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최치원의 정치이념과 사상이 당시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는 연구는 신라 문화의 모습은 물론 고려의 국가체제와 그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중국 역시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10국이 각축하는 전환기였다. 최치원은 만당(晩唐)의 사회를 살았으므로, 그를 통해 중국문화의 변화는 물론 전환기의 중국문화와 우리문화의 교류흔적도 엿볼 수 있다. 고운 최치원은 1,100여 년 전에 점차 쇠락해가는 신라사회를 살았던 유학자였다. 그는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을 익히고 문명을 떨친 뒤 금의환향하여, 자신이 듣고 보고 배운 바를 신라사회에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은둔하고 말았다. 그가 무너져가는 신라국가의 존속과 왕실의 안녕을 애타게 바랐기에 훗날의 사람들은 천년왕국 신라의 멸망을 아쉬워하면서 그의 생애와 사상을 주목했다.
최치원의 생애와 활동
최치원은 857년(헌안왕 원)에 태어났다. 최치원(崔致遠)의 생애는 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이 왕경 사량부 사람이라 하면서 모형 현준을 거론하며 ‘사전이 없어져 세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최치원의 저술을 통해서 최견일(崔肩逸)이 그의 아버지이고 형은 현준이며 최인연과 최서원 등이 일가형제였음을 알 수 있다.
최견일은 862년(경문왕 2)부터 곡사(鵠寺) 중창불사에 참여했고, 현준은 신라 말에 화엄종의 종찰(宗刹) 격인 해인사에 주석했다. 최인연은 입당 유학한 뒤 집사시량을 맡았고 최서원은 견당사(遣唐使)의 수행원으로 활동했다.
곡사의 중창은 경문왕이 즉위 후 왕실의 권위를 부각하려고 추진한 불사였다. 해인사에는 헌강왕 이후 진성왕 때까지 경문왕계 왕실이 주관한 결사(結社)가 자주 설행되었다. 최견일과 현준은 불사를 통해서 경문왕이나 경문왕계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신라사회에서 최씨는 경주에 기반을 둔 6두품 계층이었다. 그들은 육부의 한 씨족집단에서 비롯하여 통일전쟁 수행과정과 같은 정치체제의 편제 속에서 사회적인 특혜로써 사성(賜姓)을 받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파되었다. 경주최씨 출신들은 특히 신라 하대에 정치 사회적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신라 하대에 활동한 최씨 인물은 현전하는 역사서와 금석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 하대에 활동했던 경주최씨 인물들은 대부분 도당유학한 유학지식인이었다. 도당유학생은 귀국 후 관직진출이 국학 출신보다 유리했다. 경주최씨 출신들의 도당유학은 경문왕대~진성왕대에 유난히 활발했으므로, 경주최씨 가계의 성장은 경문왕의 왕권강화 작업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868년(경문왕 8) 최치원의 입당유학은 왕실과 친밀했던 집안 분위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최치원은 10년 안에 학업을 마쳐야 했던 숙위학생이었다. 숙위학생은 주로 사신(使臣)의 배편으로 동행했는데 최치원은 특별히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했다. 당에 유학한 숙위학생, 특히 빈공급제자는 귀국 후 대부분 문한직을 담당했다. 최치원의 집안 구성원은 숙위학생이나 입당사신으로 활동하여 문한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당 문화에 익숙했고 또한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당 문화에 대한 이해는 당의 권위와 학문의 힘으로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났다. 자연히 최견일은 왕권강화에 참여할 관직진출을 의도하여 최치원에게 수학하고 급제할 것을 독려하였다. 최치원은 입당 전에 이미 당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관직진출을 지향하는 경향을 가졌다.
최치원은 874년(경문왕 14) 7월 이전에 예부시랑 배찬의 아래에서 급제했다. 그는 아마도 당의 선거(選擧) 가운데 생도시의 진사시에 등과했던 듯하다. 진사시는 여러 과목 가운데 가장 최고의 시험이었다.
최치원은 빈공진사 급제 후에 한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대신 동도를 유랑하며 붓으로 반낭(飯囊)을 삼아서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 30수로 3편을 이룰 정도로 시부 습업에 매진했다. 2년 뒤 그는 비로소 지방관으로 나아갔다. 876년(건부 3)에 최치원은 선주 율수현위에 임명되어 한가롭고 넉넉한 생활 속에서 배움에 힘썼다. 당대의 진사 급제자는 대개 종9품의 지방관을 맡았다. 최치원 역시 진사 급제자였기에 지방관인 현위직에 임명되었다.
