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상림
함양 상림 공간입니다.
함양상림
3만 6,000여 평의 너른 땅에 100여 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무성하여 안정된 식물 생태계를 보여주는 상림은 함양사람들의 쉼터이자 자연학습장이다. 함양 상림은 우리나라에서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는 20여 곳의 숲 가운에 유일한 낙엽활엽수림 천연기념물로, 특히 한여름 우거진 숲과 단풍 든 오솔길이 아름답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인공림으로 천연기념물 제154호이다.
약 1,100년 전인 신라 말 함양(당시는 천령) 태수였던 최치원은 고을을 가로지르는 위천이 넘쳐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물줄기를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서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었다. 이것이 퍼져 이루어진 숲이 상림으로 원래 대관림(大館林)이라 불렸다. 대홍수에 의해 둑의 중간이 파괴되자 그 틈으로 집들이 들어서서 상・하림으로 나뉘었다가 하림은 없어지고 지금의 상림(上林)만 남았다. 상림의 중심부에 3,000여 평의 공설운동장이 들어서 휴식처로 애용되고 있으나, 공해 때문에 숲이 점차 파괴되고 있어 전문가들은 상림을 살리기 위해서는 운동장을 폐쇄하고 자연학습장으로만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상림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막을 것이 아니라 자연을 가까이하면서 아끼는 마음이 절로 생기도록 조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상림은 역사가 오랜 만큼 각종 유적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함화루(咸化樓), 척화비, 함양 이은리 석불,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등이 대표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팔작집인 함화루는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던 것을 1923년 상림으로 옮겨지은 것이다. 본래 ‘멀리 지리산을 바라본다’ 하여 망악루(望岳樓)라 이름하였으나 상림으로 옮겨오면서 함화루로 바꾸었다. 망악루에 관련된 기록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김종직의 시가 실려 있다.
“작년에는 내 발자취가 저 멧부리를 더럽혔거니, 망악루 위에서 다시 대면하니 무안도 하구나. 산신령은 거듭 더럽히게 될까 두려워하여, 흰구름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척화비는 운동장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다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한다는 것은 곧 나라를 팔아먹자는 것이니,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척화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널리 선양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비 중의 하나이다.
함양 이은리 석불은 1950년 무렵 함양군 이은리의 냇가에서 출토된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놓은 것이다. 높이 1.8m의 석조여래좌상이며, 배 아랫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는 온전히 남아 있다. 몸체를 모두 감싼 광배에는 이중의 원형을 둘러 두광을 만들었고, 머리 주위에는 연꽃잎을 돋을새김 하였으며, 신광에는 당초무늬를 새겼다. 소발한 머리에는 육계가 납작하게 표현되었고, 순박한 표정의 얼굴에 비해 빈약해 보이는 어깨에는 통견의 옷자락이 U자형을 이루며 두툼하게 묘사되었다. 두 손은 떨어져 나갔는데, 팔꿈치 아래에서 끼우게 되어 있었던 듯 구멍이 나 있다.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는 상림 입구에 서 있는 각종 기념비, 유적비들과 나란히 서 있다. 상림을 조성한 최치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3년 후손이 세운 기념비로 비석을 받들고 있는 거북의 표정이 토속적이다.
『지리산여행의 길잡이6-지리산자락』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엮음 돌베개
1996년 12월 26일 초판3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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