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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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인물 - 남명 조식 4
산림처사(山林處士) 남명
남명 선생이 후학을 가르쳤던 산천재는 덕천강의 낮은 벼랑 위에 걸려 있어 지난날엔 학문을 닦는 것 뿐만 아니라 남명학(南冥學)의 근간인 올바른 정신을 심는 데도 안성맞춤인 자리로 생각된다. 이 산천재에서 올려다보면 천왕봉이 바로 보인다. 그래서 남명과 후학들은 지리산 정신을 바로 이곳에서 깊은 뿌리를 내리게 했을 것이다.
산천재에서 도로를 건너 옹기종기 자리한 마을(사리)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명의 종가와 별묘가 있다. 이 종가와 별묘(別廟)는 산천재와 남명 묘소와 거의 일직선상에 있다. 별묘는 종가의 뜰을 통과하여 찾게 된다.
종가의 뜰은 꽤 널찍하지만 아무런 꾸밈도 없이 감나무를 비롯한 나무 몇 그루만 있다. 또 슬레이트 지붕의 본채와 농기구 등을 넣어둔 별채 모두 엉성한 모습인데, 주인은 어디로 갔는지 빈집으로 있을 때가 많다. 그러나 종가 옆의 별묘는 한식기와집과 대문 담장 뜰이 잘 세워져 있고 꾸며져 있다. 별묘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남명의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남명의 신도비문은 네 개가 있었다. 처음 신도비는 정인홍이 지었는데 그가 실각하자 이 비석을 쓰러뜨리고 깨 없애버렸다. 남명의 후손들은 다시 당시의 명사들로부터 글을 구하게 되었는데, 허미수 송우암 조용주의 글이 같은 시기에 도착했다. 이 가운데 조용주의 글만 각자(刻字)가 되지 않고 남인 노론의 양대 영수의 글이 각자가 되었다.
“허미수 송우암은 남명과 같은 산림처사 출신이요, 그들은 다 같이 정치에 나아가 상위(相位)에 오른 특출한 인물이었고, 산림 출신이란 것 때문인지 지극히 남명을 추앙했다. 따라서 그들은 신도비문을 쓰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다투어 비문을 지었다. 그러나 두 개의 신도비를 함께 세울 수가 없어 난처해진 자손들은 미수비는 덕산에, 우암비는 삼가에 세웠다” (김충렬 남명학 연구원장의 말).
허미수 비문(碑文)은 철거
그런데 남인의 허미수와 노론의 송우암의 이 신도비는 일제시대에 소송사건까지 벌어지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허미수의 것은 다시 쓰러뜨려지고, 우암 송시열의 비문이 현재의 별묘 입구에 옮겨 세워진 것이다.
별묘는 원래 남명 선생이 기거하던 곳으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온 지맥이 바로 집 뒤에서 마지막으로 담장처럼 둘러처져 끝난 곳이다. 집 뒤편은 울창한 숲이 둘러싸고 있어 선생이 산림처사로 일관했던 정신이나 생애와 어울린다. 남명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집이 사당으로 바뀌었다. 현재 남명의 별묘는 신성한 영역으로 잘 보존돼 있다.
“이 별묘 바로 앞에다 일제 때 왜놈들이 경복궁 건물 바로 코앞에 총독부 건물을 짓듯이 지서와 면사무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남명선생이 임진왜란 때 자기 조상들을 많이 죽인 의병장들의 우두머리였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모욕을 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권인호 성균관대 강사의 말).
일인(日人) “조상 죽였다” 모욕
남명 선생이 만년에 기거했던 집은 그 뒤 새로 지은 한식기와의 별묘로 성역화 돼 있지만, 이곳을 찾아보면 그가 평생 산림처사로 일관했던 남다른 면모를 되살려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명은 38세 때 이언적의 천거로 6품관(헌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아니했다. 52세 때는 이언적의 천거로 ‘전생서 주부’, 53세 때는 ‘사도사 주부’, 55세 때는 ‘단성현감’, 66세 때는 ‘상서원 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남명은 단성현감이 제수 되었을 때 사면을 청하는 상소를 명종에게 올렸는데 그 상소문이 무능부패한 조정을 신랄하게 탄핵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하의 나랏일이 벌써 잘못되어서 나라 근본이 이미 망해가고 천의(天意)가 이미 버려졌으며 인심도 떠나서, 비유하면 백년 된 나무가 속은 다 파먹었고 진액도 말랐는데 폭풍우가 언제 닥쳐올지를 알지 못함과 같이 된 지가 오랩니다. 조정에는 충성되고 일을 아는 신하가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형세가 어려움을 알고 손대지 않으려 합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아래에서 비굴한 웃음을 보이면서 주색만 즐기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어름어름하면서 재물만 모읍니다. 내신(內臣)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에 끌어들이듯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서 이리가 들판을 날뛰듯 하는데 그러고도 가죽이 다 찢어지면 털이 붙어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일로 하여 낮에는 깊이 생각에 잠기기도 하며 밤에는 눈물로 아픈 마음을 억제하며 천장만 쳐다보며 탄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남명은 특히 이 상소문에서 ‘자전(慈殿)께서는 이 일들에 생각은 깊으시겠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못하시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先王)의 어리고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입니다’라고 직격탄을 쏘기도 했다. ‘단성현감 사의의 소’는 절대권력자인 왕을 정면으로 꾸짖은 일로 이 나라 상소문에서 일찍이 그 예를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우정의 곡식도 사양
남명은 덕산에 은거하여 6년을 보낸 명종 22년 임금으로부터 일곱 번째의 부름을 받았지만 조신(朝臣)들이 당파를 이루고 있음을 신랄하게 나무라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아니했다. 선조 원년에 또 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경(敬)과 의(義)를 왕도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신하를 옳게 등용하여 나라를 성덕으로 다스려갈 것을 바라고 벼슬길을 사양했다.
선조왕은 4년 뒤 가난하여 살기가 어려운 남명에게 곡식과 부식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맞아/ 구름낀 볕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배고픔 견디려면 배고픔을 잊어야 할뿐/ 도무지 산목숨 쉴 곳도 없네/ 집주인은 잠만 자고 구해올 줄 모르는데/ 푸른산 짙은 곳에 시내만 어둠에 흐르네’
남명의 이러한 시는 그가 산림에 묻혀 얼마나 가난한 일생을 살았는가를 엿보게 해준다. 그러나 그는 고향인 합천 삼가에 토지와 집이 있었지만, 그 모두를 버려둔 채 빈몸으로 지리산을 찾아든 것이다. 그의 청빈낙도는 그의 깊은 정신세계에서 연유했던 것 같다. 어떠한 벼슬도 마다한 그의 정신세계를 우매한 대중의 마음으로는 짚어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청도(淸道)에 살면서 남명과 사귀어오던 김대유(金大有)는 가난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늘 좁쌀을 보내주었다. 김대유는 명종 7년 74세로 죽을 때 “내가 죽은 뒤에도 남명에게 식량을 꼭 보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남명은 김대유의 유명으로 계속 보내오는 그 곡식을 사양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가난함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말했다.
남명이 이 세상을 떠난 뒤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학문과 정신이 점점 더 빛을 보고 있다. 그의 별묘와 종가 앞의 마을 집들은 앞으로 모두 철거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이 마을 일대가 사적지로 크게 정비될 것이라고 한다. 남명의 값진 삶은 그가 세상을 등진 뒤 한층 더 고귀하게 비쳐지고 있다.
『지리산365일 3권』 최화수 지음 도서출판 다나
1995년 1월 25일 4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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