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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상림의 형성과 변천 - 위천의 범람과 상·하림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1 12:54:54     66

 

위천의 옛이름은 뇌계(㵢溪)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어난 강물이 우레처럼 소리치며 사납게 넘쳐 흘렀다고 한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대홍수로 인한 상림 일대의 상황기록을 남긴 시를 보면 ‘돌로 쌓은 방죽’은 터지고, ‘높고 거대한 수목들’은 모래와 함께 뒤엉켜 떠내려가는 형국이 마치 잔챙이 덤불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김종원, 2011). 이로 볼 때 홍수를 만난 뇌계의 물길이 얼마나 사납게 흘렀으며 그 영향으로 마을과 농토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치수(治水)는 지방관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이처럼 사납게 흐르던 물줄기를 돌려 제방을 쌓고 고을과 농토를 보전하려는 지방관의 노력과 함께 대관림의 조성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위천의 좁은 계류는 상림 숲머리 부분에서 넓게 퍼지며 넓은 충적지를 형성하여 비옥한 농경지를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하여 상림 일대는 일찍부터 농경문화의 거점이 되어왔던 것이다. 함양상림은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토지이용’의 전형을 보여주는 인류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한반도의 대륙성 강우 패턴을 고려할 때, 짧은 기간에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범람이나 홍수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연중 백성들의 농경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친 생태적 토지관리 전략을 실천했던 것이다”(김종원, 2011). 최치원의 대관림 조성에 따른 치수사업으로 위천의 넓은 충적지는 비옥한 농경지가 되었다. 고을과 농토는 홍수와 강바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다.

대관림은 약 200년 전 큰 홍수가 나서 숲의 가운데가 끊어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대관림을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누어 부르게 되었다. 『조선의 임수』라는 책에는 대관림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일본인에 의하여 작성된 『조선의 임수』에 의하면 상림숲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대관림으로 불리우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마을 사람들이 상림과 하림으로 부르고 있으며 (중략) 함양부를 함양 위천 방향으로 이전함으로써 대관림의 규모가 축소되었으며, 1800년에서 1810년대에는 이미 많이 훼손되어 1938년 현재 당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명남재. 2013).” 그러니까 1800년쯤에 대관림은 중간이 끊어진 상태로 복원되지 못하고 계속 그대로 흘러온 것으로 볼 수 있다.

2018년에 논문을 쓰면서 함양 주민들과 면담을 하는 동안 함양 원로께 전해 들은 하림 주변 이야기가 있다. 인당 아래 위천은 팔령 쪽에서 내려오는 물과 병곡·백전 쪽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백사장과 자갈밭으로 남아있었다. 여기에 활터도 있었고 축구를 할 정도로 넓었다. 함양 민요에 “인당 깽번에 자갈도 많고 캐지나 칭칭나네” 하는 노랫말은 여기에서 유래가 되었다. 예전에는 상림에서 하림 사이 중간중간에 커다란 고목이 있었다. 상림과 하림 4km를 이어왔던 숲의 흔적이다. 1936년 병자년 대홍수 때 위천 주변은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하림 쪽의 피해가 컸다. 둑이 무너지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하림 쪽의 나무도 땅도 떠내려갔다. 이때 함양 읍내에도 물이 들어 장독이 떠다닐 정도였다. 병자년 대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 하림 빈터에는 비행장이 들어서고 군부대가 주둔하게 되었다(양갑용, 함양체육회 회장).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 뒤 비행장은 사라지고 군부대는 아직 남아있다. 하림은 2005년부터 시작하여 2009년 5년 동안 공사를 마치고 하림공원으로 조성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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