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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상림의 문화유적 - 역사인물공원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1 01:01:06     78

 

역사인물공원은 2001년 새로운 천년을 열어가는 기념사업으로 함양군에서 만들었다. 중앙에 나라와 고을을 빛낸 함양의 인물 11명의 흉상이 서 있다. 그 주인공은 최치원, 조승숙, 김종직, 양관, 유호인, 정여창, 노진, 강익, 박지원, 이병헌, 문태서이다. 서쪽 입구에는 함양군의 역대관리선정비 30여 개가 남북으로 나누어져 각각 두 줄로 서 있다. 상수원 수원지 경계가 있는 남쪽에는 밀양박씨 열녀비가 있다. 이 비석은 조선의 사회상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증표가 되고 있다. 북쪽 선정비 건너에는 권석도 의병장의 동상이 서 있다.

숲의 서쪽 끝자락을 물고 있는 이 터는 지역 문중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농경지로 활용되었다. 숲의 경계를 따라 산수유나무와 아카시나무가 심어져 있다. 심지 않으면 나타날 수 없는 나무들이다. 역사인물공원은 상림에서 하나의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 흉상으로 서 있는 11명의 역사 인물은 함양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분들이다. 여기 다른 유적들도 분명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함양역사 인물들의 정신과 업적, 그리고 유적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최치원

최치원857~?은 뛰어난 정치 사상가이자 대문장가였다. 신라 말 경주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혼란한 당의 지방사회를 경험했다. 28세 때 신라로 돌아와 당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왕실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귀국 후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서서원에서 ‘학사’라는 문한직을 맡았다. 불교를 중심으로 유교와 도교를 인식하고 융합하려 했다. 최치원이 유·불·선을 융합하려 했음은 경문왕을 기리는 글인 「난랑비서(鸞郎碑序)」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선생의 종교·사상적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최치원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골품제라는 신분의 사다리에 막혔다. 천년 왕국의 끝자락에서 국가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삶을 마쳤다.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간 뒤의 일이다.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선생의 죽음은 908년 이후 어느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할 때 지었다는 시가 선생의 외로운 일생을 관통하고 있다.

최치원이 국정에 손을 놓고 산천을 유람한 방랑의 기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수많은 곳에 자연·문화유적과 전설을 남겼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자연문화유적이 함양상림(대관림)이다. 대관림 조성은 선생이 이룬 가장 크고 유일한 현장 사업으로 남게 되었다. 홍수의 피해를 벗어난 농경지와 주거지가 생겨나 함양읍민들은 풍요로운 정착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양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함양의 역사 인물 가운데 으뜸으로 존경받고 있다.

신라의 개혁과 재건을 꿈꿔온 최치원의 유교적 정치사상은 직계 후손들에 의해 고려 시대에 이어졌다. 최승로의 시무28조는 고려에 정치·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최치원은 한국 고대의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글을 남겼다. 사실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실용적인 글이 많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왕권과 신권이 대립할 때 통합하고 조율하는 역할로써 근대 정치사에서도 활용할 정도로 주목받아 왔다. 최치원은 우리 정치·문학사의 큰 맥을 이어온 역사 인물이다.

 

비 내리는 가을밤

가을바람에 괴로워 시를 읊지만

세상에서는 알아주는 이 없구나.

창밖에는 밤이 깊도록 비 오는 소리

등불 아래 마음은 만리고향 달리네.

 

 

조승숙

조승숙1357~1418은 고려말 학자이자 충신이다. 스승인 정몽주를 본받아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1392년에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때 조승숙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면서 개성 만수산 서쪽에 있는 두문동에 들어갔다. 그 후 고향인 덕암으로 돌아와 1395년 교수정을 짓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일찍이 향촌에 학문의 씨를 뿌린 것이다. 교수정은 개평마을에서 안의 방향으로 1km쯤 도로 옆 낙락장송이 어우러진 작은 동산에 있다. 지곡면 개평리 142번지이다. 동산 아래 남쪽으로는 지곡천이 흐른다.

