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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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생애와 사회사상
최치원(崔致遠)857~?은 857년 신라 말 헌안왕 때 태어났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17년을 지냈다. 28세 때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사회에서 최씨는 경주에 기반을 둔 6두품 계층이었다. 그들은 6부(六部)의 한 씨족집단에서 비롯하여 전쟁 수행과 함께하는 정치적 역할 속에서 성(姓)을 받았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파되었다. 경주최씨 출신들은 특히 신라 하대에 정치·사회적으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신라 말에 활동했던 경주최씨 인물들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유학지식인이었다. 당나라 유학생은 귀국 후 관직진출이 국학 출신보다 유리했다. 경주최씨 출신들의 도당(渡唐) 유학은 경문왕대~진성왕대에 유난히 활발했으므로, 경주최씨 가계의 성장은 경문왕계(48대 경문왕;861–875, 49대 헌강왕;875-886, 50대 정강왕;886-887, 51대 진성여왕;887-897)의 왕권강화 작업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최치원은 입당 전에 이미 당의 권위를 강조하면서 관직진출을 지향하는 경향을 가졌다. 당 문화에 대한 이해는 당의 권위와 학문의 힘으로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려는 성향으로 나타났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의 태학에 들어가 시부와 책문을 익히는 데 열중했다. 그는 관직진출을 원하여 빈공진사에 급제하고 지방관인 말단의 현위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고위직에 나아가기를 원하며 현위직에서 물러나 공부에 몰두했다.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회남절도사 고변(高騈) 아래서 현위보다 높은 순관으로 감찰과 문한의 임무를 맡아 관직생활을 했다. 순관은 절도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이 속에서 혼란한 당의 지방사회를 경험했다. ‘황소’에게 격문을 보내 힐책하여 문명(文名)을 얻게 되자, 더욱 고변의 관심을 받았다.
최치원은 고변의 관역순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강력한 힘을 가진 절도사들의 대황실관계를 보았다. 말기의 당나라 황실이 점차 약화되는 모습은 신라 말기 왕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최치원은 경문왕계 왕실을 도와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헌강왕 말기인 884년에 귀국을 꾀했다. 귀국의 직접적인 이유는 고변의 정치적 실권과 도교 혹신, 그리고 신라 정국의 변화 때문이었다. 최치원은 정치적 실권 후에 점점 도교를 탐닉했던 고변을 보면서 더 이상의 관직진출이나 자신의 이상을 펴보려는 기대가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최치원은 귀국 후 서서원학사의 문한직을 맡았다. 문한관은 외교문서의 작성을 전담했다. 외교문서의 작성은 고도의 문장기술이 요구되었으므로, 당에 유학한 유학지식인들이 주로 담당했다.
그는 당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익힌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군주자질론과 신하역할론, 그리고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의 조화, 어진 인재등용의 필요성 등을 담은 글을 모아 『계원필경집』을 엮어 헌강왕에게 올렸다. 문집에는 당시 당의 사회혼란을 일으켰던 반적(叛賊)들을 다스리는 입장이 실렸다. 특히 군왕의 덕화정치(德化政治)와 도의 추구가 강조되었다. 『계원필경집』은 헌강왕의 왕권강화를 지지하는 이념적인 기반으로 제시되었다.
