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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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일탈의 밤
낯선 일탈의 밤
빗속으로 스며들듯 섬진강에 왔다. 뜻밖에도 구례지역 중학교 아이들 음악 공연 도우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받았으면 줄 때도 있어야지. 온정과 더불어 마음이 풋풋해지는 시간이다.
7월 중순, 콩 볶듯 타오르던 대지에 반가운 비가 내린다. 그런데 어쩌나! 이제 힘겹도록 올 모양이다. 이젠 저 아이들이 성난 기후를 뼛속 깊이 쌓으며 살아가야 한다니.
우산을 받쳐 들고 어스럼 섬진강을 걷는다. 강물에 안개꽃을 뿌리는 빗줄기를 눈으로 보고 우산으로 듣는다. 물결따라 반짝이는 모래톱을 거느린 섬진강은 말랑한 형상의 언어를 지녔다. 모래 속을 파고드는 거북 등껍질처럼 보드랍고 촉촉한 시간이다.
버들숲에 둘러싸인 섬섬옥수! 섬진강을 바라보며 나는 고구려의 국모 유화(柳花)부인을 떠올린다. 험준한 고구려의 기상 속에는 버들잎의 상징성이 숨어있었으니. 고구려벽화는 강인한 기상과 깃털같이 부드러운 섬세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문무(힘과 지혜)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저울추의 균형미. 한 그루 버드나무에서 강인한 기질과 절제의 묘미가 조화를 이루는 생명력을 찾아보자. 유화부인 그리고 지리산 노고단의 마고할매! 그 생명의 상징성.
강 한가운데 모래톱엔 버드나무 몇 그루 부드러운 숲을 이루었다. 무성하고 나긋한 버들숲 사이, 왜가리 한 마리 신선처럼 앉아있다. 우강(雨江)의 정취를 온몸으로 끌어올리는 평상심. 때에 따라 우리의 감정과 분위기는 바뀌는 것을.
저녁 식사하러 나온 수달을 만날 수 있으려나 기대를 걸어보는데. 강 건너 바위 벼랑엔 수리부엉이가 내려다볼 것만 같다. 저 멀리선 노고단 마고할매가 내려다보고 계시고.
아득한 시간 너머 나는 현실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해는 까맣게 지고 강 건너 산속에서 빗소리를 뚫고 쏙독새가 우중의 안부를 전한다. 이 밤은 또 무사히 지나가리라.
뒷산 안개구름이 내려와 선녀의 옷깃 같고 산골 집집마다 등불을 밝히는데. 드넓은 들판에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나는 홀로 앉아 염천을 녹이는 고요한 빗소리를 듣는다.
한밤의 정취를 느껴보려 텐트에서 나왔다. 섬진강물엔 별빛의 고요가 내려앉고. 부드러운 빗줄기 사이로 풀벌레와 개구리들이 합창을 하니 이 또한 미묘한 소리의 세계다. 오늘 밤은 풍요로운 섬진강 야생의 소리를 베개 삼아 잠들 수 있겠다. 내가 사모하는 지리산, 아득하게 낯선 일탈의 밤이다.
밤 12시쯤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세찬 바람이 한바탕 지나간다. 언제 돌변할지 모를 야생의 변화무쌍함이 아닌가. 밤새 무논에선 물 넘치는 소리가 콸콸 들려오고. 목구멍에 밥 들어가는 일도 넘치면 탈이 나는 법. 목숨들을 키워내는 무논의 준엄한 생리에 나를 반추한다.
다음 날 아침, 돌아오는 강 언덕에 이슬 맺힌 메꽃이 빵긋 웃는다. 그 해맑은 표정으로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야생의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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