현위직은 해당 지역을 관할하면서 지방사회의 실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지라도 격무에 속했다. 관직진출을 지향했던 최치원에게 격무의 최말단 지방관직은 만족하기 어려운 자리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보다 상위 관직으로의 진출을 유념하면서 시부 습업에 힘을 기울였다. 결국 그는 또 다른 인재 등용방법인 제거(制擧)에 관심을 가졌다. 마침내 877년 겨울에 현위를 맡은 지 1년 만에 사임하고 입산 수학했다.
산림에 머물며 수학했던 최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에게 투탁했다. 그것은 879년에 박학굉사가 중단되었고, 과거 파행에 불만을 품은 사인(士人)들이 점차 번진의 막료로 부임하는 경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입산 수학하면서 남은 녹봉이 없고 글 읽을 양식도 모자랄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당 전역을 휩쓴 반란의 여파도 입산 수학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했다.
당 조정의 실세로 부상하며 선주에도 영향력을 미쳤던 고변은 박학굉사 중단 이후에도 계속 관직진출을 모색했던 최치원의 호감을 받을 수 있었다.
최치원은 고변이 동면병마도통으로 임명된 879년 10월 이후부터 충성과 충정을 다짐한 편지와 잡편장 5축, 진정 칠언장구시 100편을 고변에게 올려 자신의 출사를 모색했다. 이후 기덕시 30수를 고변에게 올려서 마침내 880년 5월 중하(仲夏)에 고변의 출사를 받았다.
최치원은 회남절도사 휘하에서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맡았다. 최치원은 비록 명칭의 변경이 있었지만 879년 10월 이후부터 884년 8월까지 대략 5년 동안 고변 휘하에서 순관직을 맡았다. 순관은 절도사의 속관 가운데 말단직이었다.
당 말에 절도사는 관내의 정치 군사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유능한 문사를 초빙했고, 벽소를 입고자 하는 자는 유력한 절도사에게 투탁하기를 희망했다. 벽소로 임용된 순관은 절도사 휘하의 부정비리를 감찰하고 전적과 문서를 검열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자연히 순관은 절도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마침내 최치원은 현위보다 높은 순관에 임용되었다. 그는 객관(客館)과 역원(驛院)을 돌아다니며 번진의 규율을 단속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점차 고변의 관심과 총애를 받았다. 특히 전적과 문서를 검열하면서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 4년 동안 무려 1만여 수의 군서(軍書)를 지었다. 그가 절도사 휘하의 문한을 담당했던 것은 투탁 과정에서 고변에게 잡편장과 함께 진정과 기덕의 뜻을 담은 시를 헌상하며 자신의 문재(文才)를 은근히 부각했기 때문이다. 문한을 맡았던 최치원은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 힐책하여 문명(文名)을 얻게 되자, 더욱 고변의 관심을 받았다.
최치원은 재당시절 동안 항상 관직진출을 염두했다. 하지만 그는 884년에 귀국을 꾀했다. 이역에서 부모를 봉양하지 못한 자신을 괴로워하며 집에 편지조차 보내기 어려움을 탄식했다. 그러나 귀국의 직접적인 이유는 고변의 정치적 실권과 도교 혹신, 그리고 신라 정국의 변화 때문이었다.
고변은 882년 정월 도통에서 물러난 뒤 이권 상실에 불만을 갖고서 불손한 어투로 황제에게 상소했다. 황제는 고변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모든 의혹을 물리쳤고, 이후 고변은 점차 세력을 잃고 도교에 침잠해 갔다.
최치원은 정치적 실권 후에 점점 도교를 탐닉했던 고변을 보면서 더 이상 관직진출이나 자신의 이상을 펴보려는 기대가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헌강왕은 선왕인 경문왕을 이어 유학을 진흥하고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유학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강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왕권강화에 대한 비판이나 견제도 적지 않았다. 헌강왕은 재위 5년 이후 정치세력을 재편하면서 측근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경문왕대 숙위학생으로 입당한 최치원은 이러한 상황을 박인범에게서 들었다. 최치원은 향수에 시달리면서 당의 사회상이 급변하고 신라의 정치 상황 역시 파행으로 치닫고 있음을 감지했다.
고변은 귀국을 원하는 최치원을 더 이상 휘하에 둘 수 없었다. 그는 입당유학생인 최치원의 귀국을 황실(皇室)에 보고하고, 신라 사신편에 귀국하도록 배려했다. 최치원은 8월에 관역순관의 요전(料錢)을 받으면서 갑자기 귀국하라는 지시를 받아 신라사신 김인규와 종제 최서원을 따라 884년 10월 귀국길에 올랐다. 그는 배편과 날씨 때문에 회성 유산 곡포 등에 머물다가 겨울을 지낸 뒤 바다를 건너 885년 3월에 귀국했다.