헌강왕은 정치세력을 재편하면서 측근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경문왕을 이어 유학을 진흥하고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유학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강화를 추구했다. 최치원은 중국에서 귀국한 후 헌강왕의 명으로 8년에 걸쳐 「사산비명」을 지었다. 왕실원찰의 내력을 소상하게 담은 「대숭복사비명」을 제외한 나머지 비명은 입적한 고승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지었다.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명」은 진감의 공덕을 기렸으며,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과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 역시 각각 낭혜와 지증을 추모하는 비명이다. 「사산비명」은 우리나라 비갈문학의 효시가 되었다. 「사산비명」에는 경문왕계 왕실이 추구했던 사상경향이나 정국운영 방향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호국불교를 내세운 신라시회였지만, 경문왕대 이후 유교적 정치이념을 추구할 만한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유학지식인의 수용은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기존의 정치사회적 개혁을 위한 정치이념이었다. 불교를 통해서 유교와 도교를 인식하거나 융합하려고 했다. 「사산비명」에는 유·불 양교에 대한 조화와 융합을 담았다. 신라 말의 유학지식인들은 유교·불교·도교를 함께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졌다. 신라의 토착신앙이 유·불·선과 관련하는 모습은 이미 신라 중고기에 형성된 화랑도를 통해서 확인된다. 최치원이 유·불·선 삼교를 융합하려 했음은 「난랑비서(鸞郎碑序)」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인 풍류가 있었다. 풍류는 노사구(魯司寇)의 가르침과 주주사(周柱史)의 종지(宗旨), 축건태자(竺乾太子)의 교화인 삼교를 포함하며, 그 가르침의 근원은 이전부터 전해져오던 「선사」에 실렸다. 최치원은 화랑 난랑을 기리는 비명의 서문에서 신라에 이미 유·불·선을 아우르는 고유의 풍류가 있었음을 강조했다. 「난랑비」는 경문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명이다. 「난랑비서」는 경문왕계 왕실이 점차 쇠퇴해지자 왕실의 권위를 부각하기 위해서 국선인 경문왕을 강조하려고 찬술되었다.
헌강왕을 이은 정강왕은 불과 2년의 집권에 그쳤다. 그 뒤를 진성여왕이 이었다. 불안한 정국 속에서 경문왕계 왕실의 왕권강화 작업은 지속되고 있었다. 진성여왕에 이르러 중앙정부는 지방사회의 동요와 함께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고 있었다. 889년 진성여왕(眞聖女王)이 국세의 납부를 독촉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와 호족들이 일어나 조정은 위태로웠다. 신라 왕실은 지방 통제가 사실상 붕괴되어 급속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경문왕계 왕실의 측근으로 활동해온 최치원은 이 시기 중앙정계에서 의심과 시기를 많이 받았고, 890년에는 스스로 지방관으로 나아갔다. 태산군(전북 정읍)과 부성군(충남 서산)의 태수로 있으면서 서남 지역의 민심을 회유하고 견훤의 세력 확장을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새로운 국가로 등장하여 신라의 영역을 차지해 갔다. 892년 견훤이 신라의 서남 지역을 장악하고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후백제의 건국은 신라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신라 지방군을 규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세운 견훤이 무력을 앞세워 경주를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901년에 견훤은 남원과 함양을 거쳐 합천의 대야성(합천읍에 있음)을 위협하였다. 신라 왕실의 지방 지배력 약화를 걱정하면서 태산군과 부성군의 태수로 나아갔던 최치원은 후백제와 접했던 군사전략상 요충지를 방어하려고 하였다. 남원에서 합천을 잇는 지리산 북부의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한 천령군) 태수를 맡았다. 함양에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은 상림(上林)과 학사루가 있다. 대관림(大館林)이라고도 불리는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渭川)의 호안림(護岸林)이다. 상림은 최치원이 천령태수로 있을 때 위천의 홍수 피해를 막고자 둑을 쌓아 강물을 돌리고 여러 종의 나무를 심어 만들었다고 전한다.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는 언제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이 자주 누각에 올라 시를 읊었던 곳이다. 후세 사람들은 최치원을 기려 학사루라고 불렀다.
최치원이 천령태수로 임명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견훤의 후백제 건국 이후부터 사신으로 임명되기 전 892~893년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변의 종사관(순관)으로 활동하면서 독자세력화를 이루는 지방 사회의 변화를 직접 경험했던 최치원이지만, 위기의 신라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893년 최치원은 중앙정계로 돌아왔다. 혼란한 지방사회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 경험을 토대로 894년 진성여왕에게 왕실의 안정과 안녕을 염원하며 시무10여조를 올렸다. 진성여왕 역시 문한관으로서 시무책을 제시하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진성여왕은 시무10여조를 받고는 기뻐하여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하지만 시무10여조에 의한 개혁은 중앙귀족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시무10여조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중앙의 진골귀족이 시무10여조에 대한 반발이 있은 후, 895년 진성왕은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책봉했다. 주도권을 장악한 진골귀족의 왕권에 대한 거센 도전에 굴복한 것이다. 2년 뒤인 897년 진성왕은 태자 ‘요(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북궁(해인사)으로 물러났다가 12월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효공왕 이후 신라 왕들은 견훤의 무력에 시달렸고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은 고려에 나라를 맡겼다.
