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으로 돌아가라 - 루소의 식물 공부 이야기
루소가 프랑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 계약론] 등을 통해 인간의 일반의지에 의한 자유 계약을 통해서만 바람직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그가 쓴 [에밀]은 오늘날까지도 아주 유효한 교육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에 걸쳐져 있는 그의 사상은 아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한 마디에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루소가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중에서도 이단아이다. 대부분의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문명 예찬론자들이며 인간 사회의 진보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그의 발언은 반문명적이다. 문명의 발전은 본래 선한 의지를 갖고 태어난 인간들 사이에 불평등만을 심화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루소가 당대의 계몽주의자들에게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가는 당대 최고의 철학자로 대접받던 볼테르가 ‘당신의 책을 읽고 나니 네 다리로 걷고 싶어지네요.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이미 60여 년 전에 그 습관을 잃어버렸으니,,,,,’ 운운하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명성과는 달리 온갖 오해와 박해 속에서 고독하고 불행한 생애를 보낸 루소가 말년에 식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루소가 보기에 식물의 왕국은 동물이나 광물의 왕국보다 ‘자연’의 덕성을 가장 풍요롭게 간직하고 있는 신비스런 세계이다. 그러나 그런 중요성에 비해볼 때 식물학은 하찮은 학문의 영역으로 물러나 있다. 식물학이 그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은 식물학이 의학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식물학이 의학에 종속되었다는 것은 식물이 그 자체 탐구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유효성의 관점에서 왜곡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한다면 식물이라는 ‘자연’은 ‘인간의 이익’이라는 문명에 종속되어 있다. 루소가 식물에 관심을 갖고 식물학에 관한 책을 쓰고자 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자신의 명제의 실천인 것이다.
루소의 식물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식물학이 아니다. 그의 식물학은 식물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주는 식물학이 아니다. 루소 자신도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식물에 대해 보다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애쓰지는 않았다. 식물에 대한 공부가 단순히 식물의 이름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루소는 기회가 될 대마다 강조한다. 그의 식물학은 식물과 친해지기 위한 식물학이다. 그 식물학은 실천적인 식물학이다. 그가 식물의 부분 부분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은 세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물과 친해지기 위해서이다. 식물 채집을 하고 표본을 만드는 것도 다 식물과 친해지기 위한 실천적 작업이다.
루소가 말년에 식물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만 막연히 알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식물의 아름다움, 자연의 장엄한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에 젖어 있는 노신사의 모습을 눈앞에 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의 그는 현미경 등 온갖 장비들을 준비하고 식물을 채집해서 표본을 만들고 세밀하게 부분 부분을 관찰하고 있다. 그는 제대로 된 식물학을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나이가 들었고 체력이 모자르다는 것을 여러 차례 한탄한다. 그 한탄은 거꾸로 식물을 대하는 그의 열정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루소의 식물학에 관한 편지들과 단상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진정으로 학문하는 태도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를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학문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며 자신이 탐구하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의 편지와 글들은 아프게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식물에 대한 성찰들, 구체적 실천과 함께 하는 성찰들은 진정으로 자연, 혹은 환경과 화합한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 인간이 자연과 친해진다는 것은 자연에 대해 아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 앞에서 감탄하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과 친해진다는 것은 구체적 실천을 통해 자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자연과 친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완결은 보지 못했지만 루소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식물학을 이룩해 보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루소가 남긴 편지들과 단상들에는, 그 야심을 실천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그리고 힘들게, 구체적인 작업들을 행했는지 너무나 생생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그러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면 그래서 루소와 친해질 수 있다면, 또한 식물 혹은 자연과 진정으로 친해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루소의 식물사랑] 장자크 루소 지음/ 진형준 옮김/ 도서출판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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