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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상림의 형성과 변천 - 함양상림의 형성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1 12:54:15     58

 

함양군은 신라 때 속함군(速含郡)이라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757년) 때 천령군(天嶺郡)으로 바꾸었다. 함양상림은 신라 진성여왕 때 천령군의 태수였던 최치원이 조성한 숲이라고 전한다. 그 당시 자연 선상지를 이루고 있던 함양읍 중앙으로 물이 흘러 농경은 물론 사람이 살기도 힘들었다. 홍수가 나면 선상지 평원 전체에 불어난 물줄기가 휩쓸고 내려갔다. 최치원은 위천의 물줄기를 돌려 4km에 이르는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심은 후 대관림(大館林)이라 불렀다. 지금 한들이라고 부르는 넓은 농경지와 함양읍의 주거지는 그 뒤에 생겨날 수 있었다. 습지로 남아있던 자연 그대로의 땅이 물이 빠지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산언저리에 살던 사람들이 평지로 내려와 커다란 읍내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적인 문제를 다투어 볼 필요성이 생겼다. 2020년 1월 현재 한들 주차장 가까운 논에서 유적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예전에 선상지 평원이었던 곳이다. 이 유적은 3천 년 전 청동기 시대 집터로 밝혀지고 있다. 그것도 규모가 큰 취락이라고 한다. 지금으로선 청동기 시대에 이 선상지 평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최치원 선생이 대관림을 조성하기 2천 년 전에 이미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관림 조성 당시의 한들 주변 생활환경과 신라말의 정치적 변동상황을 추적하고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대관림 조성의 목적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민들은 읍내 옛 물길 주변을 50cm 정도만 파도 강자갈이 나온다고 입을 모은다. 상림에서부터 함양여중 사이를 지나 한들 가운데로 흐르는 물줄기는 지금도 남아있다. 한들의 농업용수로 큰 몫을 해왔다. 이 물길은 오래전부터 흐르던 가장 큰 물줄기로 1918년에 만들어진 지도에도 나온다고 한다.

『함양읍지』에는 최치원 선생이 대관림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태수께서 치수와 농경관개를 위해 상림에 제방을 쌓고 나무를 심어 가꾸었으며, 지금의 우거진 수목들은 그때 심어진 것이다.” 조성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인 맥락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진성여왕 때에는 들끓는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신라의 힘이 기울었다. 최치원은 지방사회의 실상을 파악하고 혼란을 수습하려는 목적으로 890년부터 893년 사이에 대산군(지금의 태인과 정읍)과 부성군(지금의 서산)의 지방관으로 나갔다. 천령군(함양군) 태수도 같은 목적으로 볼 수 있다.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 당시 천령군은 견훤 세력으로부터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방어할 수 있는 길목이었다. 함양은 광주에서 출발하여 남원, 합천, 경주로 이어지는 지리산 북부의 교통로에 위치한다. 이 혼란한 시기에 하필 함양 태수로 내려온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893년 중앙정계로 돌아와 국가 재건에 노력을 기울였다. 894년 지방사회의 혼란스러운 경험을 토대로 정치·사회적 개혁안을 담은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이로 인해 6두품 신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관직인 ‘아찬’이 되었다. 아찬은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해인사 승려 희랑에게 준 시에 제명한 ‘방노태감 천령군 태수 알찬 최치원’이라고 한 데서 알찬이 아찬이니 진성여왕 8년 아찬에 승진한 뒤 천령군 태수에 임명되었을 것이다”(함양군, 2012). 최치원은 898년(효공왕 2) 정월 해인사에 들어갔다가 908년 이후 어느 시기에 삶을 마쳤다(장일규, 최치원의 사회사상연구). 해인사에 들어갈 때 이미 최치원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한계와 회의, 건강의 악화를 맞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최치원은 아찬이 된 뒤 함양 태수로 활동했고 해인사에 들어가기 전 함양 태수에서 물러났다. 그렇다면 함양상림을 조성한 시기는 894~898년 5년 사이일 수밖에 없다. 최치원이 함양에 머문 기간은 5년보다 짧을 것이다. 이 짧은 기간에 국가적 명운이 달린 혼란 속에서 치수 사업을 했다는 사실에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대관림 조성에는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야 했고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바람 앞에 촛불 같았던 그 당시 신라의 정세와 대관림 조성 사이에는 미지의 강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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