최치원은 시무책을 올린 뒤 ‘스스로 불우함에 마음 상하여 다시 벼슬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을’ 정도로 거센 비난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후 그는 중앙정계를 멀리하며 옛 신라 지역으로 축소된 지방 곳곳을 돌아다녔다. 최치원이 산천을 유람한 때는 요가 태자가 되었던 895년 10월 이후부터 요가 왕위에 오르는 외교문서를 작성했던 897년 6월 이전이다. 방랑의 기간은 채 2년이 되지 않지만, 그의 흔적은 수많은 곳에 남아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을 때는 물론 신라에 돌아와서도 난세(亂世)를 만나 불우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신라는 이미 멸망 전야의 암흑기에 들었고, 최치원은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발휘할 길을 찾지 못하였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를 읽는 최치원의 현실인식은 어디까지나 신라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후 최치원은 해인사로 들어갔다. 해인사는 신라 하대 화엄종의 종찰이자, 의상계 화엄종 사찰이었다. 또한 왕실의 원찰(願刹)이었던 해인사는 훼손된 사역을 복원하려했다. 중창불사는 진성여왕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최치원은 897년 6월 이후에 해인사 중창 관련기문을 찬술하면서 왕실의 호불(護佛)을 중심으로 신라의 재건을 모색했다. 해인사의 중창은 단순한 사역복원이 아닌 말법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법륜을 밝히는 계기가 되어야만 했다. 불법(화엄사상)의 수호를 통해서 신라를 재건하려는 노력은 점차 호국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 국정 파트너였던 진성여왕과 최치원은 해인사에서 화엄사상을 통해 마지막까지 왕실의 안녕을 놓지 않은 셈이 된다. 898년 최치원은 진성여왕이 잠든 해인사에 가족마저 이끌고 은거했다. 지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908년까지 저술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후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저술활동마저 어려워졌고, 908년 이후 어느 시기에 삶을 마쳤을 것으로 본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 최치원의 사상을 계승한 최언위, 최승우, 최승로 등은 고려의 관직에 나아갔다. 신라의 개혁과 재건을 꿈꿔온 최치원의 사상은 자연스럽게 고려로 이어졌다. 최치원의 존왕적 정치이념과 사상은 나말여초 격변기에 분열을 공존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 광종 때 최언위 집안은 왕권강화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광종의 무력에 의한 강력한 정치력은 고려의 왕권강화를 위한 바탕을 마련하게 되었다. 재상까지 오른 최승로(崔承老 927~989)는 성종의 신임을 받았고,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적 통치 이념에 따른 제도를 정비했다. 성종 대에 이르러 왕권과 신권의 화해를 이루어낸 고려는 본격적인 문치(文治) 사회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최치원은 한국 고대의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글은 시부(詩賦)는 물론 외교문서와 역사 및 불교관련 글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최치원은 자연과 주위 여건, 자신 등을 주제로 수양에 목표를 두고 스스로의 자신의 이상과 괴리된 현실의 처지를 시로 읊었다. 그는 옛것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열되 반드시 사실을 전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때문에 많은 전고(典故)를 인용하여 자신의 논조를 정확히 입증하려고 힘썼다. 자연히 최치원의 글은 당시의 사실을 그대로 이해한 바탕 위에서 사안에 따라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실용적인 성격을 지녔다.
한국사에서 신라의 역사와 문화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루는 바탕으로 이해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말 이래 많은 역사가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비록 왕실을 중심으로 했지만, 신라의 역사문화를 종합했고, 사회의 혼란과 분열을 융합하려고 애썼다. 한국사의 이면에는 왕권과 신권(臣權)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과 신분계층의 대립에 의한 사회변혁이 있었다. 정치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국왕을 중심으로 통합할 필요가 제기되었을 때, 전통과 외래문화를 아우른 최치원의 활동과 저술은 무엇보다도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참고자료
『최치원의 사회사상 연구』 장일규 신서원 2008년 12월 15일 초판1쇄 발행
『지리산 문화권』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역사공간 2004년 8월 15일 초판1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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