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여행
큰나무 여행 공간입니다.
후덕하고 인자한~
후덕하고 인자한~
외딴섬 비껴서 남쪽 바다 저 멀리 붉은 해가 걸린다. 후덕하고 인자한 왕후박나무1에 인사를 드리고서, 서둘러 순간의 포인트로 달려갔다. 이글이글 불타던 아우라를 걷어낸 말간 해님이 잿불처럼 사라지고. 바다는 황금빛 노을로 춤을 추니. 저 섬은 외롭지 않겠다.
여기는 남해 창선, 어둠이 내리는 해안도로를 걷는다. 찰랑이는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 건너 산자락을 따라 아른거리는 불빛에 숨죽인 마을들이 깨어난다. 선선하다 할 수 없는 밤 기온이건만 달구어진 무더위는 밀어낼 만하다.
하늘에선 별빛이 내려와 시간에 따른 장(場)의 변화를 알리고. 나는 한껏 풍성해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왕후박나무 둘레를 걷는다. 거대한 수관 아래 가만히 서서 귓바퀴에 오목한 손을 모으니. 한 그루 우주목이 품은 생명들의 합창! 수많은 풀벌레의 울림이 파동으로 전해져 하찮은 미물의 파릇한 생명력에 빠져든다. 500여 년 마을공동체와 교감의 맥을 이어온 이 우주목의 품은 어디까지이며 그 사랑과 위로는 또 얼마일까?
텐트에 누워 후덕하고 인자한 왕후박나무를 바라본다. 까맣고 둥그런 숲 하나가 신비로운 우주알 같구나! 그리곤 밤을 새워 우는 풀벌레 소리. 종(種)에 따라 특유의 목소리를 지닌 저 곤충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이다. 케데헌의 루미처럼!
저 아름다운 자연의 합창은 누가 지휘하고 있는 걸까? 자장가가 되어준 이 밤의 오케스트라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 같다.
아직은 컴컴한 새벽, 밤잠이 없는 동네 어르신 산책하는 소리에 일어나 텐트를 접었다. 또다시 신새벽의 왕후박나무와 교감하는 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깨어나는 우주목의 둘레를 천천히 걷는 동안 나는 담대한 위로를 얻는다. 우주알처럼 둥그런 수관 위로 영롱한 별이 반짝 빛난다.
타임캡슐 같은 우주알 속으로 들었다.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줄기는 우주를 받치는 기둥이 되고. 그 아래서 숲의 하늘을 올려보다가, 아~ 나는 신새벽의 우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신비롭고 충만한 은하수가 쏟아지고 있었으니.
임진왜란 때 이 나무에서 쉬어 갔다는 이순신 장군을 떠올려 본다. 맨 처음 거북선을 띄워 왜적을 물리친 사천해전, 그리고 숱한 전쟁들! 얼마나 고단한 쉼이었을까? 장군의 강인하고 고단한 숨결 덕분에 여기 500년 세월, 후덕하고 인자한 생명력을 누리는구나!
날은 점점 밝아오고 앞산 마루에 안개가 내려와 왕후박나무를 호위하니. 광활한 우주를 품은 한 그루 생명수, 찾는 이의 가슴에 후덕하고 인자한 위로를 건네는 창선도 단항마을 왕후박나무여!
⎯야생의 여행자⎯
*1 남해 창선도 왕후박나무
(경남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699-1)
한 그루 마을숲, 왕후박나무는 단항마을 입구를 지키고 계신다. 유장한 지리산의 주 능선이 사천만 바다 건너 멀찍이 굽어보는 아름다운 곳이다. 500여 년의 세월을 이어온 이 나무는 밑동 줄기는 11개, 수관 둘레는 21m나 된다. 멀리서 보면 산봉우리처럼 크고 단아한 달항아리 미소를 띠는 우주목이다.
‘K-팝 데몬 헌터스’에서 루미, 미라, 조이가 신성한 힘의 원천으로 악령을 물리치기 위해 데몬 헌터스를 결성한 당산나무, ‘아바타’에서 판도라 행성 나비족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한 생명의 나무.
전설에 따르면 노부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았다. 뱃속에서 씨앗이 나와 마을 어귀에 심었더니 무럭무럭 자라났다. 주민들은 해마다 음력 섣달 그믐날 정성스레 동제를 올리고 풍어를 빌어왔다.
임진왜란(1592) 때 이순신 장군이 왜병을 물리치고 이 나무 밑에서 점심을 드시고 쉬어 가셨다. 지금은 주민들이 평상 3개를 놓고 무더위 쉼터로 넉넉하게 이용하고 있다. 단항마을 주민들은 왕후박나무에 대한 외경심이 대단할뿐더러 외부인에 대한 인심 또한 후하다.
민속적, 문화적, 생물학적 가치가 높아 1982년 천연기념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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