조승숙은 개평마을 덕암에서 두문불출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야은 길재와는 편지를 통하였다. 길재와 나누었다는 이 시는 교수정 주련에 걸려 있다.

 

조승숙의 시

산을 등지고 물을 임하여 속세 떠나 살아가는데

달뜨는 저녁연기 끼는 아침 흥이 남아있구려.

서울에 있는 친구가 나의 소식을 묻거들랑

대나무 숲 깊숙한 곳에 누워 글 읽는다 하여라.

 

길재의 시

시냇물 가까운 초가집에서 홀로 한가롭게 사는데

달은 밝고 바람이 맑으니 흥겨움이 남아있구려.

질박한 손님은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는데

침상을 대밭에 옮겨놓고 누워서 글을 읽는다네.

 

70여 년 후 성종은 귀향하는 유호인에게 제문을 내려 조승숙의 제사를 극진하게 모시게 했다. 유호인이 지은 제문에서 백이·숙제의 ‘수양산’과 도연명의 ‘율리’를 따서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라는 글귀를 비석에 새겼다. 오직 한 임금만을 섬기며 향리에 숨어서 맑은 바람처럼 산 것을 칭송하는 글귀이다. 이 백세청풍비는 교수정이 있는 솔숲 동산 바위 위에 세워 놓았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거북 머리는 자연 암반을 다듬어 조각하였다. 거북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동산의 바위틈을 절묘하게 이용한 것이 돋보인다. 가까운 곳에 있는 개평마을 일두고택의 사랑채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 백세청풍(白世淸風)이라는 글귀가 있다. 선인(先人)의 고매한 정신을 기리는 가문의 마음이 엿보인다.

 

김종직

김종직1431~1492은 관료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평생을 성리학적 도학 이념을 가르치고 실천하였다.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 영남학파(사림파)를 세웠다. 학문이 넓을 뿐 아니라 청렴하고 공정했다. 1471년 함양군수가 되어 백성을 위하여 세금을 덜어주는 정책을 실천하였다.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함양의 문화발전에도 힘을 써 백성들의 커다란 사랑을 받았다. 함양에는 차[茶]가 생산되지 않지만, 나라에 차를 내어야 했다. 김종직은 이러한 폐단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지리산에 자라고 있는 차나무를 찾아 그 씨를 받아서 심게 하였다. 관영다원(官營茶園)을 만들고 번식시켜서 나라에 차를 받칠 수 있었다. 1998년 휴천면 동호리에 관영차밭 조성터 기념비를 세웠다.

김종직은 전국의 관리로 가는 곳마다 자연과 역사문화 현장을 보고 느낀 시를 남겼다. 함양에서 김종직과 관련된 문화재로는 학사루가 유명하다. 학사루는 학자·선비들과 관련된 함양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이름 높다. 최치원이 함양 태수를 지낼 때 이곳에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고 해서 학사루라 한다. 신라 시대에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학사루는 원래 함양읍성의 동헌에 딸린 건물이었다. 1910년 이곳에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질 때도 학사루는 그대로 있었다. 함양초등학교의 교실,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었다. 지금은 함양군청 앞에 있다. 1978년 겨울에 옮겼다.

김종직은 학사루에 걸려 있던 경상도관찰사 유자광의 시를 보고 기분이 언짢았다. 유자광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간악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되지 못한 자광이 감히 선비들이 지어 거는 학사루에 시판을 걸다니” 하고 떼어버렸다. 이는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올린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둘러싸고 생겨난 무오사화(1498년)의 씨앗이 되었다. 유자광이 문제를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김종직은 죽어서도 극형인 부관참시를 당했다.

