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의 인내
많은 식물들의 씨는 하늘을 날거나 물에 뜨거나 혹은 동물들의 털에 붙거나 동물들의 소화기관 안을 통과하면서 모체의 압도적인 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장소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러한 장소에 도착했다고 해서 바로 생활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씨들은 싹트기에 적합한 시기를 알리는 환경의 신호를 기다린다. 온대지방에서는 겨울 추위가 물러가고 따뜻한 봄이 되면 기온 상승이 신호 구실을 한다. 사막지대에서는 갑자기 내리는 폭우가 신호가 되어 자극을 줄 가능성이 크다. 어떤 황무지에서는 산불이나 들불이 신호 구실을 한다.
아무튼 대부분의 씨들은 생활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순간이 올때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을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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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식물들의 씨는 모래 속에서 폭우를 기다리면서 수십년 동안 버틸 수 있다. 장기간 대기 상태의 기록을 세운 식물 가운데 하나가 북극 툰드라 지대에 사는 루핀이다. 루핀의 씨는 연중 어느 때든지 싹트기에 필요한 기온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바람에 날려 얼어붙은 땅의 갈라진 틈 속에 쓸려 들어간다.
동토지대의 낮은 기온에서는 부패과정이 대단히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죽은 식물들의 잔해가 토탄처럼 층층이 쌓이기 마련이다. 만약 식물들의 씨앗이 몇 인치만 더 깊이 묻히게 되면 영원히 얼어 있는 자연의 냉장고인 영구동토의 일부가 되고 만다.
이러한 영구동토층에서 파낸 1만년 전의 식물씨앗을 실험실에 가져와서 물을 주고 따뜻하게 해주었으나 많은 씨들이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몇 개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북극 루핀은 장수 부문에서 신기록을 세웠지만 이보다 더욱 낭만적인 부활의 예도 있다. 1982년 일본에서 고대의 거주지를 발굴했다. 이 거주지는 대략 2,000년 전 야요이문화(彌生文化) 때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곳에 살았던 농경부족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곡식을 저장했다. 발굴된 곡식 구덩이 중 하나의 바닥에서 벼의 낟알이 몇 개 나왔다. 검게 그을러 죽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 한 개는 다른 것과 모양이 달랐다. 이 낟알을 심고 물을 주었더니 살아났다. 그것은 목련이었다.
이 되살아난 목련이 잎사귀와 나무의 전반적인 모양으로 보아 일본의 농촌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목련의 일종인 매그놀리아 코보스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11년 뒤 첫번째 꽃이 피었을때 현존하는 일본의 야생 목련과 다른 점이 나타났다. 야생목련의 꽃잎은 6개이다. 부활된 목련은 8개였다. 이듬해에 30송이 이상의 꽃이 피었다. 꽃잎의 수는 6개에서 9개가지 여러가지였다. 꽃잎 수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 이 나무만의 돌연변이적 특성인지 아니면 원래의 유전적인 특징인지 현재로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이 식물은 오래전에 지구에서 사라진 고대종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이 개체는 오래 잠들어 있는 동안 다른 유사종들이 겪어야 했던 진화론적인 압력을 받지 않은 것이다. 사실이 그러할 경우 식물세계의 '잠자는 공주'가 될 것이다. 이는 식물이 씨의 형태로 공간을 탁월하게 이동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는 여행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물의 사생활] 데이비드 애튼보로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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