최치원은 재당시절에 국자감의 태학에 들어가 시부와 책문 습업에 열중했고, 빈공진사시 급제 후에는 말단지방관을 맡아 혼란한 당의 지방사회를 경험했다. 고변 막부의 관역순관으로 근무하면서는 당시 강력한 절도사들의 대 황실관계를 바라보았다. 당 황실이 점차 약화되는 모습 속에서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의 위상을 유념하며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귀국길에 올랐다.
885년 신라에 도착한 최치원은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을 맡았다.
최치원은 재당시절에 시와 부는 물론 책문을 연마했고, 귀국후 군주자질론과 신하역할론, 그리고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의 조화, 어진 인재등용의 필요성 등을 담은 글을 모아 『계원필경집』으로 엮어 헌강왕에게 진상했다. 문집에는 당시 당의 사회혼란을 야기했던 반적(叛賊)들을 다스리는 입장이 표명되었다. 특히 군왕의 덕화정치(德化政治)와 도의 추구가 강조되었다. 『계원필경집』은 헌강왕의 왕권강화를 지지하는 이념적인 기반으로 제시되었다.
최치원은 헌강왕대 국왕측근의 근시직인 시독을 맡아 왕명으로 「사산비병」 (「진감선사비명」·「숭복사비명」·「낭혜화상비명」·「지증대사비명」)을 지었다.
「사산비병」은 비명찬술 당시에 활동했던 인물의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사산비병」은 유·불 양교에 대한 조화와 융합을 담았다. 「진감비명」에는 유·불 양교를 함께 이해하려는 사상경향이 제시되었고, 「낭혜비명」에는 불사를 통해서 조덕을 추복하는 호법이 왕도정치를 구현하는 방편이라고 했다. 「지증비명」에는 유·불의 융화를 강조하면서도 유교적 관념을 오히려 불교적으로 표현했다. 최치원은 「사산비병」을 찬술하면서 유불교섭의 사상경향을 제시하고 호법에 의한 왕도정치를 강조했다. 특히 유불교섭의 사상경향을 중시하면서, 호법에 의한 왕도정치를 이룰 수 있는 주체로 경문왕계 왕실을 지목했다. 「진감선사비명」·「낭혜화상비명」·「지증대사비명」에는 경문왕계 왕실이 추구했던 사상경향이나 정국운영 방향이 특별히 강조되었던 셈이다. 이러한 모습은 「숭복사비명」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최치원은 국왕측근의 근시직과 문한직을 맡으면서, 한편으로는 지방관과 외교사절로도 활동했다.
889년에 진성왕은 여러 주·군에 공부를 독촉했다. 이를 계기로 초적이 지방 곳곳에서 일어났고, 889년(진성왕 3) 사벌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원종과 애노의 기세는 촌주가 진압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실 887년 춘정월에 일어난 김요의 반란에서 지방사회의 동요는 이미 시작되었다. 자연히 왕실의 지방 통제는 사실상 붕괴되어, 오히려 왕실 내지 왕권의 유지를 위해 지방사회를 위무하거나 초적을 진압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최치원은 고변의 종사관으로 활동하면서 당 말 번진 간의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지켜보았던 경험을 가졌다. 왕실은 초적을 진압하고 왕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경험이 풍부하고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최치원에게 병부시랑을 맡겼다. 최치원은 「대숭복사비명」·「낭혜화상비명」을 작성했던 890년까지 중앙관부의 차관직인 병부시랑을 맡았다.
「대숭복사비명」·「낭혜화상비명」의 작성 이후 최치원은 대산군 태수로 나아갔다. 최치원은 병부시랑을 맡았지만, 당시 지방 각지에서 일어나는 호적세력은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지방호족은 기세를 멈추지 않았다. 최치원은 ‘나라의 형세가 쇠퇴하는 말년을 맞아 의심과 시기를 많이 받았고 능히 용납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지방관을 맡았다. 그것은 병부시랑의 임명이 초적 봉기를 진압하려고 이루어졌다면, 반란을 진압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지방사회를 직접 위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지방사회의 실상을 파악하는 한편 혼란을 수습하려는 방안을 모색하려고 지방관으로 나아갔다. 경문왕계 왕실과 연고된 왕족이나 관료들은 왕명을 받아 지방사회의 동요를 막으려고 이미 지방관을 맡았다. 따라서 최치원도 890년 「낭혜화상비명」을 작성한 뒤 곧바로 대산군과 부성군의 태수로 파견되었다. 병부시랑과 태수는 모두 호족을 제압하고 견제하려는 임무를 가졌지만, 당시 호족의 기세에 밀려 임무를 다할 수 없었다.