 

양관

양관1437~1507은 함양 수동 우명리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에는 효자가 많이 나와서 효리라고 부른다. 양관은 홀로 고생하며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소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무과의 관리가 되었다. 그만큼 효심이 깊었고, 왕이 청백리의 표본으로 삼을 정도로 청렴했다. 양관이 덕천 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 맑고 검소하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암행어사 이색이 그의 짐을 수색하였다. 그 속에는 책과 거문고, 학 그림, 그리고 삼베 이불이 전부였다. 성종은 양관이 덕천 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의 행색을 그리게 했다. 이 그림을 어전(御殿)에 붙여두고 관리들의 모범으로 삼았다. 아래 시는 양관이 덕천 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지은 시라고 한다.

 

내 마음 저 푸른 하늘과 같은지 비춰보니

추호라도 본연의 욕심이 없는지 의심스럽다.

돌아갈 행장을 차려보니 도리어 부끄러운데

삼베 이불이 오히려 덕천 밭에서 난 것이네.

 

효리에 있는 삼괴정은 양관의 사랑채였다. 후학을 가르치며 생활했던 공간이다. 건물이 소박하기 그지없다. 삼괴정 바로 뒤편으로 일로당 양관을 모신 구천서원이 있다. 양관은 영남학파의 몰락을 가져온 무오사화 때 은퇴하여 관심 밖의 인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유호인

유호인1445∼1494은 함양상림과 실제 생활에서 인연을 맺고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함양읍 대덕리 죽장마을에서 공부하며 살았다. 인품이 맑고 검소했다. 관직에 오래 있었으나 가난하게 살았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서정적이며 내면세계를 관조하는 성품을 지녔다. 시와 문장을 잘 지은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아래의 시는 선생이 지인들과 함양의 뇌계가에 노닐면서 지은 것이다. 자연경관의 아름다움 속에서 은둔하는, 넉넉하고 자유로운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두류산 가을 기운 산허리 감돌고,

함양 들녘에는 나락도 알차네.

온 고을에 누런 낙엽 흩날리는데

인생이 이에 이르러 애달파지네.

백사정 가 물결은 흰 비단인 듯

세상 밖 흥에 겨워 세사를 잊네.

숲속의 나그네를 사람들은 모르니

맨머리 하고 삿갓은 바위에 두었네.

 

---(하략)---

 

글을 좋아하는 성종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수동 우명리에서 태어나 함양상림 안쪽 죽장마을(옛이름; 대덕)에서 살았다. 이 마을 이장을 지냈던 분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선생이 살았던 자리에는 깨진 기왓장이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마을 어른들은 자긍심을 갖고 뇌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뇌계 가까운 대덕에 살아서 호를 뇌계(㵢谿)라 하였던 것 같다. 위천과 함양의 경관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짐작이 간다.

유호인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는 과거 급제 이야기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선생은 궁궐에 들었다가 우연히 성종 임금과 마주쳤다. 임금님 앞에서 즉문즉시를 지었다. 선생의 실력에 놀란 임금은 그 자리에서 과거시험에 합격시키고 홍패를 주었다. 두 번째는 도덕고개 낚시 이야기이다. 상림 북쪽 끝에서 도천마을 가는 사이에 고개가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도덕고개라 불렀다. 지금의 도천마을 솔밭 맞은편이다. 선생은 이 고개 아래 깊은 소에서 낚시를 하다가 커다란 잉어를 낚았다. 잉어가 살아 있도록 정성껏 그릇에 담아서 임금님께 올리기로 했다. 먼 길을 떠나 밤이 되어 주막을 찾고 있었다. 이때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러 나온 성종 임금을 만났다. 성종은 자신을 속여 궁궐의 관리라 하고는 시골선비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금잔 은잔에 좋은 음식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나왔다. 이를 본 선생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이래 가지고야 어찌 임금을 바로 모실 수 있으며 백성을 바로 다스릴 수 있겠소? 당장 이 음식을 내가시오.” 하고 소리쳤다. 성종은 크게 감동하여 충직한 신하로 삼게 되었다. 이 전설들로 미루어 성종이 유호인을 얼마나 총애하였는지 알 수 있다. 실제 유호인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성종은 선생의 손을 잡고 술을 권하면서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있으렴 부디 같이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네 싫더냐 누구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정여창

