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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목의 역사문화적 길을 따라
춘양목의 길을 따라
봉화에 있는 춘양역을 거쳐서 대구 달성에 있는 도동서원을 다녀왔습니다. 그 이유는 춘양목의 집산과 이동에 관한 문화적 사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어요. 뜨거운 햇볕을 느끼며 춘양면의 동쪽에 있는 춘양역에 도착했습니다. 볼품없이 작은 역이지만 주변에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습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니 춘양목 한 토막을 갖다 놓고 그 위에 액자 형태로 안내문을 붙여놓았습니다. 이 춘양목은 198년 살았고 남부지방산림청 춘양국유림관리소에서 기증한 것이라고 하는군요. 자세히 살펴보니 나이테가 아주 촘촘한 것이 아름다운 기품이 있습니다. 나이테가 198개나 된다는 거죠.
춘양의 특성으로 내세우는 ‘억지춘양’ 이야기도 그 곁을 차지하고 있군요. 춘양역으로 이어지는 영동선이 춘양면을 말발굽처럼 빙 둘러서 지나가는데, 억지로 철로를 돌린 데서 유래한다는 설, 춘양목이 워낙 질이 좋으니까 다른 데서 난 소나무를 춘양목이라 우긴 데서 유래한다는 설,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춘양에 살았는데 춘향과 발음이 비슷한 데서 유래한다는 설들이 억지스러운 자리 하나씩 꿰차고 있는 느낌이라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춘양은 옛날부터 금강소나무의 유명한 생산지였다고 합니다. 또한 반출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봉화의 높은 산 곳곳에는 1930년대까지만 해도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0~50년대를 지나면서 깡그리 잘려 나갔다고 하는데요. 일제는 춘양에 제재소를 세우고 17년간이나 소나무를 실어냈답니다. 해방되고 나서도 권력자들의 손에 계속 벌목이 되었다는군요. 일제의 손에서 해방되고 바로 한국전쟁까지 일어났으니 국가 질서는 얼마나 혼란했겠습니까? 그러니 우수한 솔숲을 보전하고 관리할 여력이 없었겠지요.
춘양역은 1955년 7월 1일 영동선 개통 이래 금강소나무 집산지로 한때 큰 활기를 띠었다고 합니다. 봉화 울진 삼척 등에서 생산된 금강소나무들이 이곳 춘양역으로 모였기 때문에 춘양목이라 부르게 되었다는군요. GMC 트럭에 실려 온 소나무들이 역사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고 하는군요. 제재소도 많았답니다. 춘양은 한때 나무를 구하러 오는 사람과 나무를 운반하는 사람이 떠들썩하고, 늘어선 식당, 술집, 여인숙이 호황을 누렸다는군요. 이 영화로운 시대는 오래 가지 못하고 7~8년 만에 막을 내렸답니다. 더 이상 베어낼 소나무가 없어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래도록 국가의 기능과 안정적인 관리체계가 무너지면 그 피해가 사회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고 춘양면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가보았습니다. 작고 소박한 동네입니다. 주변 밭에서는 농업기술센터에서 키우고 있는 춘양목 묘목이 가득가득 자라고 있습니다. 허름한 한 식당을 찾아들었습니다. 젊은 할머니가 고봉밥을 내주시며 얼마나 살갑게 이야기를 걸어 오시는지 산골 마을의 정이 넘치는 듯 했습니다. 소나무를 보러 왔다고 하니까 문중의 선산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다고 보러 가자고 하시는데 일정이 있다며 사양하고 일어났답니다. 그런데 한 편으론 지역의 춘양목이 자라는 현장을 한번 가 보고 싶다는 마음도 내켰어요.
기차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떻게 소나무를 전국으로 운반하였을까요? 거리가 짧으면 우마차를 이용할 수 있었겠지만, 멀면 많은 물량을 옮기기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도동서원이 그 답을 말해 주고 있답니다. 봉화 지역에서 생산된 소나무는 계곡의 물길을 따라 연결된 낙동강으로 내려보낼 수 있었어요. 도동서원의 소나무 재목은 굽이굽이 흘러온 낙동강을 따라 이동한 것이지요. 나무 인문학자 강판권은 “춘양에서 낙동강에 띄워보낸 소나무를 현풍에서 건져 올려 지었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현풍은 도동서원에서 가깝답니다.
불볕의 체감온도가 올해 최고로 느껴지는 날의 오후입니다. 도동서원 주차장에 들어서니 붉은 정열을 불태우는 배롱나무 꽃은 더욱 강렬하게 피어오릅니다. 서원 입구에는 한강 정구가 심었다는 400년 은행나무의 굵은 몸통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정구는 도동서원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 옵니다.
도동서원은 김굉필(1454∼1504)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입니다. 1605년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고,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답니다. 400년이 넘었네요. 道東이란 이름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군요. 중정당은 강당이라고 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지방 사립대학의 강의실입니다. 서원에서 사당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상징적인 공간이지요. 中正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중용의 상태를 말한다는군요. 도동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더위도 식힐 겸 중정당 우물마루에 앉아 춘양목으로 만들었을 기둥의 섬세한 골계미를 바라봅니다. 눈을 들어 서원 앞의 풍경을 바라봅니다. 다시 서원 앞으로 내려와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고 섰습니다. 역사의 물줄기가 굽이쳐 흐르는 우리 소나무 문화의 한 자락이 따라 흐릅니다.
봉화 춘양면에 있는 춘양역
춘양역에 전시하고 있는 198년생 춘양목(남부지방산림청 춘양국유림관리소에서 기증)
농업기술센터에서 기르고 있는 춘양목 묘목밭
도동서원 중정당(서원은 조선시대 지방대학이었고 이곳은 학문을 논하던 강당이었다.)
도동서원 중정당의 우물마루
중정당 기둥의 골계미
봉화에서 흘러온 춘양목 소나무를 건져올려 서원을 지은 운송수단이었던 낙동강 물길(도동서원 바로 앞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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