893년에 중앙정계로 돌아온 최치원은 혼란한 지방사회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토대로 이듬해에 진성왕에게 시무책을 진상했다. 최치원은 왕실의 안정과 안녕을 염원하는 바람에서 시무10여조를 진상했고, 진성왕 역시 왕실과 가까웠던 최치원에게 문한관으로서 시무책을 제시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진성왕은 시무10여조를 받고는 기뻐하여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시무10여조의 구체적인 내용은 현재까지 전하지 않는다.
최치원은 897년 6월 이후에 해인사 중창관련 기문을 작성하면서 당시를 ‘상법이 장차 쇠퇴하여 마군이 다투어 일어나는’ 때로 규정했다. 상법의 쇠퇴로 말법 시기가 도래했고 마군이 다투어 일어나 부처의 가르침은 제대로 행해지지 못했다. 때문에 날이 저물고 길이 아득한 것처럼 나라의 위상은 회복하기 어려웠고, 결국 연기가 심해져 불이 꺼질 듯이 신라국가의 멸망은 점차 다가왔다. 최치원은 시무책을 진상하여 신라사회를 개혁하려고 한 뒤에도 신라사회를 불법의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말법의 시기로 생각하면서 왕실권위의 상실과 통치의 어려움을 고민했다.
해인사는 훼손된 사역을 복원하려고 중창되었다. 사찰중창은 쉽더라도 법륜을 제대로 밝히기는 어렵다. 해인사의 중창은 단순한 사역복원이 아닌 말법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법륜을 밝히는 계기가 되어야만 했다. 중창불사는 혜성대왕의 원찰을 조성하려는 진성왕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때문에 왕실은 법륜을 밝히듯 불법을 수호하여 말법사회에 빠진 신라를 구하는 주체로 여전히 기능했다. 최치원은 해인사 중창 관련기문을 찬술하면서 왕실의 호불(護佛)을 중심으로 신라국가의 재건을 모색했다.
불법의 수호를 통해서 신라국가를 재건하려는 노력은 점차 호국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진성왕대 이후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새로운 국가로 등장하여 신라의 영역을 차지했다. 신라왕실의 권위는 더욱 실추되었고 호족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연합하거나 복속하면서 차츰 세력을 확대했다. 이러한 때에 최치원은 신라국가를 보위하려는 열망을 더욱 드러냈다.
최치원은 재당시절은 물론 귀국 후에도 난세를 만났다. 당과 신라를 옮겨 다녔던 그는 움직일 때마다 비난을 받았다. 894년에 국왕 측근관료로 시무책을 올린 뒤에는 ‘스스로 불우함에 마음 상하여 다시 벼슬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비난을 받았던 듯하다.
이후 그는 지방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앙정계를 멀리하였다.
895년 진성왕은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았고, 2년 뒤인 897년 6월에 선위하고는 북궁(해인사)으로 물러났다가 12월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시무책을 진상한 다음해에 시행된 요의 태자 책봉은 시무10여조에 대한 반발 때문에 이루어졌다.
최치원은 895년부터 해인사 중창(重創) 관련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진성왕의 양위와 효공왕의 계위에 관련된 여러 표문을 작성했다. 표문 작성을 끝낸 898년 정월 이후, 그는 이미 입산한 진성왕을 좇아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에 은거했다. 따라서 산천을 유력하며 소요자방(逍遙自放)한 때는 진성왕을 비판하는 세력에 의해 시무책이 실행되지 못하고 요가 태자가 되었던 895년 10월 이후, 진성왕의 선위와 효공왕의 계위 관련 외교문서를 작성했던 897년 6월 이전의 일이다.
해인사 입산 이후 최치원은 900년부터 904년까지 해인사 창건과 관련된 화엄승려의 전기를 찬술했고, 908년 11월에는 이재(異才)의 부탁으로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짓는 등 저술활동을 계속했다. 다만 그는 이 시기에 특별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다.
904년 봄에 그는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을 찬술하였는데, 이때 이미 지병을 앓았다. “지금 뜸질하는 것으로 일을 삼을 정도로 쇠약해져 때로는 삶이 귀찮아 몸을 태워버리려는 뜻까지 가졌다”고 토로할 정도로 매우 지쳤고, “부질없이 바닷가 보잘 것 없는 풀이 되어 안주할 거처마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자회했다. 그의 건강은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하기에 버거울 정도였다.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은 뒤 그는 저술활동마저 그만두었고, 908년 이후 어느 시기에 삶을 마쳤다.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장일규 / 신서원
2008년 12월 15일 초판1쇄 발행
*본문내용을 일부 발췌하여 편집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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