정여창1450~1504은 함양 지곡 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유학 사상 찬란한 빛을 남긴 대학자이다. 지리산골 하동에서 악양정을 짓고 3년 동안 성리학의 심오한 이치를 연구하였다. 안음(지금의 안의면) 현감 때에는 백성들의 높은 세금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고을의 총명한 학생들을 뽑아 가르쳤다. 잔치를 베풀어 가난하고 외로운 촌로들을 위로하는 등 주민들의 복지향상에도 힘썼다.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 하여 곤장 100대를 맞고 함경도에 유배되었다. 관노 생활을 하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그해 9월 갑자사화를 맞아 부관참시까지 당하였다. “도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하여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인본주의를 추구한 그의 정치론이었다. 스스로를 낮추어 호를 한 마리의 좀, 일두(一蠹)라고 지었다.

안의면에 있는 용추계곡에는 정여창과 관련된 ‘일두어’라는 전설이 전한다. 용추계곡이 높고 낙차가 커서 물고기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다. 선생은 이 아름다운 계곡에 물고기가 없음을 아쉬워했다. 붉은 비늘을 가진 물고기를 잡아 위쪽 개울에 놓아 주었다. 그 물고기들이 알을 낳고 자라나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여창과 관련된 역사문화 유적은 함양에 아주 많이 남아있다. 선생이 살았던 개평마을의 일두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8년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개울 건너 남쪽 산등성이에 100여 그루의 소나무가 모여 있다. 마을이 들어설 때 심었다는 거대한 노송길이다. 정여창은 이 솔숲을 걸으며 사색하고 휴식하였다고 한다. 이 소나무군락지는 경남기념물 제254호로 등록되었다. 남계서원은 정여창을 모신 대표적인 서원이다.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으로 이후 조선 서원의 전형이 되었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9개 중 하나로 등록되었다. 수동면 원평리 586-1번지에 있다. 정여창 묘역은 경상남도기념물 제268호이다.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번지 개평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승안산 자락에 있다. 안의면 봉산리 805-1번지에는 정여창 선생 사당비가 있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9호이다.

 

노진

노진1518~1578은 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풍천노씨(豊川盧氏)는 500여 년 동안 대를 이어 함양에 살아왔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정여창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진주 목사로 있을 때 남명 조식과 자주 만났다. 청백리를 위한 궁중연회에 맨 먼저 초대받을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자신을 닦는 위기지학에 힘썼다. 경(敬)과 의(義)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남명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책을 남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점도 남명과 비슷하다.

 

강익

강익1523∼1567은 함양 수동 효리에서 태어났다. 함양의 향토문화 발전에 큰 힘을 썼다. 1552년에 남계서원을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0여 년 동안의 서원 건립 작업은 몇 번이나 중단되는 고통이 있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지방 유생을 설득하여 백운동서원 다음으로 만든 서원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아직 서원이 낯선 시기이다. 남계서원은 성리학의 현인 정여창을 중심에 모신 서원으로 이름이 높다. 명종이 현판을 내린 사액서원이다. 말하자면, 임금님께서 인정해준 지방 사립대학이다. 강익은 지리산의 큰 스승 남명 조식을 모시고 공부하였다. 경남 산청에 있는 산천재에서 남명 선생을 모시고 달구경 하면서 읊은 시가 있다.

 

흰 달빛이 다림질 한 듯 밝은데

맑은 시냇물은 고요히 흘러가네.

봄바람을 하룻밤 쐬고 앉았으니

참된 즐거움을 알만도 하였네.

 

지리산 북쪽 마을 함양 등구동에 양진재(養眞齋)를 짓고 살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극기와 신독(愼獨)을 권장하여 말보다는 실천적인 학문을 하도록 하였다. 자신이 세운 남계서원에 잠들었다.

