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가 남긴 기마민족의 흔적
지난 1973년 발굴 후 25년 동안 일반 국민에게 공개된 적이 없었던 국보 제207호 천마도 장니가 1998년 1월 20일부터 한달 동안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하루 4차례 공개되었다. 장니란 말의 배 양측면에 달아 말굽에서 튀어오르는 진흙을 막아주는 마구를 말한다. 자작나무의 수피에 백마가 구름을 헤치고 역동적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형상화 한 이 천마도 장니는 1천 5백여년 전 신라시대의 그림을 이해하는 필수적인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최초로 일반국민에게 공개된 천마도 장니의 전시와 더불어 관심을 끈 것은 박물관이 발표한 장니를 만든 자작나무 껍질에 대한 연구결과였다. 박물관측은 장니로 사용된 자작나무의 수피가 모두 47겹의 껍질로 이루어져 있고 흠이 하나도 없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심산유곡에서 잘 자란 50년 이상의 수령을 가진 자작나무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박물관측이 제시한 천마도에서 사용된 자작나무 수피의 산지였다. 박물관측은 우람한 자작나무를 한강 이남의 지역에서 찾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당시 태백산맥이나 백두산 일대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신라 사람들은 하필이면 마구를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 사용하였을까? 그 당시 사람들은 질좋은 자작나무를 어떻게 구했을까? 당시 사람들의 수목관과 관련된 이런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천마총은 신라 고분 중에서 다양한 종류의 호화로운 유물이 가장 많이 발굴된 고분이다. 무덤의 주인공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누구누구 능이나 묘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발굴된 천마도 때문에 천마총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고분에서는 천마도 장니 이외에 역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진 삼각형 모자와 신라 금관 중에서 가장 화려한 4단 입식 금관도 출토되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관은 외부 형태에 따라 수지형과 초화형으로 나눈다. 경주의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은 모두 나뭇가지나 사슴뿔을 도안으로 변형하여 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수지형 금관으로 부르고 있다. 반면에 고령이나 경남지방에서 출토된 가야 금관은 풀이나 꽃을 변형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초화형으로 부른다.
경주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금관이 나뭇가지와 사슴뿔의 모습을 갖고 그 위에 곡옥과 나뭇잎을 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시대 신라의 지배층이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신라 금관의 외형적 상징과 나무를 숭배하는 유라시아의 여러 민족의 민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상징체계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무를 신성하게 여기는 시베리아 샤만들은 훨씬 후대까지 나무와 사슴뿔로 소박한 관을 실제로 만들어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학계에서는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나무를 신성한 나무로 숭배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은 엉뚱한 데서 찾을 수 있었다. 최근에 발간된 김병모 교수의 [금관의 비밀]이 바로 그러한 궁금증에 답을 준 책이었다. 김교수는 그의 책에서 천마총의 주인은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이며, 그러한 징후는 천마총에서 발굴된 천마도 장니나 금관을 통해서 알 수 있음을 여러 가지 증거로 설명하고 있다. 김교수는 신라 금관의 뼈대인 나무모양은 기마민족 사이에 유행한 나무숭배 문화인 산수사상에서 나왔으며 거기에 달린 곡옥은 풍요와 생명력을 상징하는 생명의 나무에 달린 과일을 뜻하고 원형 장식이나 아래 끝이 뾰족한 심엽형의 장식은 북방 한랭한 평원지대에서 자라는 자작나무의 나뭇잎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자작나무는 실제로 북방의 한 기마민족이 섬겼던 신성한 나무였다. 시베리아의 넓은 평원에 흩어져 살아왔던 기마민족들에게는 자작나무가 번영과 건강을 지켜주는 신수였다. 알타이문화권에 속하는 기마민족이 자작나무를 신수로 섬겼던 이유는 아마도 활엽수 중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특히 나무가 흔치 않은 한랭한 초원지대에서 나무는 귀한 존재이고, 그러한 곳에서 자랄 수 있는 수피가 흰 자작나무는 성스러운 존재로 보호받았을 것이다.
김교수는 북방 기마민족의 자작나무 신수사상은 신라의 지배계급과 함께 한반도에 도래했고, 그러한 자작나무 숭배사상은 신라의 지배계급에게 하나의 사유체계로 형상화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사후세계를 위한 귀중한 부장품으로 함께 묻힌 것이 바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관모와 장니이며, 신수인 자작나무를 가장 상징적으로 잘 형상화시킨 것이 금관이라는 해석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대 일본인들이 신라를 '시라기(하얀나무)'라고 표기하기도 한 이유를 신라 사람들이 자작나무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이름붙인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천마도 장니와 신라금관, 기마민족, 그리고 자작나무에 얽힌 시공을 뛰어넘는 1천 5백년 전의 이야기는 한 산림학도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숲과 한국문화] 전영우 수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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