 

박지원

박지원1737~1805은 대문장가, 실학자의 중심인물로 개혁사상가였다. 안의현감을 지내면서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기록했던 청나라의 선진 문명을 연구하여 실생활에 옮겼다. 우리나라 최초로 벽돌을 구워 건물을 지었다. 하풍죽로당, 연상각, 공작관 등 중국식 건물이었다. 수차·베틀·물레방아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였다. 물레방아는 곡식 빻는 노고를 줄여 주었다. 풍구는 쭉정이 따위를 날려 없애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이지만 특히 함양에서 백성들의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직자로서 생활과학의 연구가 돋보인다. 안의면 용추계곡 언저리에 연암물레방아공원이 있다. 이곳에서 박지원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물을 이용해 방아를 찧을 수 있는 ‘물레방아’를 처음 실용화했다. 그래서 함양을 물레방아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열고 있는 함양물레방아축제도 여기서 따온 것이다. 안의현청이 있었던 안의초등학교에는 1986년에 세운 ‘연암 박지원 선생 사적비’가 있다.

 

이병헌

이병헌1870-1940은 함양에서 태어났다. 유교 개혁운동과 민족의 주체의식을 바탕으로 구한말의 위기를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곽종석의 제자였으나 도학(유교사상)보다는 개화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3년 서울에 올라와 시국의 변화를 느꼈다. 왕도정치로의 국가 이념인 유학체계는 급변하는 사회에 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강유위의 변법자강론과 세계정세에 관한 서적을 읽고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1914년 중국에 건너가 대학자이자 개혁사상가인 강유위를 만났다. 그 뒤로 다섯 번을 더 만나 지도를 받았다. 강유위는 서구 근대문명을 일으킨 기독교의 종교적 기능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이를 참고하여 유교의 종교적 기능을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헌의 유교개혁은 전통 유학을 벗어나 실천적 유교로서 종교화하는 것이다. 상제를 주재신으로 하고 공자를 교조화하는 종교(공교)를 만드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화된 문화를 수용하여 전통문화의 입장에서 유교를 개혁하는 것이다. 이병헌은 전통 유교를 향교식 유교라 하고, 공교를 교회식 유교라 하였다. 성경(聖經)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고, 교사를 선발하여 경전을 가르치고 포교하자고 주장했다.

1923년 유교개혁 및 공교(孔敎)운동을 위해 경남 산청에 배산서당(培山書堂)을 지었다. 낙성식에는 전통 유림의 거센 저항이 있었다. 박은식, 이시영, 김구 등이 보내온 낙성식 축문이 남아있다. 이병헌의 유교 개혁운동의 기본은 오랜 세월 변질되고 타락한 공자의 사상을 살려내는 유교복원론이었다.

 

문태서

문태서1880~1912는 구한말 의병대장이다. 함양 서상면 상남리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는 ‘문태수’라고 불렀다. 체격이 튼튼하고 날렵하며 의지가 강했다. 어려서부터 대장 노릇을 했다. 스승으로 추정되는 이웃 마을의 이제두 선생으로부터 학문과 병서를 익혔다. 이제두 선생의 소개로 금강산에 가서 무술을 연마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구국 활동의 큰 어른인 최익현을 찾아가 의병활동을 논의했다. 을사늑약은 을사5적이 일제에 우리의 외교권을 넘겨준 치욕의 사건이다.

1906년 함양 안의로 내려와 6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영각사에서 훈련을 했다. 서상 남덕유산 아래에 있는 원통사에 기지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경남, 전북, 충북, 경북 네 개 도를 넘나들며 신출귀몰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일본군마저도 덕유산 호랑이라 불렀다. 의병활동 중에도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았으며, 위로하고 보호하여 존경을 받았다. 자신과 가정을 버리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생명을 건 고난의 길을 걸었다. 1911년 고향에 성묘 갔다가 영각사 입구 주막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3년 34세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2010년 서상면 상남리 1004번지 사적 공원에 순국기념비와 생가, 사당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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